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18화 (1,075/2,000)

1318화. 비밀 창고

*

“누군가 했더니 한 수사셨습니다. 보화가 마음을 바꿔 나를 죽이라고 한 것입니까?”

원살이 한립을 알아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명으로 내가 당신을 쫓아 죽이러 왔다는 소립니까? 그럴 리가요. 보화 수사를 도와 준 적은 있지만 그건 거래 때문이었지. 그녀의 수하가 된 적은 없습니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제가 오해를 했나 보군요. 한 수사께서 이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긴 수사도 어엿한 대승기 수사가 되었는데 보화의 명을 들어 폐인이 된 제 뒤나 쫓을 리 없겠지요.”

원살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폐인이라……. 확실히 기운이 불안정해 보이기는 합니다. 보화 수사가 손을 쓴 것입니까?”

“아니요. 스스로 수행의 절반을 폐한 것입니다.”

침음하던 원살이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어째서 스스로의 수행을 폐했단 말입니까?”

“스스로 수행을 폐하지 않았으면 보화가 나를 황무지로 쫓아 보내는 것으로 끝냈겠습니까? 보화의 신임을 받던 제가 배신을 했는데도 죽이지 않다니 저도 예상치 못한 결과입니다.”

원살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보아하니 보화 수사와 당신 사이의 정이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사를 살려 보내 주다니요.”

“전 수행이 떨어져 이제 한 수사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저를 어떻게 처분하실 생각이신지요?”

“보화 수사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당시의 일을 되갚아 줬을 겁니다. 허나 지금의 당신은 수행이 떨어진 것은 물론 의지 역시 꺾여 다시 대승기 경지에 오르기도 어려워 보이는군요. 한때나마 마계의 대승기 노조 신분이었던 것을 고려해 과분한 처분을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스스로 팔을 자른다면 예전의 은원은 없던 것으로 하지요.”

한립이 잠시 생각하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팔 하나라, 그렇게 간단히 일을 마무리 지어주시겠다면 따르겠습니다.”

원살이 움찔하며 씁쓸하게 답하고 자신의 어깨로 입에서 하얀 빛을 뿜어냈다. 팔이 소리 없이 잘려나갔는데도 어깨의 매끈한 상처부위에서는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펑!

떨어져 내린 팔이 무형의 힘에 의해 터져 핏물로 변했다.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원살이 더없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시지요.”

“수사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아마 이후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원살은 한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남색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둔광 속에서 그녀의 어깨에 검은 기운이 몰려들어 새로운 팔을 만들어냈다. 겉보기에는 이전과 똑같았지만 원기를 크게 상했을 것이다.

“한 형, 원살을 이대로 보내줘도 될까요? 나중에 복수할 수도 있잖아요.”

선박 위에서 지켜보던 은월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보화가 상대에게 일부러 살 길을 열어주었는데 내가 굳이 원살을 죽일 필요는 없다. 그들 사이에 못 다한 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게다가 앞으로 마계에 돌아올 날이 또 있을지 모르는데 마계의 시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원살은 의지가 꺾여 다시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희박하니, 당연히 복수할 여력도 없을 것이다. 대승기에 이르지 못하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하긴 그렇네요. 수행을 회복한다고 해도 한 형이 걱정할만한 상대도 아니고요. 그나저나 마음이 복잡하네요! 원살의 혼백 한 줄기 때문에 인계 곤오산에서 저희 둘 다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녀가 저런 신세가 되다니요.”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 되었다. 신경 쓰지 말고 서둘러 읍령이 남긴 비밀 창고로 가자꾸나.”

“네, 한 형!”

담담한 한립의 말에 은월도 반대하지 않았고 하얀 선박이 다시 웅! 하고 울며 방향을 틀었다

* * *

두 사람을 태운 선박은 반나절이 지나서 얼음으로 뒤덮인 평원 위에 도착했다.

괴상하게도 드넓은 얼음 평원 가운데 녹색 호수가 찰랑이고 있었다.

