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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16화 (1,073/2,000)
  • 1316화. 자령의 결심

    *

    또 다른 거대 산봉우리 정상.

    한립과 원염이 오랜 벗처럼 마주 앉아 안 마디씩 주고받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원염은 마계의 3대 시조답게 수련 상의 깨달음이 풍부해 한립도 내심 감탄했다.

    원염 역시 겉으로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한립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아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어떤 비술에 관해 이야기 하던 한립이 문득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힐긋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 형, 보화 수사께서 복수에 성공한 듯싶으니 더는 수사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저는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짓고는 곧바로 푸른 둔광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바위에 앉은 원염의 얼굴에 약간이지만 유감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둔광을 거두고 작은 산으로 하강했다.

    그곳에 은월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 옆에는 인자하게 생긴 노인과 은발을 어깨까지 늘어트린 준수한 청년이 서있었다.

    바로 인요족의 대승기 수사인 막간리와 오소 노조였다. 세 사람은 한립이 돌아오자 동시에 얼굴이 환해졌다.

    * * *

    세 달 후, 마계의 명소인 남폭호(藍瀑湖) 상공에 백옥 선박이 나타났다.

    마족들이 흔히 쓰는 것과는 달리 주술문자가 새겨진 선박은 불가사의한 속도로 호수 위를 가로 질러 날아가고 있었다.

    남폭호 전역에 펼쳐져 있는 금공금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마족들은 선박을 보고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공경스런 태도를 취했고 몇몇은 엎드려 대례를 올리기도 했다.

    금제를 무시하며 날아가는 선박의 주인은 분명 남폭성조와 동급의 다른 성조일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백옥 선박 위에는 한립이 타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자령을 위해서였다. 그녀에게 육극의 통제에서 벗어나면 인족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해 영계로 데려가겠다고 말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육극이 보화에게 살해당했으니 마계에서 그녀를 위협할 자는 없어졌고 이제 약속대로 그녀를 데리러 온 것이다.

    이곳에 머무는 남폭성조는 상고봉인에 갇혀 있던 수사들 중 한 명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를 막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한립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하얀 선박은 어느새 거대 섬 변두리에 도착했다.

    선박은 섬 주위를 돌다 하얀 빛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어느 밀림으로 내려갔다.

    푸푸푹!

    하얀 빛의 장막으로 이루어진 몇 겹의 금제가 한립의 방대한 의식의 힘에 뚫리고 거대한 통로가 생겨났다.

    선박은 금제가 원형을 회복하기도 전에 쏜살같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금제 아래쪽 누각 대문에는 ‘광원재(廣源齋)’라는 고대문자가 큼지막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시각 누각 4층 밀실에서 느긋하게 책을 보던 베옷소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고 희색을 드러냈다.

    “아가씨, 큰일입니다! 누군가 강제로 금제를 뚫고 침입하고 있습니다!”

    노한 부인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주 이모. 적이 아니라 귀빈이 도착한 것이에요.”

    베옷 소녀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일다경 후, 한립은 3층 대청에 나타났고 탁자를 가운데 두고 베옷 소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형, 아니지요, 이제는 정말 선배님이라 불러드려야 하겠습니다. 겨우 몇 백 년 사이에 대승기 노조가 되셨네요. 수사의 자질에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베옷 소녀가 입을 삐죽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한립을 어려워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이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이이니 호칭은 그대로 해도 상관없네. 그보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시인의 땅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알고 있겠지?”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온화하게 말했다.

    “한 형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괜한 예는 차리지 않겠습니다. 시인의 땅의 일로 마계가 크게 시끄러웠습니다. 당연히 광원재에서도 누구보다 가장 먼저 관련 정보를 수집하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마계 전체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명충모가 보화 수사와 한 형의 손에 죽임을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저도 안심하고 광원재를 경영할 수 있겠어요.”

    “나와 보화 수사는 명목상으로 이름만 걸어 놓았을 뿐이지, 명충모를 죽인 것은 또 다른 인물의 개입이 있었네. 명충모의 실력에 그렇지 않았으면 죽이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야. 그저 자세한 사정은 광원재에 밝힐 수 없다네.”

    “그랬군요. 하지만 전 여전히 명충모를 죽이는데 한 형의 공도 상당할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과찬일세. 이번에 내가 소저를 찾은 것은 자령과 연락을 취하기 위함이야. 그녀를 데리고 영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이네.”

    “하하, 제게 맡겨만 주세요! 자령 수사는 줄곧 인근 비밀 동부에서 수련 중이라 며칠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한 형께서는 광원재에 며칠 간 머무르는 것이 어떠십니까?”

    남영은 한립이 솔직히 찾아온 목적을 밝히자 두말없이 요구를 수락했다.

    “그럼 며칠만 실례해야겠군.”

    잠시 생각하던 한립은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 말에 남영은 크게 기뻐하며 당장 시인의 땅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묻고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아, 한 가지 더 광원재의 힘을 빌려야할 일이 있네.”

    “무엇이든 분부만 내려주세요.”

    “일단 선자가 몇 가지를 직접 살펴봐 주었으면 하는데…….”

