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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17화 (1,074/2,000)
  • 1317화. 지난날의 강적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 드디어 한립은 홀로 남폭호를 떠났다.

    그리고 광원재 4층에는 자령이 창가에 서서 아련한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달콤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의연해 보이기도 했다.

    “언니, 정말 한 형과 다른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도 되겠어요? 분명 얼마 전까지는 함께 영계로 돌아갈 날을 기대하고 있었잖아요.”

    “지금 그와 같이 떠나면 잠시 곁에 머물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겠지. 하지만 수만 년, 수십만 년 후에는? 한 형의 자질에 언제고 선계로 비승할 게 분명한데, 영원히 곁에 있고 싶다면 함께 선계로 가는 수밖에 없을 거야.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는 길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남영,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니?”

    자령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탄식하듯 답했다. 그 말에 베옷 소녀가 표정이 달라져 생각에 잠겼다.

    * * *

    보름 후, 남폭호 주변 지역의 어느 산골짜기.

    한립이 조종하는 하얀 선박이 고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아래쪽 거대한 수목 아래서 절색의 은발 여인이 그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은월이었다.

    “한 형, 자령 수사는 만나 보셨어요?”

    “만나 보았다. 마계에 남아 계속 수련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하더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녀의 자질에 마공을 계속 수련해 나간다면 대도를 이룰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은월의 질문에 한립이 평온히 답했다.

    “한 형이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자령 수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이제는 영계로 돌아갈 일만 남았네요! 조부님과 막 선배님은 다른 영계 대승기 선배님들과 먼저 영계로 돌아가셨어요.”

    은월은 언뜻 표정이 바뀌었지만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수중에 마족의 비밀창고 지도가 있는데 그곳에 상당한 보물이 남아 있을 것 같다.”

    “비밀 창고 지도요?”

    “하하, 나만 따라 오면 된다. 도중에 별 다른 일만 생기지 않으면 몇 달이면 될 것이야.”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거절할 수 있나요. 어서 출발하죠!”

    한립의 미소에 은월도 빙그레 웃고 땅을 박찼다. 그녀를 태운 하얀 선박이 웅! 하고 하얀 빛으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 * *

    몇 달 후, 두 사람이 탄 선박은 고계 마족들도 꺼리는 황무지로 진입했다.

    뱃머리에는 커다란 원숭이 괴뢰 두 마리가 서서 발밑으로 영기의 빛을 반짝이며 선박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실 중 하나에 은월이 비취색 방석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모종의 공법을 수련하는 듯 했는데 오색 기류가 여인의 전신을 타고 흐르고 등 뒤로 은색 늑대 허상이 어른거렸다.

    한립 역시 그곳에서 머지않은 밀실에서 가부좌를 하고 고민스러운 얼굴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새까맣게 반짝이는 물건은 명충모가 형벌뢰에 격살 당하고 남아 있던 검은 수정돌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의식으로 수정돌을 살피고 여러 경전을 뒤져 물건의 정체를 알아내었다.

    명충모와 같은 강대한 요충이 죽기 직전 체내의 정화(精華)를 모조리 요핵에 주입해 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혼백 일부를 그 안에 남겨 놓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명충모의 원신은 선계의 천뢰인 형벌뢰에 완전히 끝장났고 요핵 마저 절반 이상이 녹아 아주 매끈해져 있었다.

    한립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웽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었는데 한립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크고 명확하게 들렸다.

    “이 녀석들이 또 소란을 피우는구나. 이걸 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내게도 큰 쓸모가 있는 물건이란 말이지. 이 안에 녹아 있는 명충모의 정화를 흡수하면 범성진마공이 한층 더 진보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든 수정돌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웽웽 거리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소매를 털어 세 덩이의 금빛을 불러냈다.

    그러자 커다란 금색 딱정벌레 세 마리가 나타났다. 금색 몸통에 보라색 문양이 있는 서금충왕들이었다.

    딱정벌레들은 웽웽거리며 새까만 요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쉭! 쉭! 쉭!

