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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10화 (1,067/2,000)

1310화. 영역 다툼

*

한립은 해 도인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심했다.

“대단하십니다, 한 형! 조금 전 공격을 받은 게 저였다면 현천영역으로 몸을 보호하더라도 막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보물의 힘을 빌린 데다 두 분이 맹공을 펼쳐 괴충이 약해져 있었기에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보화의 부드러운 말투에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맞겠지요?”

보화는 고개를 돌려 괴충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수사께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괴충들을 진정으로 죽이지는 못한 듯합니다. 명충모 원신이라고 생각했던 두 괴충 모두 육신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라 확실히 제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맞아요. 처음 두 괴충이 나타났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는데, 그들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극단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의식이 굉장히 강하거나 육체 능력이 센 대신 다른 기능은 따라주지 못하는 듯 했어요. 교활한 명충모가 키워낸 괴충들이라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하, 그들이 따로 떨어져 있었기에 격퇴시킨 것이지 그들이 협공했거나 아니면 한 마리가 그들의 능력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네요! 정말 그런 강력한 의식과 육체 능력을 동시에 지닌 괴충이 나타난다면 큰일이겠어요.”

한립이 웃음을 흘리며 하는 말에 보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또 한 가지 보화 수사께서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처음 나타난 명충모 화신과 두 괴충이 한 패가 아닌 것 같았고, 심지어 두 괴충들끼리도 서로를 적대시 하더군요. 그렇지 않았으면 처음부터 협공을 했지 따로따로 싸우다 격파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전부 명충모가 길러낸 존재들이라면 어째서 그 원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서로 적의를 품고 있었던 걸까요?”

“저도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괴충들이 사라지던 모습으로 보아 투영(投影)의 힘이 응결한 형체들 같았습니다.”

“투영의 힘이라고요……. 한 형의 말씀은 다른 계면의 존재가 명충모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겨우 투영의 힘으로 우리와 이렇게 장시간 전투를 벌이다니 선계의 진선이라도 개입했단 말입니까!”

보화가 난색을 표했다.

“저도 그런 것은 아닐까 의심만 있을 뿐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지겠지요. 수사께서 봉인의 영과 대화를 해 실마리를 찾아 볼 수는 없겠습니까?”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턱을 쓸어내렸다.

“봉인의 힘이 유실되어 봉인의 영도 굉장히 약해졌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봉인의 영을 불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일이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본체를 찾으러간 수사들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직접 내려가 봐야겠어요.”

“보화 수사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가겠다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허나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요소가 있다면 억지로 버티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그러셔야죠.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저 역시 목숨을 대가로 지불할 생각은 없습니다. 게다가 수사께서 봉령반이 없다고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지도 않고요.”

“잘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내려가 보실까요?”

한립은 둔광을 일으켜 해 도인과 함께 먼저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보화도 사방을 살피고 그림자로 변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이 물속으로 들어가고 얼마 후, 잿빛 하늘에서 미약한 파동이 일고 오색 기운이 빠르게 뭉쳤다.

눈을 감은 거대한 오색 눈이 고공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 *

같은 시각, 심해 속.

거대 곤충 유골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지만 눈두덩이의 화염은 시간이 지날수록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 부서진 물건들이 떠있었는데 반쪽짜리 옥패와 표면이 갈라진 새까만 단창이었다.

그것은 수수한 노인과 흑포 부인이 소중히 여기던 보물들로 주인을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유골 머리 위로 두 개의 파동이 일고 하얀 빛덩이가 모호하게 나타났다. 비대한 몸을 지닌 거대 괴충과 투명한 하늘소 괴충이었다.

한립과 보화에게 격살 당하고 이전보다 훨씬 흐릿해진 괴충들은 기운이 크게 쇠해있었다.

유골의 한쪽 눈에서 화염이 커지자 은색 옷을 걸친 여인이 날아올랐다.

유골이 집어 삼킨 소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열여덟 살은 되어 보였다.

흐릿해진 괴충 두 마리가 은사 여인을 보고 엎드려 대례를 올렸다.