    한립은 소매 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수정 조각 네 개를 불러냈다.

    “이건…….”

    남영은 눈으로 수정 조각을 훑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마계 읍령성조의 유산이 남아있다는 보물창고 지도일세.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는데 마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지도에 표시된 지점들을 찾을 수 없더군.”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읍령밀도(泣靈蜜圖)로군요! 와아, 저도 무척 탐이 났지만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거라면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비밀창고가 마계에 위치한다면 제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요.”

    남영이 눈에 이채를 띠고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 * *

    닷새 후, 누각의 대청에서 한립은 자령을 만났다. 그들은 다시 만난 것에 기뻐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남영이 진작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 주었기에 그곳에는 둘뿐이었다.

    자령은 남영에게 한립이 대승기에 이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그와 마주해 육극까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멍해졌다.

    그 일이 벌어진지 몇 달 밖에 지나지 않았고 보화를 비롯해 관련 인물들이 침묵해 아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드디어 자유를 되찾게 되었고 더는 언제 화신이 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네요.”

    자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지. 육극 본인은 물론 여섯 화신도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앞으로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럼 한 형께서 이번에 절 찾아오신 건…….”

    “물론 네게 말한 대로 인족의 육신을 되찾을 방법을 찾아주고 영계로 함께 돌아가기 위함이다. 특별히 여러 비술들을 찾아냈으니 네 몸 안의 진마기를 몰아내고 원래 체질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야. 그런 다음 영계에서 인족 공법을 다시 수련하면 되겠지.”

    머뭇거리며 묻는 자령을 보고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자령의 표정이 이상했다. 즐거운 기색 없이 오히려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대로 답해주세요.”

    “우리 사이에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편하게 물어봐도 된다.”

    한립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전 한 형께서 선계로 비승해 진정한 선인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걸 알고 싶다고?”

    “네, 꼭 사실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자령은 그를 곧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한립이 곰곰이 생각하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그런 질문을 했다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령 너라면 거리낄 것 없겠지. 이전에는 비승의 겁을 무사히 넘길 가능성을 2할로 보았는데 이번에 시인의 땅에서 또 다른 기연을 얻어 2할 정도 확률이 더 늘었다. 물론 그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거의 절반에 가까운 확률로 언젠가 선계로 가실 거란 말이네요. 평범한 대승기 수사에 비해 자질이 뛰어나시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성공 확률이 높을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자령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자령, 갑자기 이런 질문을 왜 하지?”

    “한 형, 기왕 대답해 주시기로 한 것 한 가지만 더 알려주세요. 제가 마기를 제거하고 인족의 몸으로 돌아가면 수행이 크게 줄어 경지가 한참 떨어지겠지요?”

    “마기를 주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수행을 보전하면서 인족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도 있지만, 육극의 마공을 오랜 세월 수련해 어쩔 수 없이 경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걱정할 것 없다. 네 자질에 원래 수행을 되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야. 또한 내가 이후의 수련을 도울 것이다.”

    한립이 상대의 생각을 짐작하고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지난번 만남 이후 영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계에 남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육극이 예전에 말했듯 제 체질은 본래 마계의 공법을 익히기에 적합하니까요. 영계로 돌아가 한 형의 비호를 받는다면 간신히 대승기에 이를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에 비승하기는 무척 어려울 겁니다. 아마 전 한 형이 선계로 비승해 진선이 된 후에도 하계에 남아 천겁이 돌아올 때마다 목숨의위협을 받아야 할 테고요.”

    “결단을 내린 것이냐? 지금의 수행이라면 어떻게든 체질을 돌려놓을 방법이 있겠지만 마계에서 대승기 경지에 이르면 마인의 육체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한립이 그녀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생각해 내린 결론이니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선계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겠어요.”

    “자령 네가 그리 마음먹었다면 나도 다른 선택을 강요하지 않겠다. 그동안 마계에 와서 얻게 된 마공 수련에 관한 비술과 단약들을 전부 주고 가마.”

    여인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시지 마세요. 한 형의 실력이면 공간을 찢고 성계에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테니 나중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자령은 이 말을 하면서 슬쩍 얼굴을 붉혔다.

    한립은 자령의 진심에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더는 그녀에게 함께 영계로 갈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체질이 마공에 더 적합하다면 인족으로 돌아가 선계로 비승할 길이 끊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영계든 마계든 원하는 곳에 머물며 자신만의 기연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한립은 광원재에서 한 달을 묵었다.

    그동안 그는 마공에 관한 수련상의 깨달음을 자령에게 몽땅 전수해주었고, 그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많은 수확을 얻어갔다.

    대승기 수사의 아낌없는 지원과 가르침은 그녀 같은 경지의 수사에게는 엄청난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광원재는 여러 계면에 퍼져 있는 초대형 세력답게 한 달 만에 정말 읍령밀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아내 남영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남영 역시 즉시 그 소식을 한립에게 전해 그를 기쁘게 했다.

    …….

    그 후 며칠간 한립은 자령과 함께 남폭호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유람했다. 그녀와 함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전에 인계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수시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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