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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12화 (1,069/2,000)
  • 1312화. 현선(玄仙)

    *

    한립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녀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때 한 마디도 없던 해 도인이 입을 열어 그를 당황스럽게 했다.

    “진극체! 현선(玄仙)만이 지닐 수 있는 육체가 아니었던가?”

    해 도인은 여전히 무덤덤한 어투로 묻고 있었다.

    “겨우 위선뢰가 진극체에 대해 알아? 네 전 주인이 선계 인물이었던 게로구나.”

    명충모가 의외라는 듯 해 도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어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질문을 했다.

    “현선이 무엇입니까? 선계의 고계 선인을 그리 부르는 것입니까?”

    “현선은 고계 선인이라기보다 선계의 특수한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평소 선력진원(仙力眞元)을 익히지 않고 육체를 단련하는데 집중해 일반적인 선인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연선(鍊仙)이라고도 불리는데 실력이 일반 선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현선들이 목표 하는 바 중 하나가 진극체입니다.

    이런 길을 걷는 현선들은 저계 선인들 중에서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일단 선인경(仙人境)의 중, 고계에 이르면 수행을 쌓기가 어려워, 선계에서 현선의 명성이 꽤 큼에도 실제로 만나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 도인이 목석같은 얼굴로 설명해주었다.

    “연선(鍊仙)이라는 이름은 인족의 역사(力士)인 연체사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어찌 되었든 상대가 고계 선인은 아니라는 것인데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도 형은 제 신통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한립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명충모의 진원을 완전히 봉쇄해 육체의 힘으로만 대항한다면 3할의 가능성은 남아 있을 겁니다. 물론 상대가 진극체를 완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안정을 찾지 못했다는 가정 하에서 내린 판단입니다.”

    해 도인이 눈을 빛내며 나지막하게 일러주었다.

    “보화 수사도 들으셨겠지요?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아직 3할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수사가 싸우고 싶지 않다면 각자 달아나는 수밖에 없는데, 명충모가 우리를 곱게 보내지 않을 테니 적어도 우리 중 하나는 반드시 이곳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

    게다가 의식으로 살펴본 결과, 바다 속에 또 다른 힘이 간섭하고 있더군요. 수사의 봉령반이 제대로 통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제가 익힌 여러 비술로도 단시간에 공간을 찢고 벗어나기 어려울 테고요.”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보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명충모는 한립과 해 도인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토황정 한 쌍만 만지작거렸다.

    점점 보물의 기운이 어둡게 물드는 것을 보니 현천의 보물을 굴복시키고 있는 듯했다.

    “잘 알아 들었습니다. 죽기만 기다리는 것 보다는 미련 없이 싸워보는 것이 더 낫겠지요! 제게 수사를 도울 방법이 있기는 한데 반드시 해 형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것을 펼치면 저와 해 형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주저하던 보화가 결정을 내렸다.

    “하하, 그런 마음이면 안심입니다! 더 이상 시간 끌 것 없이 움직이시죠. 상대가 수사의 두 보물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에 공격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한립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알겠습니다. 해 형, 모든 법력을 제게 빌려주셔야겠습니다.”

    보화도 퍽 결단력이 있는 성격이라 즉시 해 도인을 향해 말했다. 전음으로 한립의 명을 받은 해 도인은 곧바로 수결을 맺어 보화 뒤에서 나타났다.

    콰릉!

    은색 뇌전으로 몸을 감싼 그가 두 손을 펼쳐 보화의 양 어깨에 가져다 댔다.

    후우웅!

    해 도인의 뇌광이 작은 은색 뱀처럼 변해 보화의 몸속으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보화는 양 어깨가 뜨거워지며 고갈된 법력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얗게 질려있던 그녀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주입된 법력은 체내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몸 밖으로 흩어져 버린 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런 방법을 쓰면 그녀가 막 회복한 경지가 떨어질 수도 있고, 토황정의 진정한 주인에게 크게 밉보일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어렵사리 쌓은 우정이 끝날지도 모르는 터라 보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명충모가 상계 선인의 강력한 신통까지 수련했을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했다. 아니, 싸우다 보니 지금의 명충모 안에 여러 계면을 파괴한 그 흉충의 원신이 제대로 남아 있는지도 솔직히 알 수 없었다.