    순간 금색 영충들이 날개를 펄럭여 뜻밖에도 요핵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에 한립은 손바닥을 펼쳐 횡으로 그었고, 무형의 기운에 영충들이 힘없이 튕겨나갔다!

    충왕을 한 걸음 앞둔 세 영충들은 강력했지만 대승기에 이른 한립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럼에도 세 영충들은 힘껏 그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튕겨나가기를 반복했다.

    한립은 흥분해 날뛰는 서금충들을 지켜보며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갈망하는 것을 보면 명충모의 요핵은 영충들에게 더 절실할지도 모르겠지. 내가 연화를 시키려다가 괜한 후환을 만들 수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진화를 앞둔 녀석들이 명충모의 정화를 흡수하면…….”

    한립은 중얼거리다 앞으로 손을 뻗어 검은 수정돌을 높이 던졌다.

    금색 딱정벌레들은 수정돌이 한립의 손을 떠나자 즉시 금빛으로 변해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수정돌을 사이에 두고 세 마리 서금충들이 충돌했다. 서로 물고 뜯으며 수시로 요핵을 씹어 삼켰다.

    마지막에는 세 마리가 한 번에 수정돌을 물어뜯어 세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요핵을 삼킨 서금충들은 보라색 문양이 요란하게 번뜩였고 몸집과 기운이 늘었다 줄었다 하며 정신없는 모습을 보였다.

    서금충들은 날카로운 경고음을 내며 더없이 흉악한 기세로 한데 뭉쳐 본격적으로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립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서금충들의 결투는 치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마리 모두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그 중 두 마리는 다리까지 하나씩 잃었다.

    웽웽!

    세 마리가 한참을 물어뜯더니 돌연 금빛을 번뜩이고 흩어졌다.

    영충들은 다시 거친 소리를 쉭쉭거리며 날개를 펄럭여 중간에서 충돌했다.

    부상이 심했지만 이전보다 더욱 격렬한 몸짓이었다.

    이에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홀연히 금빛을 내보내 세 영충들을 거둬들였다.

    한립은 서금충들을 영수환에 넣고 생각에 잠겼다. 세 마리의 영충들이 끝까지 싸우면 가장 강한 한 마리만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은 한 마리가 전설 속의 서금충왕이 되리란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설 속에서 서금충왕은 천상의 진선도 마주치면 피할 정도로 강하다고 했는데 실제로 영계에 진정한 서금충왕이 등장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앞으로 충왕으로 진화하면 얼마나 강해질 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한립은 이번에 돌아와 표린수도 폐관수련에 들어가게 했다.

    영수들은 오랜 세월 천천히 실력과 수행을 쌓아갔으며 그가 아낌없이 영약을 지원했기에 짧은 기간에 수행이 크게 늘었다.

    하얀 선박은 굳이 모습을 숨기지 않고 만황의 상공을 질주했고 그 안에서 풍기는 대승기 기운에 주변의 흉악한 마수(魔獸)들도 감히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보름이 지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고 선박은 하얀 눈이 펼쳐진 설원(雪原) 지대로 진입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고 거위 깃털처럼 큼지막한 눈송이들과 주먹 크기의 얼음 조각들이 휘날리는 곳을 우윳빛 보호막을 두른 선박이 유유히 지나쳤다.

    원숭이 꼭두각시 두 마리도 여전히 뱃머리에 서서 선박을 조종했다.

    며칠 후, 설원 깊은 곳에 이르자 하얀 눈이 종적을 감추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빙하가 나타났다.

    높고 낮은 얼음 산맥에 털이 복슬복슬한 짐승들이 뛰어다녔는데 하늘 위로 선박이 날아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얀 마수들은 수행이 너무 낮아 선박의 강대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쉭!

    선박 안에서 은빛이 튀어나와 짐승 무리를 거쳐 돌아왔다.

    은빛이 반짝이고 은월이 어린 짐승을 쥐고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하얀 곰을 닮은 짐승은 머리에 짧은 남색 뿔이 하나 솟아 있었고 귀가 유난히 길어 굉장히 귀여웠다.