호수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열기가 가득했고 중앙에서 끊임없이 물거품이 일었다.

얼음 평원 한 가운데의 호수 주변에는 암녹색의 관목들이 자라나 기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립이 뱃머리에서 호수를 살피고 웃음 지었다.

“흥미롭구나.”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라 그런지 특별하기는 하네요. 그런데 그간 이곳을 지나친 고계 마족들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걸까요?”

“호수를 발견했어도 지도가 없으니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소매 속에서 수정 조각 네 개를 뿜어냈다. 오색 기운을 발산한 수정 조각들은 호수 표면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열려라!”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한립이 다른 손으로 허공에 ‘개(開)’ 자를 적었다.

쿠르릉!

수정 조각에서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오색 빛의 진법을 응결했다. 한립이 따로 술법을 펼치지 않아도 빛의 진법이 호수 속으로 회색 빛기둥을 발산했다.

“이게 읍령이 만들어 놓은 입구군요! 과연 잘 숨겨 놓았네요.”

은월이 흥분해 소리쳤다.

“가지. 안에 금제가 있다 해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야.”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발끝으로 톡 치자 선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 사람은 그대로 호수의 검은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새까만 구멍 속으로 사라진 순간, 허공의 오색 빛의 진법도 쾅! 하고 흩어져 네 개의 수정 조각으로 변한 다음 그 뒤를 따랐다.

힘차게 회오리치던 소용돌이가 광풍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수 아래 정체 모를 미궁 속에서 한립과 은월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굵은 원기둥들이 많이 세워져있었다.

높다란 기둥들을 검은 기운이 휘감고 안에서는 희미하게 귀곡성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수행이 낮은 수사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벌써 어지러워 고꾸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은월은 몸에서 빛을 일으켜 소리를 차단했고 한립은 더더욱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하늘은 이제 검은 기운이 가득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그들 가까이 있던 몇 개의 돌기둥에서 검은 기운이 뭉쳐져 흉흉하게 생긴 거대 늑대 몇 마리로 변했다.

한립은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는데 그를 향해 달려들던 세 마리 늑대 허상이 회색 기운에 휩쓸려 사라졌다.

은월을 노리고 달려든 늑대들은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른 거대한 은색 늑대에게 잡아먹혀 괴이하게 사라졌다. 그들은 유유히 기둥들을 지나갔다.

“이게 몇 번째였죠?”

“일곱 번째였다.”

은월의 질문에 한립이 차분하게 답했다.

“하하, 읍령 노조가 명성답게 쓸 만한 금제들을 남겨두었네요. 앞으로 만나게 될 금제도 한 형과 같은 대승기 노조에게는 통하지 않겠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읍령 노조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걸 게다.”

“네? 그럼 한 형 생각은…….”

“저 기둥들이 겨우 사악한 소리나 연허기급 요수 환영을 분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기둥들에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단 소리세요?”

“이걸 보면 알 것이다.”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손을 들어 허공을 쥐었다.

화륵!

손끝에서 은색 화염이 뻗어나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끌어왔다.

은색 화염 속에서 회색 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그 모습에 은월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음기(穢陰氣)라 불리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무형의 기운이지만 악독하기 짝이 없지. 합체기 수사라도 예음기를 잘 감지하지 못하고, 몸 안에 일정량이 쌓여 폭발할 때에야 비로소 알아차리지.”

“그런 것이 있단 말입니까? 그럼 제 몸에도 이미…….”

은월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의식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하하, 걱정 말거라. 내가 있는데 예음기가 네게 접근하게 두었겠더냐? 진작 의식의 힘으로 차단해 두었다.”

“한 형, 깜짝 놀랐잖아요! 일부러 제게 알려주지 않은 거죠?”