    한립은 진작 명충모에게 의혹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상대가 진짜 명충모든 아니든 자신의 비밀이 이렇게 많이 노출된 마당에 그들을 살려 보낼 리가 없었다.

    보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신속히 고대의 수결을 맺었다. 그녀 주위로 분홍빛이 치솟고 오색의 불경 구절이 떠올라 열세 겹의 화려한 고리를 만들었다.

    고리 중심에 선 보화의 벌어진 입에서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와 불경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오고, 허리까지 기른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한 올씩 빠져나갔다.

    그녀의 미간에서 은빛이 일어 ‘범(梵)’ 자를 이뤄 피부 깊숙이 박혔다.

    청수한 젊은 여승(女僧)처럼 변한 보화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짙은 꽃향기가 번지고 그녀의 몸에서 분홍색 꽃송이들이 피어올랐다.

    그녀를 겹겹이 감싼 고리가 살아나 꽃나무로 변하는 모습은 멀리서 봐도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보화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꽃송이들이 가득 자라난 손을 뻗어 명충모를 가리켰다.

    난데없이 자라난 꽃들이 말라붙어 사라지고 그녀 역시 뻣뻣하게 굳어 더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열세 겹의 고리들은 보화가 보이지 않자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뇌전을 잃은 해 도인도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아 버렸다.

    뜻밖에도 운기조식에 들어간 듯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위선뢰인 해 도인이 기력을 잃을 만큼 진월을 넘겨준 것이다.

    보화가 마지막 힘까지 끌어 모아 가리킨 것은 명충모가 들고 있던 토황정이었다. 낡은 못들이 돌연 눈부신 빛과 함께 일곱 빛깔 주술문자들을 분출한 후 새빨간 화염을 뿜었다.

    화염이 명충모의 두 다리를 재로 만들고 토황정이 자유를 되찾자 날카롭게 울며 일곱 빛깔 뱀으로 변해 명충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명충모는 재로 변한 두 다리를 다시 재생시켜 불가사의한 속도로 토황정들을 따라잡았다.

    푹! 푹!

    토황정들이 두 손바닥을 무시하고 허상처럼 통과해 그대로 명충모의 몸에 박혀 들어갔다. 깜짝 놀란 명충모는 몸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몸속을 살폈다. 그런데 새까만 정핵에 박힌 토황정이 노란 실을 뿜어 정핵을 감싸고 법력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 네가 현천의 보물 본연의 힘을 격발할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구나. 이렇게 되면 잠시 동안 보물의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어도 보물을 복구 하는데 십만 년은 걸릴 테지. 허나……. 네가 한 짓거리는 본 좌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을 뿐이다. 내 너희를 갈가리 찢어 삼키고 원신은 괴뢰로 만들어 영원히 다시 태어날 수 없게 만들겠다!”

    명충모가 사납게 소리치며 앞다리로 허공을 그었다. 파공음이 울리고 하얀 바람의 칼날이 해 도인 앞에 나타나 그를 가르려했다.

    퍽!

    금빛 주먹이 날아들어 하얀 바람의 칼날을 가루로 만들었다. 한립이 변한 거원이 흐릿하게 해 도인 앞에 나타나 커다란 주먹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그걸 본 명충모의 표정이 이상했다. 바람의 칼날은 평범해 보여도 무형의 힘을 응결해 만들어 낸 것으로 최상급 비검과 비도는 물론 영보라 해도 쉽게 없앨 수 없었다.

    “내 너를 얕보았구나. 이곳에 갇히기 전에 마족 무리 중에서 너와 비슷한 모습을 한 대승기 녀석을 본 적이 있는데 같은 공법을 익힌 것인가?”

    명충모는 서늘하게 눈을 빛내고 모든 신경을 한립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열반성조를 말하는 것입니까? 제 범성진마공이 그 자가 수련한 공법과 관계가 깊기는 하지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자면, 제가 여러 보물과 신통을 지녔지만 진정한 필살기는 이 육체입니다.”