“쓸모없는 것들! 겨우 하계 대승기 수사들을 어쩌지 못해? 그들이 명충모 원신도 부상을 입혀서 집어삼킬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 했더냐. 이제 나도 원신의 힘을 절반 정도 회복했으니 너희의 힘을 돌려받아야겠다.”

은사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어 두 괴충을 가리켰다.

은사 여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괴충들은 서둘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여인의 손끝에서 검은 주술문자가 쏘아져 나가 불가사의한 속도로 괴충들의 몸에 파고들었다.

괴충들은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고 검은 주술문자의 힘에 저항하려 했으나 급속도로 쪼그라들어 결국 두 개의 빛구슬로 변해버렸다.

은사 여인의 손짓에 날아든 빛구슬 두 개가 데구루루 그대로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여인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자 얼굴에 광채가 흐르고 기운이 증폭되었다.

한참 후, 여인이 다시 눈을 뜨자 증폭된 기운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들어 수면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화염으로 변해 거대 괴충 유골의 눈 속으로 되돌아갔다.

크하하학!

유골이 느닷없이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자 핏빛 안개가 뿜어져 나와 뼈를 감싸고 피와 살을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새하얀 유골은 큰 머리 하나와 작은 머리 두 개가 달린 거대 괴충으로 변했다.

중간 머리는 사람의 것으로 은사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개는 크고 작은 눈알들이 가득하고 뺨이 울긋불긋한 비늘로 덮여 있었다.

또한 괴충은 얼음조각처럼 매끈했고 등 뒤의 날개에는 다채로운 빛과 오색 주술문자가 어른거렸다.

육체의 주조를 마친 거대 괴충의 중간 머리가 음산한 눈빛으로 위쪽을 주시했고, 나머지 흉측하게 생긴 두 머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줄기 둔광이 다가왔다.

바로 한립, 보화, 해 도인이었다.

멀리서 괴충의 모습을 확인한 이들은 우뚝 멈춰 섰다.

피와 살을 만들어 제 모습을 찾은 거대 괴충은 수면 위의 껍데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게 명충모의 본체인가 봅니다. 벌써 깨어 있다니 우리가 늦었네요.”

보화가 난색을 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아마 본체가 맞을 겁니다.”

한립이 괴충의 중간 머리를 보고 말했다.

“저렇게 멀쩡하다니, 먼저 내려간 수사들은 이미 죽었겠군요.”

보화가 탄식했다.

“너희 세 녀석이 내 분신을 상처 입히고 내 휴식을 방해한 것들이냐?”

아래쪽 거대 곤충의 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명충모인가요? 먼저 이곳으로 내려온 동료들은 전부 죽은 것입니까!”

보화는 머리를 굴리며 침착하게 물었다.

“키키킥! 겨우 하계 대승기 녀석들이 내게 손을 데려 해서 내 진작 피와 살로 만든 지 오래다. 너희도 동료들과 함께 하게 해주마!”

거대 곤충의 사람 머리는 아름답게 웃었지만 내뱉는 말들은 정말 냉혹했다.

말을 마친 중간 머리가 작은 입을 열어 회색 실 뭉치를 발사해 거대 그물로 만들었다. 그물에서 끔직한 냄새가 나 속을 어지럽혔다.

한립 일행은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지만 엄청나게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다.

회색 실그물이 덮친 순간, 보화는 재빨리 한 손을 뻗었다.

작은 나무 허상이 번득 스치고 출렁이는 주술문자들 속에서 분홍색 꽃나무가 나타나 무수히 많은 꽃잎으로 아래를 뒤덮었다.

동시에 해 도인도 옆으로 굴러 방대한 체구의 황금 게로 변신해 뇌전을 일으켰다. 이에 거대한 뇌전 그물이 회색 실그물을 밀어내며 날아갔다.

한립은 그저 소매를 털어 현천참령검을 움켜쥐고 몸을 부풀렸다. 등 뒤로 삼두육비의 범성법상이 나타나 그를 향해 뛰어들었고, 금빛 비늘과 은색 문양들이 전신에 나타나 문양 진법을 이루었다.

