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3화. 의식사슬과 형벌뢰(刑罰雷)
*
두 방대한 물체의 다툼에 심해 전체가 소멸될 것 같았다.
뻐억!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명충모가 일순 방심한 틈에 검푸른 몽둥이가 백옥 같은 괴충의 등을 내리쳤던 것이다.
그러나 명충모는 괴성을 지르고 다시 되돌아와 거원의 지척에서 날카로운 열댓 개의 다리를 뻗었다. 엄청난 수의 하얀 바람의 칼날들이 막대한 힘을 머금고 지척에서 폭발했다.
금강 거원은 당황하지 않고 몽둥이를 열심히 휘둘렀다.
푹! 푹!
백옥 주먹 두 개가 바람의 칼날의 비호를 받으며 불시에 튀어나와 금갑 거원의 가슴을 강타했다.
자금색 빛이 반짝이는 갑옷이 움푹 들어갔고 거원은 어쩔 수 없이 뒤로 튕겨나가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겨우 멈춰 섰다.
하지만 그 사이 명충모가 등 뒤의 매미 날개를 털고 귀신같이 따라 붙어 열댓 개의 다리를 갈고리처럼 굽혀 거원을 베려 들었다. 동시에 앞다리가 거원의 중간 머리로 날아들어 눈을 뽑아내려 했다.
명충모의 육체 강도를 고려할 때 이번 연환 공격에 당하면 금갑 거원이 아무리 튼튼해도 중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도 예상했는지 몸을 멈춘 순간 거대 몽둥이를 횡으로 휘둘렀다. 반짝이는 빛 속에서 몽둥이가 세 개의 거대 산봉우리로 분리되어 거원의 앞을 막았다.
촤아악!
산봉우리들은 명충모의 갈고리 같은 다리들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이때 명충모의 팔이 폭음을 내고 부풀어 올랐다. 흐릿해진 팔은 기이하게 산봉우리들을 휘감고 돌려 두 손가락으로 거원의 눈을 파내려 했다.
금갑 거원도 명충모의 마지막 수는 예상치 못했기에 이제와 피하려 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체내의 법력을 맹렬히 끌어올려 얼굴을 덮은 갑옷에 마구 불어넣었다.
갑옷의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두 눈을 빠르게 덮은 순간 펑! 펑! 충돌음이 울렸다. 명충모의 두 손가락이 송곳처럼 거원의 얼굴 갑옷을 뚫고 눈을 찔렀다.
금갑 거원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눈꺼풀에 망치가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참기 어려운 극통이 전해왔다.
하하하하!
그럼에도 거원은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산봉우리가 모호하게 사라지고 거원의 자금색 갑옷에서 무수히 많은 은색 문양들이 떨어져 나와 가까이 접근한 명충모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명충모가 이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주변 공기가 묵직해지고 굵직한 은색 쇠사슬이 떠올라 흉충을 꽁꽁 묶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사슬은 보일 듯 말듯해 실체를 지닌 물건이 아닌 듯 했다. 명충모가 연달아 몸을 비틀어도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건 의식사슬! 네, 네 녀석이…… 연신술을 익힌 것이냐! 이런 비술이 어떻게 하계까지 흘러들어왔단 말인가!”
사납게 몸부림치던 명충모가 처음으로 겁먹은 눈빛을 보였다. 한립이 변한 거원은 무표정하게 여섯 팔로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에 은색 사슬이 더욱 강하게 조여 명충모는 이전보다 더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네가 연신술을 익혔다 해도 상관없다! 네까짓 녀석의 의식의 힘으로 본 좌의 진극체를 속박할 수 있겠느냐!”
명충모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전신에서 오색 주술문자를 일으켰고 눈을 감고 있던 나머지 두 머리도 요목을 번쩍 뜨고 음산한 눈빛을 보냈다.
흉충의 몸에 낯선 기운 두 개가 생겨나 원래 소실되었던 법력의 파동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명충모의 변화에 거원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명충모가 어리둥절해 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이걸로 당신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주 잠깐만 당신을 붙들어 둘 수 있다면 충분할 테니까요.”
“뭐라는 것이냐?”
흠칫 놀란 명충모가 다급히 주위를 훑었지만 멀리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해 도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콰르르릉!
바로 그때 심해 위쪽에서 심상치 않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찌를 듯한 광채를 품은 뇌전들이 오색 뇌전 기둥을 이루어 기세등등하게 내리꽂혔다.