    거원은 말을 하며 여섯 개의 팔로 수결을 맺어 눈부신 빛을 방출했다. 온몸에 자금색 비늘이 자라나고 각종 문양 진법들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그 뒤로 금룡, 채봉, 뇌붕, 청란 등 거대 법상 허상들이 번득이며 나타나 거원의 육체로 흡수되었다.

    크아앙!

    거원은 괴성을 지르며 수많은 주술문자에 둘러싸여 천여 장 높이로 커져 마신(魔神)이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거원의 몸에서 비늘과 문양 진법들이 어지럽게 교차해 정교한 은색 문양이 새겨진 자금색 갑옷을 형성했다. 거원의 전신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 시각, 한립의 단전에서는 그와 똑같이 생긴 소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결을 맺었다. 한 겹의 은색 화염이 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한립의 원영은 진원의 힘을 아낌없이 사용해 근원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법력과 육체의 강도를 잠시 배 이상 상승시킬 수 있는 대신 이후 후환이 무궁무진했다.

    명충모가 드디어 같잖다는 표정을 지웠다.

    “마족의 열반성체? 그것만이 아닌 것 같은데……. 저, 저건 백맥연보결! 선계 백조산(百造山)의 비술이 아닌가! 이게 알겠구나, 넌 백조산에서 하계로 달아난 자의 공법을 수련한 것이었어. 키키킥, 그렇다 한들 백조종(百造宗) 진선의 지도 없이 제대로 비술을 익혔을 리 없지. 고작 그까짓 재주로 내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냐!”

    명충모가 조금 놀라워했지만 다시 비웃음을 띠었다. 그녀의 몸에도 금은색 주술문자가 나타나고 백옥 같은 방대한 몸이 더욱 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명충모도 거원과 비슷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두 방대한 거물들이 바다 깊은 곳에 우뚝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정말 진극체에 대항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봐야 알겠지요.”

    거원의 세 머리가 금빛으로 빛나고 금색 갑옷으로 뒤덮였다. 거원의 몸에서 각각 다른 색의 작은 산 세 개가 빠져나와 쾅! 하고 하나의 빛덩이로 합쳐졌다.

    금갑(金甲) 거원이 한 손을 빛덩이 속에 쑥 집어넣어 그 안에서 새까만 몽둥이를 꺼내들었다.

    하늘을 떠받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몽둥이는 표면에 오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거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명충모를 훑으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후우웅!

    몽둥이가 떨어지기 전 무형의 광풍과 함께 철판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허공에 하얀 자국이 생겨났다.

    열반성체의 삼열변신을 한 그는 이전에도 강력한 육체를 지녔지만 지금은 근원의 불길까지 태워 말 그대로 맨 손으로 하늘과 땅을 찢어낼 수 있는 힘을 발휘했다.

    그래서 가볍게 휘두른 몽둥이가 허공을 찢어 균열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쪽에서 명충모가 그 광경을 보고 배에 자란 새까만 두 다리를 가위처럼 교차해 그대로 몽둥이를 향해 뻗었다.

    쿠왕!

    일곱 빛깔 광채가 폭발하며 심해가 격동했다.

    숨 막히는 거대한 압력이 거대한 파랑을 만들어내 사방으로 퍼져나갔지만 거원과 명충모는 굳건히 버티고 서있었다.

    고공의 빛이 가시고 검푸른색 몽둥이와 새까만 곤충의 두 다리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이에 몽둥이는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두 다리도 상대를 튕겨내지 못했다.

    한립은 거원의 입으로 노호성을 터트리고 여섯 개의 팔을 움직였다.

    우웅!

    거대 몽둥이가 빛을 머금고 몽둥이 허상을 미친 듯이 뿌려댔다. 명충모 역시 어두운 얼굴로 앞다리를 휘저었다. 수많은 파공음과 함께 다리 허상들이 겹겹이 주변을 에워쌌다.

    한립과 명충모는 법력을 쓰지 않고 강인한 육체로 전면전을 펼치고 있었다.

    쿠콰콰쾅!

    물속에 돌풍이 일어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하얀 흔적들이 빽빽하게 나타났고 거대한 파도가 잇달아 들이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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