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6화. 토황정(土皇釘)
*
한립은 새빨간 진법 원반에서 희미하게 공간 파동을 감지했다. 재빨리 원반을 뒤집자 섬세하게 깃털 문양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봉령반(鳳靈盤), 백만 리 밖으로 전송을 시켜준다는 봉령반입니다! 이걸 손에 넣으시다니 운이 대단하십니다!”
수수한 노인이 바로 진법 원반을 알아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이게 진정한 천봉 깃털이 있어야 제련 가능하다는 봉령반이라고요!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이걸 지니고 있으면 거의 목숨 줄 하나를 더 움켜쥐고 있는 격인데 어찌 아무렇게나 내놓겠습니까. 금제나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송의 힘을 발휘하는 보물인 것을요.”
흑포 부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틀림없습니다! 예전에 어느 경매회에서 이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생김새도 똑같고 천봉의 기운까지 지니고 있단 말입니다.”
노인은 주저 없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보화 수사께서 이런 귀한 보물까지 내주신다면 저도 목숨을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 봉령반을 사용하지 않고 일을 무사히 마치면 이건 돌려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원반을 들고 고민하던 붉은빛 얼굴의 거한이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정을 내렸다.
“물론입니다. 선물을 드리고 다시 돌려받는 법이 있던가요?”
“이걸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고, 보화 수사께서 곤충족과 상극인 현천의 보물까지 빌려오셨다니 명충모와 싸워 볼만은 하겠습니다. 노부도 목숨을 걸고 함께 하겠습니다.”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하자 흑포 부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형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보화는 기쁜 와중에도 가장 중요한 한립에게도 잊지 않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모두 가시겠다면 저도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한립이 봉령반을 쥐고 담담히 답했다. 그의 실력에 현천참령검까지 있으니 진선을 마주쳐도 달아날 자신은 있었다. 원기가 크게 상했다는 명충모가 크게 두렵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바로 봉인의 영에게 전송을 도와 달라 말하겠습니다. 흑야계 수사 두 분도 그곳에 있을 테니 모두 모이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지겠지요.”
보화는 뜸들이지 않고 회백색 안개 속으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안개가 꿈틀거리고 좌우로 갈라져 통로를 만들어냈다.
보화가 표표히 그 안으로 뛰어들고 다른 수사들도 그 뒤를 쫓았다.
잠시 후 통로를 빠져나온 수사들은 회백색 전송진이 설치된 텅 빈 공간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치 누군가 말을 하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다들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유일하게 보화만이 허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전송진 속으로 걸어갔다. 주저하던 수사들도 다양한 표정을 짓고 전송진에 올랐다.
파앗!
마지막으로 흑포 부인의 두 발이 전송진 안에 닿은 순간 진법이 발동되었다.
* * *
같은 시각 신비한 석림 속 핏빛 제단 위.
검은 발우가 갑작스레 바르르 떨리고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허허, 다들 주제도 모르고 명충모를 칠 생각이로구나! 허나 저 녀석은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크흠, 그걸 써야 하는 것인가.”
사내 목소리는 어떤 물건을 무척 아까워하고 있었다.
짤랑짤랑.
허공에서 금속성의 충돌음이 들리고 가느다란 은색 쇠사슬 8개가 나타났다. 한쪽 끝은 전부 발우 위에 나머지 끝은 여덟 청동기둥 위의 등잔에 연결되어 있었다.
발우 속에서 주문소리가 들려오자 유일하게 불씨가 남은 등잔에 연결된 쇠사슬이 바르르 진동했다. 등잔 위로 쌀알 크기의 금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은색 쇠사슬을 타고 제단 위 발우 속으로 흘러들었다.
새까만 발우를 감싼 검은 기운이 점점 짙어지며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
* * *
‘이곳이 바로 명충모가 숨어 있는 곳!’
한립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보화 등 다른 대승기 수사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은 망망대해 위에 떠서 습한 해풍(海風)에 너울거리는 남색 물결을 보고 있었다.
“이건 환술이 아닙니다. 지하궁전에 이런 곳이 다 있었단 말입니까?”
