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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305화 (1,062/2,000)

1305화. 지하 석림(石林)

*

얼마 후, 전당 중심의 대청 안에서 그들은 진법 하나를 가운데 두고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대청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진법은 굉장히 복잡했고 현묘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일부는 누군가 강제로 개조하고 일부는 망가트려 놓아 원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련 수사, 이걸 복구할 수 있겠습니까?”

녹석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출발 전에 이곳의 금제 도안을 받아오긴 했는데 이렇게 많이 개조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시간만 충분하면 원래대로 고치는 것도 가능하지만 보화 수사가 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요.”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노부는 진법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아는 편이 아니라 도움이 못될 것 같습니다.”

사련의 난감한 얼굴에 녹석 노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법도가 있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보화 수사가 금제를 다시 발동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 철저히 원상복구 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요. 일단 제가 진법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형께서 진법에도 조예가 깊으신 줄을 몰랐습니다! 같이 복구를 진행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곧바로 수정 조각을 불러내 던져 주었다. 한립은 그것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었다.

정말 복잡하기 짝이 없는 진법 도인이었다. 이후에는 한립과 사련이 함께 진법을 연구해 복구 계획을 세워나갔고 녹석 노조와 해 도인은 전당을 나와 바깥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복구할 방법을 찾아냈고 사련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저물대에서 준비해온 재료를 꺼내 한립과 함께 대청 안의 거대 진법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이상한 곳을 건드려 지하궁전 금제 전체를 촉발하면 잠들어 있는 명충모를 깨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꼬박 하루를 숨 가쁘게 움직여 진법 수리를 마쳤다.

사련이 신중하게 진법에 법결을 던져 넣자 웅 하는 진동 소리와 함께 빛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진법을 중심으로 파동이 퍼져나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복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한 형의 방법이 통했네요!”

이상이 없자 사련이 길게 숨을 내쉬고 웃는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화 수사의 신호를 기다려 이곳 금제를 발동하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다른 수사들은 제때 임무를 완수했는지 모르겠군요.”

한립도 진법을 살피며 미소를 머금었다.

“계획대로면 반나절 후에 신호가 올 거예요. 그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죠. 곧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될 테니까요.”

사련은 바깥으로도 신호를 보내 해 도인과 녹석 노조에게도 진법 수리가 끝났음을 알리고 대청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한립도 제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자 푸른빛과 은빛이 날아들어 대청의 각기 다른 곳에 주저앉았다. 네 사람은 목석처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 * *

네다섯 시진이 지났을 때 한립이 눈을 번쩍 떴다. 뿐만 아니라 사련, 녹석 노조, 해 도인도 마찬가지였다.

쿠쿵!

느닷없이 대청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진법에서 하얀 빛기둥이 튀어나와 지붕 너머로 종적을 감추었다.

잠시 후에는 지하궁전 전체가 요동쳤고 동시에 지하궁전 심처 어딘가에서 고풍스런 양식의 돌기둥들이 솟아올라 괴이한 석림(石林)을 형성했다.

석림의 돌기둥들은 사각형의 진형의 이루고 그 중간에 다른 기둥들과 청동 기둥들이 보였다. 얼룩덜룩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진 여덟 개의 기둥 끝에서 각각 구슬 형태의 빛의 장막이 반짝였다.

빛의 장막 안에는 핏빛 등잔이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의 등잔에만 미약하게나마 노란 불씨가 타고 있었고, 나머지 일곱 개는 아주 오래 전에 꺼진 듯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 괴이한 일은 8개의 청동기둥 가운데 높다란 핏빛 제단이 솟아 있고 그 위에 새까만 발우가 모셔져 있다는 것이었다. 음산한 검은 기운이 감도는 발우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아직 진법을 발동시키지 않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금제가 스스로 발동하기라도 한 것입니까?”

안색이 창백해진 사련이 놀라 소리를 높였고 녹석 노조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한립도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보화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은 분명했다.

“갑시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이곳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어서 다른 수사들과 모여야 합니다.”

한립은 과감히 결단을 내리고 해 도인에게 손짓해 푸른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한립 뒤를 바짝 쫓아가는 해 도인을 보고 사련과 녹석 노조가 시선을 마주쳤다.

“사련 수사,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따라 가야할까요?”

“한 형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이곳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일단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파악은 해야 할 듯싶습니다.”

불안한 녹석 노조의 질문에 사련이 이를 악물고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등 뒤로 푸른 꽃 허상을 불러내 튀어나가고 녹석 노조도 녹색 기운을 일으켜 날아갔다.

이때 한립은 해 도인을 데리고 협소한 통로를 따라 진동이 가장 격렬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중이었다.

상고봉인의 영향을 받아 금공 금제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과 같은 대승기 수사가 법력을 아낌없이 써서 둔술을 쓰면 상당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통로 좌우를 살피고는 미간을 좁혔다. 통로에는 벌써 금이 가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틈이 넓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한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전방의 진동은 더욱 거세져 당장이라도 지하궁전 전체가 내려앉을 것 같았다.