은월이 슬쩍 눈을 흘기는데 요염하게 짝이 없었다.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무형무색이라는 점 때문에 예음기가 무서운 것인데, 이미 알아챘으니 전혀 위협이 될 리 없지. 의식의 힘으로 몸을 보호하면 연허기 수사라도 손쉽게 예음기를 차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그렇다면 이 미궁이 읍령 노조의 비밀 창고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겠어요! 이전에 찾아낸 두 곳은 다른 평범한 마족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형과 제 눈에 찰만한 보물은 없었잖아요.”

“평범한 마계의 성조였다면 그럴지도 모르나, 당시 읍령 성조의 명성은 시조 급과도 나란히 거론될 만했다. 미궁 외에 더욱 강력한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르지.”

“더 강력한 것이요? 그래봤자 금제나 진법일 텐데요, 뭐.”

“그럴 지도.”

그들은 대화를 나누면서 요수 환영 무리를 처리했다. 빼곡하던 돌기둥들도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전방에는 검은 문양이 새겨진 주홍색 대문이 보였다. 한립은 주홍색 대문을 훑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화원정(火元晶)으로 제련된 문이라니, 읍령 노조의 가산이 생각했던 것보다 풍부했던 모양이구나.”

그는 손끝으로 주홍색 대문을 가리켰다.

화륵!

은색 화염이 대문 쪽으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고요하던 대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며 적홍색 화염이 흘러나와 화염대문으로 탈바꿈했다.

쿠쿠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와 멀리 서있던 은월도 보호막을 강화하고 뒷걸음질 쳐야 했다.

문 뒤쪽은 말 그대로 불바다였다. 합체기 수사인 은월도 전력으로 보호막을 발동해야 이겨낼 정도였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서령진화를 수련한 그는 웬만한 불길에는 부상을 입지 않았다.

‘불길 속에서 금제의 파동이 느껴진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소리겠지.’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입에서 은색 불구슬을 뿜었다.

휙!

불구슬은 은색 불새로 변해 날개를 쫙 펴고 불바다로 쇄도했다. 괴이하게도 불새가 지나는 자리마다 불길이 갈라져 길이 만들어졌다.

“은월, 우리도 가자꾸나!”

한립이 은월을 부르며 불길 사이로 이동하자 은월이 빙긋 웃으며 그 뒤를 쫓았다.

그들은 불새를 따라 거침없이 불바다를 지나갔다.

갈라진 불길 아래로 주먹 크기의 적홍색 수정돌이 가득했는데 그 속에서 불길들이 흘러나와 불바다를 이룬 것이다.

한립과 은월이 은색 불새를 따라 불바다 중간에 이렀을 때 어디선가 굉음이 울렸다.

은색 불새 아래에 있던 수정돌이 갈라지며 칼을 든 손이 갑자기 튀어나와 불새를 둘로 갈랐다.

평범한 영수였으면 치명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을 강력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불새는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었기에 둘로 잘린 몸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은색 불새는 그 즉시 두 날개를 아래쪽으로 펄럭여 반격을 가했다.

휘휘휘휙!

은색 깃털들이 빽빽한 은빛으로 변해 칼을 쳐내고 수정바닥에 꽂혔다.

콰르릉!

폭음이 연달아 들리며 지반에 구멍이 뚫려 갈라졌다. 적홍색 손도 순식간에 망가져 곧 산산이 갈라질 듯했다.

이때 인근의 다른 수정 지반에서 또 다른 적홍색 주먹이 날아올라 은색 불새를 공격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수많은 적홍색 주술문자들이 불새를 상처 입혀 은색 불길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한립과 은월은 저공에 멈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불바다 속에서 불길이 거세게 요동치고 수정 지반이 격렬하게 떨리더니 작은 언덕 크기의 인형(人形) 괴뢰가 기어 나왔다.

적홍색 갑옷을 입고 손에 거대한 칼을 쥐고 있는 꼭두각시는 미간에 적홍색 수정돌이 박혀있었고 온몸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마정괴뢰(魔晶傀儡)?”

한립은 거대 괴뢰의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꼭두각시의 겉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마정괴뢰와 비슷했지만 독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통의 꼭두각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