깊은 바다 속에서 오색 기운들이 몰려들어 장검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은색 문자 한 줄이 떠오른 비취색 장검에서 법칙의 힘이 일어나 열두 개의 녹색 선으로 변해 뻗어나갔다.

열두 개의 녹색 선은 하나로 연결된 것 마냥 동시에 공간을 넘어 거대 곤충의 지척에서 나타났다.

오는 동안 미리 명충모를 만나면 어떻게 협공할 것인지 상의해둔 것이 분명했다.

해 도인이 명충모의 공격을 막고, 보화가 흉충을 가둔다음 한립이 강력한 일격으로 죽이기로 한 것이다.

평범한 대승기 수사가 이런 협공을 당했다면 죽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때 명충모는 몸에서 괴이한 파동을 일으켜 주변의 수많은 꽃잎들을 전부 밀어내고 팔을 들어올렸다.

손끝에서 검은 주술문자가 튀어나가 정확히 가장 앞서 날아들던 녹색 선을 명중시켰다.

푸확!

주술문자가 빙글 돌며 폭발해 무시무시한 법칙의 힘이 발산되었다. 열두 개의 녹색 선들은 법칙의 힘에 닿자마자 굳어 부들부들 떨다가 튕겨 돌아왔다.

녹색 빛이 괴이하게 한립 일행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보화뿐만 아니라 한립의 안색도 확 달라졌다. 그는 고민할 틈 없이 장검을 번개처럼 휘둘러 또 다른 12개의 녹색 선을 방출했다.

쿠콰콰콰쾅!

24개의 녹색 선들이 충돌해 동시해 소멸되고 강력한 파동이 한립 일행을 덮쳤다.

한립은 은색 문자를 반짝이는 현천참령검을 수직으로 들여 그 여파를 흡수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반복해서 현천의 보물을 사용하느라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법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일반 대승기 수사보다 훨씬 농후한 법력을 지녔기에 다행히 현천의 보물의 반서를 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건 그냥 반탄 능력이 아니라, 시간법칙의 역반(逆反)의 힘입니다!”

보화는 깜짝 놀라 이를 악물고 수중의 꽃나무에서 굵은 가지를 부러트려 휘둘렀다. 그러나 진작 대비하고 있던 명충모는 냉소를 흘리고 몸에서 회백색 빛의 고리를 뿜어내 괴이한 힘을 퍼트렸다.

대량의 분홍 꽃잎 허상들이 빛의 고리에 밀려나 회백색 주술문자로 가득 찬 이상한 공간이 생겨났다.

쿠앙!

이때 굉음이 울리며 법칙의 힘이 호되게 회백색 빛의 고리를 들이받았으나 홀연히 터져나가고 빛의 고리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이에 보화의 얼굴이 굳어갔다.

“하하, 현천영역이라! 하계 대승기 녀석 따위가 이 정도로 익힌 것도 신통하구나. 허나 이런 위영역(僞靈域)으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가소롭지 않은가! 이렇게 하지, 네가 내게 잡아먹히기 전에 본 좌가 진정한 현천영역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

명충모가 음산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두 앞발로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방대한 육체 위에 뜬 회백색 빛의 고리가 쾌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팟!

속도를 높이던 빛의 고리가 돌연 눈앞에서 사라졌다.

쿠르릉!

바다 전체가 출렁이고 바닷물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 대신 위쪽에는 새까만 먹구름이 아래쪽에는 잿빛 기운이 나타나 별들을 박아 놓은 것처럼 하얀 빛을 깜빡거렸다.

사방에서 귀곡성이 들려오고 차가운 삭풍이 몰아쳐 한립과 보화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하얀 빛은 놀랍게도 각각이 해골 머리로 두 눈에 도깨비불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것이 또 하나의 현천영역!’

한립은 주변 공기가 무거워져 엄청난 위험이 강림했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어떤 구속도 받지 않았다.

그는 보화를 살피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두 손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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