한립은 쾌속으로 날아가다 눈앞에 갈림길이 나타나자 고민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새로운 통로로 몸을 던졌는데 바람과 함께 새까만 인면충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눈빛이 서늘해진 한립의 팔뚝에서 비취색 검이 번득이고 암녹색 장검이 나타나 두 괴충을 베었다.

콰쾅!

천지원기가 들끓고 방대한 법칙의 힘이 임시 통로 안에 강림했다.

두 인면충들은 괴이한 파동을 느꼈으나 마비가 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눈앞에서 녹색 빛이 번쩍인 다음에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립의 신영이 흐릿하게 변해 두 인면충 뒤에서 나타나 손을 털었다. 암녹색 장검이 소실되고 허리가 잘린 인면충들은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지금은 시간을 끌 때가 아니기에 그는 현천참령검을 사용해 인면충들을 참살했다.

지금의 수행으로는 열반성체로 변신하지 않아도 현천의 보물이 가진 일부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인면충 두 마리를 처치하기에는 충분했다.

해 도인이 그걸 보고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지만 별 다른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이제 통로에는 다른 흉충은 없었다.

한참을 날아간 그들은 통로를 빠져나가 거대한 지하 동굴 속에 도착했다.

은색의 고운 모래가 깔린 바닥에 석순(石筍)들이 솟아 있었고 통로와 머지않은 곳부터 회백색 안개가 가득 들어차 은은하게 단향목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안개 앞쪽 저공에 떠있는 인물들 중 하나가 거대한 분홍꽃 허상을 서서히 회전시키는 중이었다. 보화는 냉랭하게 회백색 안개를 주시했지만 흔들리는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안개 속에 모호하게 회백색 얼굴이 보였는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여 그녀와 전음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흑악 뒤로는 경계심 가득한 이계 대승기 수사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한립과 해 도인을 알아보고 적잖이 안심한 눈치였다.

“다른 수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한립이 회백색 안개를 의식으로 훑으며 둔광을 거두었다.

“우리도 모르겠습니다. 보화 수사가 상고봉인의 영(靈)과 소통해 어찌된 일인지 알아내는 중입니다. 그러나 다른 수사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두 분이 가장 먼저 이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머리에 금으로 만든 고리를 얹은 수수한 용모의 노인이 대답했다.

“상고봉인의 영이 바로 저것입니까?”

한립이 눈을 빛내며 거대 안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보화와 안개 얼굴의 대화가 끝났는지 안개 속으로 모호한 얼굴이 사라졌다.

“한 수사, 해 수사 마침 잘 오셨습니다!”

보화가 몸을 돌려 한립과 해 도인을 반겼다.

“보화 수사, 일단 무슨 상황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 극심한 진동은 어찌된 일입니까?”

“상고봉인의 힘이 통제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명충모를 제압해 둔 봉인은 물론 원염 수사 등을 가둔 곳의 힘도 거의 절반이 유실되었습니다. 명충모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갇힌 수사들을 제거할 테니 그들이 위험합니다. 조금 전 진동은 상고봉인이 붕괴되는 조짐으로 지하궁전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봉인이 통제를 잃었다고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금제를 복구하러 간 수사들 중 누군가 큰 실수를 한 것 아닙니까!”

붉은 얼굴을 지닌 거한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보화 수사께서 상고봉인의 영과 소통하셨으니 뭔가 들으신 것이 없으십니까? 영성을 지녔으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텐데요.”

수수한 노인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물었다.

“당연히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봉인의 영도 영문을 모르더군요! 그저 체내의 힘을 모종의 물건에 의해 빼앗겼다고만 했습니다. 봉인의 영이 우리를 명충모가 잠들어 있는 장소로 직접 이동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흉충이 깨어나기 전에 우리가 치명상을 입힐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단 명충모를 붙들어 둘 수 있고 수사들을 구출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원래 계획은 포기해야겠습니다.”

보화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 뭐라고요? 그럼 우리들끼리 명충모를 상대하러 가자는 겁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보화 수사.”

검은 장포를 걸친 부인이 실소했다. 노인과 붉은 얼굴 거한도 난색을 표했다.

“제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봉인의 영에게 들으니 명충모는 봉인의 힘 일부를 빌려 원염 수사를 비롯한 백여 명의 대승기 수사들을 가두느라 본인도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충분히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급하게 깨어나 전성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고요.

봉인의 영이 지하궁전의 다른 곳을 포기하고 남은 힘을 모아 저희를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이번 일을 위해 저도 곤충 종족과 상극인 현천의 보물을 빌려왔습니다. 그러니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화가 빠른 속도로 해명했다. 그녀의 말에 이족 대승기 수사 세 명은 한결 마음이 놓였지만 목숨이 달린 문제라 쉽게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 챈 보화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금제 속에 갇혀 있는 동족 수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동아 수사 일행이 그들이 갇혀 있는 곳 인근에 있으니 우리가 명충모를 죽이지 못해도 시간만 벌어주면 구출에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여러분에게 나눠드릴 이 물건만 있으면 위기에 처해도 달아날 수 있을 겁니다.”

보화가 말을 마치고 소매 속에서 붉은 빛들을 불러내 수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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