수수한 노인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보화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지하궁전이 아무리 거대해도 바다를 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뭔가 잘못되어 시인의 땅 밖으로 전송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붉은 얼굴 사내가 주변을 살피다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직 의식이 봉인의 제약을 받고 있습니까?”
흑포 부인이 시험 삼아 의식을 퍼트려보고는 부정했다.
“다들 위쪽을 보시지요.”
이때 한립이 차분하게 한 마디를 했다.
“위요? 노부가 전부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던데요?”
수수한 노인이 잿빛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흑포 부인과 붉은 얼굴 거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보화만이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한립이 손끝으로 고공을 가르자 거대한 푸른 검기가 날아가 하늘을 갈랐다. 잿빛 기운이 동요하고 눈부신 빛을 머금은 검기가 방대한 기운을 터트렸다.
콰릉!
푸른빛이 가시고 천둥소리와 함께 새까만 진법을 토해냈다. 검은 주술문자로 이루어진 빛의 진법 안에는 커다란 하얀 괴충이 조용히 누워있었다.
백옥처럼 하얗고 매끈한 괴충은 머리를 몸 속 깊이 묻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비대한 육체는 애벌레를 닮아 있었다.
단잠에 빠져 있는지 괴충이 고르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금빛 주술문자가 깜빡 거리며 주위를 맴돌았다.
“헉, 명충모!”
흑포 부인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붉은 얼굴 거한과 수수한 노인도 안색이 급변했고 긴장된 기색으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깨어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너무 긴장들 마세요. 경솔하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바로 깨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이곳은 명충모가 스스로 만든 공간균열 같군요. 흑야계 분들은 함께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보화가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충모의 신통이면 스스로 공간균열을 만드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지하궁전에 괴이한 바다가 생긴 것과 아직 봉인의 영향을 받는 것이 모두 설명이 되고요.”
수수한 노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흑야계 수사들이 빠지면 인원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닙니까? 출구를 찾아 그들도 공간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차피 공간 밖에서 줄곧 감시하고 있을 턴데요.”
잠시 생각하던 흑포 부인이 제안했다.
“그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곧 깨어날 명충모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흑야계 수사 분들도 억지로 공간 안으로 들어오려다 착오가 생길 것을 염려해 아직 바깥에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들과 달리 봉인의 힘을 이용해 공간 내부로 직접 전송된 것 아닙니까.”
보화는 고민 없이 그녀의 말에 반대했다. 다른 수사들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더는 흑야계 수사들을 불러들이자고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기 보다는 명충모가 깨어나기 전에 어서 손을 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일격으로 명충모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아마 어려울 겁니다.”
줄곧 빛의 진법을 살피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한 수사께서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 예기치 못한 공격을 감행하면, 진선이라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흑포 부인은 조금 불만스레 말했다.
“명충모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었으면 당초 이곳을 봉인한 두 진선들은 어째서 간신히 제압만 해놓고 물러났겠습니까. 저는 무슨 일을 하든지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실행합니다.”
한립이 냉담히 답했다. 흑포 부인이 얼굴을 굳히며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데 보화가 손을 저었다.
“두 분 다 그만 두십시오. 지금은 무조건 최선을 다해야할 때입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하늘의 뜻에 달려있고요. 이번 공격은 전부 힘을 모을 뿐 아니라 제가 준비한 현천의 보물도 사용할 것입니다. 다른 수사들도 강력한 수단이 있다면 준비해주세요. 이번에 우리가 합심해 명충모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보화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수수한 노인이 동의하고 흑포 부인과 붉은 얼굴 거한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립도 침음하다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보화가 다시 미소를 띠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등 뒤로 분홍빛 속에서 거대 꽃나무 허상이 등장했다.
그녀는 미세하게 입술을 달싹여 주문을 외웠고 한 손을 들어 올려 노란 색의 못을 불러냈다.
못은 표면이 울퉁불퉁했고 여러 가지 문양이 닳아 흐릿해져 있었다. 무척 오랜 세월동안 어딘가에 묻혀 있던 보물 같았다.