“악, 형벌뢰(刑罰雷)! 하강 노귀, 네 놈이 아직까지 살아있었단 말이냐!”
줄곧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던 명충모가 뇌전 기둥을 보고는 혼비백산해 했다. 세 머리가 고개를 쳐들고 시커먼 화염을 콸콸 쏟아냈고 체내의 새까만 정핵은 웅웅 울어댔다.
명충모는 급한 마음에 정핵을 스스로 폭발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하고 있었다. 흉충을 단단히 묶고 있던 은색 사슬이 시커먼 화염에 녹아내리려 했다.
쿠콰쾅!
명충모가 막 구속에서 벗어나려는데, 하늘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오색 뇌전기둥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떨어졌다. 무수히 많은 뇌전에 휘감긴 명충모는 오색 뇌전에 잠식당했다.
섬뜩한 비명 소리가 들리고 명충모의 육체가 쪼개져 순식간에 무(無)로 돌아갔다. 이에 오색 뇌전기둥도 그 순간 함께 사라졌다.
수면 위 고공에서 오색구름으로 이루어진 거대 눈도 소리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잿빛으로 물들었다.
* * *
그 시각, 지하궁전 깊은 곳 신비한 석림 중간의 돌탑.
새까만 발우 안에서 무언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고대 등잔과 연결된 사슬들이 진동했다.
여러 등잔 중 유일하게 불씨가 남아있던 것이 바르르 몸을 떨며 빛을 잃었다.
“휴우, 간신히 해냈구나! 이번 일격으로 남아 있던 내 혼백의 힘을 9할이나 소모하다니. 저 녀석이 나를 도울 수 없었다면 크게 밑지는 장사겠지만, 그 빌어먹을 년을 제거했으니 복수한 셈 쳐도 되겠지.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야! 하하하, 저 하계 녀석에게 내가 고마워해야 할지도…….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발우 안에서 사내가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웃음소리에서 피맺힌 한이 느껴졌다.
* * *
한립은 명충모를 처리한 것에 기뻐할 겨를도 없이 거원의 중간 머리를 붙들고 고통스럽게 포효하는 중이었다.
방대한 육체가 점차 줄어들었고 자금색 갑옷은 수많은 비늘로 갈라져 피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일다경 후,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한립은 간신히 서있었다.
이번 변신으로 진원을 크게 상한 것은 물론 의식사슬을 만들어 내느라 의식의 힘도 거의 바닥나고 말았다.
이렇게 치열한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해 형, 괜찮으십니까?”
한립이 멀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해 도인을 향해 물었다.
“괜찮습니다. 한동안 푹 쉬면 나아질 테지만 몇 달간 전투는 할 수 없을 겁니다. 무리해서 힘을 쓰면 이 육체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을 테니까요.”
해 도인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덤덤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영수환에 들어가 잠시 쉬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후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것도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남지 않았으니 돌아다녀 봤자 짐만 될 겁니다.”
그의 제안에 해 도인도 반대하지 않았다. 수결을 맺자 그의 몸에 은빛 기운이 흐르고 순식간에 작아져 손바닥 크기의 황금 게로 변했다.
한립은 소매 속에서 오색 기운을 품어 황금 게를 불러들이고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영수환 속에 넣었다.
“보화 수사께서도 구경할 만큼 했으면 이제 나오시지요. 그런 비술은 원기 소모가 극심할 텐데 힘이 다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한립이 허공을 쳐다보고 말했다.
“한 형의 의식의 힘이 확실히 대단하네요. 하지만 오해하신 것이 있습니다.”
허공에 파동이 일고 보화가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미 법력을 다 소모해 비술을 사용할 처지는 못 되고 가까운 벗이 준 부적으로 잠시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눈빛으로 그를 향해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을 표했다. 한립이 명충모와 싸우며 보여준 실력은 마족 시조인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겉으로는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경계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사도 아실 것 아닙니까? 명충모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제 공이 아니라 다른 이가 손을 썼기 때문입니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품에서 약병을 꺼내 비취색 단약 몇 개를 집어 삼켰다.
“그렇다고 해도 한 형이 아니었다면 명충모를 붙잡아 둘 수 없었을 겁니다. 형벌뢰가 아무리 강해도 명충모를 맞추지 못했다면 허사였겠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천뢰를 조종한 인물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속속들이 알고 우리에게 직접 전음까지 보내왔습니다.”