    은월에게 목덜미를 잡힌 어린 짐승은 네 발을 버둥거렸고 머리 위에서 타닥타닥, 보일 듯 말 듯 남색 뇌전을 번득였다.

    “재미있는 녀석이네? 마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인계의 영수 같아.”

    은월이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빙각웅(氷角熊)이다. 마계에서는 드물게 마기를 빌리지 않고 살아가는 저계 마수로 얼음과 뇌전의 두 가지 속성을 타고 났지.”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월이 뒤를 돌자 한립이 선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형, 이 짐승에 대해 아세요?”

    “예전에 마계의 경전을 살피다 본 적이 있다. 영수와 비슷한 마수라 인상이 깊게 남았고.”

    “그랬군요. 그런데 한 형이 출관한 것을 보니 목적지가 가까워졌나 보네요.”

    “반나절이면 읍령밀도에 표시된 지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의식을 넓게 퍼트려 주변을 훑고 온화하게 답했다.

    “반나절이라면 정말 금방 도착하겠어요. 헤헤, 마계에서 이름 높은 읍령 노조가 숨겨 놓은 창고면 보물이 적지 않겠죠?”

    은월이 들뜬 기색을 드러냈다.

    “그건 알 수 없겠지. 마족과 인족의 공법에 차이가 크니, 그들이 진귀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우리에겐 그다지 쓸모없는 물건일수도 있으니까. 마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행 보물인 묵령성주(墨靈聖舟)를 그 자가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괜히 시간 낭비를 한 것은 아니겠지.”

    “마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행보물이요? 정말 빠르겠어요.”

    은월의 말에 한립이 답하려다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주시했다.

    “한 형, 뭔가 발견하신 건가요?”

    “잘 아는 얼굴을 만난 것 같구나.”

    그가 남색빛을 일렁이며 먼 곳을 보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

    “그래, 아주 오래 전에 너와 내가 함께 만났던 인물이다. 만나러 가야겠구나.”

    한립은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도 아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은월은 의식으로 그가 쳐다보던 방향을 훑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한립이 발끝으로 선박을 치자 웅! 소리를 내며 선박이 방향을 틀어 쾌속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높다란 빙산에 다다르자 하늘이 울리고 굉장한 파랑이 도처로 퍼져나갔다.

    오랜 세월동안 존재한 듯한 빙산이 절반정도 깎여 있었고 이곳저곳 움푹 파여 얼음조각들이 수북했다.

    굉음의 중심에서 하얀 한기의 남색 기운이 뭉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방대한 물체들이 격렬하게 싸우는 중인 것 같았다.

    한립은 선박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었다. 은월이 맑은 눈을 깜빡였지만 천지원기가 요동쳐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저 자는!”

    은월은 의식으로 그 안을 훑다 익숙한 기운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이에 한립은 미소를 지었고 여전히 배 위에서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일다경 후, 경천동지할 소리가 울리고 남색 기운이 폭발했다.

    크하학!

    참혹한 요수의 포효소리와 함께 공간파동이 일었다.

    커다란 하얀 교룡이 광채 속에서 상처 입은 몸으로 튀어나와 멀리 달아나려했다.

    그때 호리호리한 인영이 번득 모습을 드러냈다.

    손톱이 길게 자란 남색 거대 손이 번개처럼 하얀 교룡을 조각조각 잘라버렸다.

    이어 거대 손에서 검은 화염이 흘러나와 하얀 교룡의 잔해를 뒤덮었다.

    조각난 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검은 화염 속에서 꿈틀거리며 울부짖었다.

    교룡 잔해가 재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한립이 천천히 입을 뗐다.

    “원살 수사, 우리가 인연이 있기는 한가 봅니다. 이런 외진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다지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으십니다.”

    광채 속의 호리호리한 인영은 백옥 같은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여인이었다. 목족 영역에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는 원살 성조였다.

    그녀는 지금 창백했고 기운도 흐릿해 아주 불안정해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겨우 합체기 수행밖에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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