“이 토황정(土皇釘)은 일계의 건토법칙(乾土法則)을 품고 있습니다. 이걸 지니고 있으면 어떤 흙 속성 신통도 통하지 않지요. 제 기억대로라면 명충모의 본원 신통은 흙 속성입니다. 이 보물을 갖고 있으니 상대의 신통 대부분을 무력화 할 수 있겠지요. 흉충의 몸이 제아무리 단단해도 여러 수사들이 힘을 모으면 그 일격을 받아내기 어려울 겁니다.”
보화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당부를 덧붙였다.
“다만 명충모도 흙 속성 천지법칙을 장악하고 있을 테니 토황정이 얼마나 통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발동하자마자 바로 공격에 들어가야 하고요.”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들 목숨이 걸린 일인데 허투루 하겠습니까.”
수수한 노인이 신속히 답했고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만일에 대비해 봉인의 영과 연락해 봉인의 힘을 전부 이곳으로 집중해 달라 이르겠습니다. 명충모를 억누르고 우리의 움직임을 감추기 위해서요.”
보화는 손에 든 보물을 바로 발동하지 않고 신중하게 말했다. 그녀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그 앞에 흐릿한 안개 얼굴이 나타났다.
보화는 상대와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얼굴이 사라지고 수사들은 알 수 없는 압력을 느꼈다.
그들은 서둘러 자신의 몸을 점검했지만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이때 보화 주변으로 회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그녀를 감쌌다. 이상하게도 점차 그녀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분명 눈에는 보이는데 의식으로 훑으면 공기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봉인의 힘으로 제 기운을 완전히 가려두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명충모는 알아차리지 못하겠지요. 바로 공격을 시작할 것이니 다들 준비해주십시오.”
보화가 진지하게 말했다. 수수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합장해 손바닥 사이에서 하얀 옥패를 불러냈다.
옥패에는 수많은 영수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만수패(万獸牌)! 현천의 보물은 아니지만 상고시대 때 선계에서 흘러들어온 보물이라 당시 꽤 많은 대승기 수사들이 이걸 놓고 크게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선가의 보물이 수사의 수중에 있을 줄은 몰랐군요.”
흑포 부인이 옥패를 보고 놀라워했다.
“허허, 인연이 닿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수한 노인은 자랑스럽게 답했고 붉은 얼굴의 거한이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한립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옥패를 살펴보았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만수패가 있으면 성공률을 더욱 높일 수 있겠어요.”
보화가 퍽 기쁜 얼굴로 옥패를 반겼다.
흑포 부인과 거한도 각자 보물을 선보였다. 한 명은 입에서 새까만 단창(短槍)을 뿜어냈고 다른 한 명은 품에서 새빨간 문양이 각인된 백골 칼날을 꺼내들었다.
두 보물 모두 화려한 빛을 반짝이고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해 형, 전력을 다해주십시오!”
이를 지켜보던 한립이 해 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에 해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손으로 은색 구슬을 들어올렸다. 무수히 많은 뇌전들이 구슬에서 튀어나와 뇌전구슬을 형성했다.
처음에는 머리통 만하던 것이 나중에는 집채 만해 졌다.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신법상을 불러냈다. 실체화한 법상이 그의 몸으로 뛰어들어 자금색 빛속에서 융화되었다.
금색 피부에 은색 문양들이 응결해 문양진법이 만들어지자 한립은 허공으로 비취색 장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주변 천지원기가 감응해 윙윙 울어댔다.
보검은 현천참령검이었다. 그가 현천참령검을 꺼내들자 이미 알고 있던 보화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수수한 노인과 흑포 부인은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 보화가 수면 위에서 흐릿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새까만 빛의 진법 아래에 나타난 그녀는 두 손으로 거대한 못을 들고 있었다.
다른 수사들도 어쩔 수 없이 기운을 숨기고 각자 수중에 가진 보물에 미친 듯이 진원의 힘을 불어넣었다. 토황정이 발동하는 순간 다른 대승기 수사들도 동시에 공격을 가해야 했다.
그때까지 괴충은 빛의 진법 속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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