“저도 상대의 신분은 모르겠으나 천뢰를 조종하는 것으로 보아 절대 하계의 인물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다 상고봉인과 명충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아무래도 상고시대 때 명충모를 이곳에 봉인한 진선 중 한 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명충모도 이전의 흉충이 아닌 듯했습니다. 체내의 원신이 선계의 사정에 밝지 않았습니까? 설마 또 다른 선계 진선의 원신이 흉충의 몸을 장악한 것이었을까요?”
보화가 의아한 마음을 드러냈고 한립도 생각에 잠겼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빈도에게 다녀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갑자기 수면 위에서 사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온화하고 차분한 말투가 그들에게 전음을 보낸 인물과 일치했다. 한립과 보화가 표정이 달라져 서둘러 시선을 교환했다.
“자네들은 빈도도 경계하는 것 같구만! 상관없네, 어차피 명충모가 사라졌으니 그 공간도 곧 허물어질 테니까. 잠시 후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야.”
머뭇거리는 그들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사내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보화가 놀라 입을 뗐는데 대답 대신 바다 깊은 곳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런, 정말 무너지려나 봅니다!”
보화가 난색을 표했다. 한립도 미간을 좁히며 격살당한 곳을 힐끗 보고 손을 뻗었다.
휙!
엄지손가락 크기의 검은 구슬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 그것은…….”
보화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바닷물이 요동치고 하늘과 땅이 갈라져 하얗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웅!
여인이 안색이 급변해 얼른 적홍색 진법 원반을 꺼내 발동하려 했으나 괴이한 파동이 나타나 원반의 빛을 거두어갔다.
빙글 돌아 보화의 손바닥에 떨어진 원반은 반응이 없었다.
“이곳에서 쉽게 빠져나가기는 어렵겠습니다.”
“그럴 겁니다. 우리를 붙들어둘 자신이 있으니 그 자가 곧 만날 거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보화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한립이 평온하게 답했다.
파앗!
돌연 두 사람 주위로 회색 기운이 몰려들어 흐릿하게 빛의 진법을 형성했다.
한립과 보화는 놀랐지만 굳이 피하거나 저항하지 않았고, 빛이 번득한 다음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광활한 바다를 품은 공간이 철저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전송 후 눈을 뜨자 자신이 높은 핏빛 제단 위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옆에는 보화가 바짝 붙어 서서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새까만 발우가 놓여 있었고, 도처에는 핏빛 등잔이 올라가 있는 8개의 거대한 청동 기둥들이 보였다.
“현묘한 상고금제입니다. 이곳의 상고봉인과 비슷해 보이는데요?”
보화가 관찰을 마치고 중얼거렸다.
“팔원쇄혼대진(八元鎖魂大陣)을 하계 수사가 알아볼 줄은 몰랐구만. 자네 말대로 이 진법은 명충모를 봉인한 금제와 관련이 깊다네. 간단히 생각하면 봉인금제를 만분의 1로 축소한 것과 비슷 하달까.”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한립과 보화가 동시에 제단 위의 발우를 쳐다보았다.
“과찬이십니다. 한동안 이곳 봉인을 지킨 적이 있어 눈에 익었을 뿐입니다. 정말 진법에 조예가 깊은 것은 사실 여기 한 수사지요.”
보화가 예의상 미소를 띠고 답했다.
“오, 너희 일족은 빈도가 오래 전 남겨 놓은 당부를 잊지 않고 오랜 세월 이곳의 봉인을 복구하려 노력해 왔지. 아주 장하구나.”
“선배님께서 정말 명충모를 봉인하셨던 진선 중 한 분이란 말씀이십니까!”
“하하, 당시엔 빈도도 하계로 내려와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네. 이번에 명충모를 완전히 제거하는데 자네의 공도 크니 이걸 선물로 주지. 자네가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온 게 억울하지 않도록 말이야.”
사내의 웃음소리와 함께 발우 안에서 무언가 날아올랐다.
보화가 희색을 띠고 그것을 받아 자세히 살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노란 나무 비녀로 세공이 조악한데다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무 비녀를 쥔 순간 청량한 기운이 물씬 피어올라 온몸의 경맥을 타고 흘렀다. 지친 몸이 아주 편안해 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