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1화.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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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는 어느 모래 언덕 위에 도착하자 손끝에서 분홍색 실들을 발사해 허공에 스며들게 했다.
우웅!
언덕 위로 무형의 금제가 형성되었다.
“이제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조급하게 생각지 마시고 자리에 앉아 제가 일전에 구한 단향과(檀香果)나 함께 맛보시지요.”
보화가 미소를 머금고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언덕 위 모래들이 뭉쳐져 황토색 탁자와 의자 두 개를 만들어냈다.
그 위로 분홍 기운이 흩날리더니 연보라빛 과실과 술이 담긴 술잔 두 개가 나타났다. 한립은 의식으로 연보라색 과실을 훑고 의자에 앉았다.
보화도 사뿐사뿐 걸어와 그와 마주 앉았다.
술은 맑은 물처럼 시원했고 과실은 무척 달콤했다.
그가 잔을 내려놓는 순간 보화가 정색을 하고 본론을 꺼냈다.
“실은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얼마 후에 수사가 나서서 한 명을 붙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오랜 시간 계획한 일을 수행할 수 있게요.”
“한 명을 붙들고 있으라고요. 너무 추상적인 요청입니다. 보화 수사가 신경 쓸 만한 인물이면 평범한 수사는 아닐 거라 여겨집니다만.”
한립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확실히 제가 직접 맞붙고 싶은 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생사를 걸고 싸워달라는 것도 아니고 붙들고 시간만 끌어주면 되는 일입니다. 수사의 실력에 어려운 일도 아닐 거예요. 이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제가 신세를 졌다 여기고 이후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절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보화 수사에게 신세를 지울 수 있다면 낮은 대가는 아니군요. 그래도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이름이라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수사도 아는 자입니다. 그는…….”
보화가 입술을 달싹여 뒷말은 전음으로 전했다.
“지금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막 대승기에 이른 제가 어찌 그런 자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보다 더 적당한 수사가 있을 테니 다른 분을 찾아가 보세요.”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거래를 거절하려 했다.
“일단 이걸 보시고 결정을 내려주시지요.”
보화가 미소를 짓더니 하얀빛을 쏘아 보냈다. 빛 속 물체는 손바닥 크기의 옥병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이후 수사의 부탁을 한 가지 들어드리는 것과 그 단약을 대가로 한 수사께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화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단약이라는 말에 한립은 별 기대 없이 약병을 열어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신효단(神膠丹)!”
“이렇게 박학다식하실 줄은 몰랐는걸요? 한 번에 신효단을 알아보시고 말입니다.”
놀란 한립을 보고 보화도 이채를 띠었다.
“대승기 정혼의 힘을 보충해 막 대승기에 이른 수사에게 큰 도움이 되는 단약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제련법이 실전된 지 오래라고 들었는데 어찌 구하신 것입니까?”
“아주 오래 전 상고수사의 동부에서 우연히 찾아낸 겁니다. 총 7알을 구했지만 지금은 딱 한 알밖에 남지 않았네요. 제 성의인데 마음에 드십니까?”
“보화 수사가 꼭 제가 나서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실패할까 걱정도 되지 않으십니까? 제 능력이 부족해서 수사의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한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임 전에는 다른 수사에게 부탁하려 했습니다. 쓸 만한 실력을 지녔지만 그자를 제대로 붙들고 있어줄 지는 5할밖에 확신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한 수사는 다릅니다. 전에도 실력이 대단했는데 이제 대승기 수사가 되었으니 이전보다 몇 배는 강해졌을 것 아닙니까.
수사가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면 저도 적수가 안 될지 모르지요. 이번 일은 제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분의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요.”
싱긋 웃음 짓는 보화의 얼굴은 꽃이 만발한 듯 화사했다.
“저를 그렇게 대단하게 여겨주신다니 더 이상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단약과 한 가지 약조 외에 다른 조건 하나를 더 수락해 주시면요. 수사가 거래에 응하신다면 그자를 하루 동안은 확실히 붙들어 둔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돌연 미소를 지었다.
“어떤 조건인지 들어보겠습니다.”
“보화 수사께서 다시 마계를 장악하게 된다면, 수사가 살아있는 동안은 양 계면이 접하는 틈을 타 마족들이 영계를 침입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너무 과한 조건이 아닙니까.”
한립을 향해 보화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보화 수사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나 제가 그자를 붙들어 두어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이제라도 동아 노인을 찾아가 보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 나서게 만들려면 이것보다 몇 배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자신에게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막강한 적을 만드는 셈이니까요.”
한립은 태연하게 답했다.
“수사는 그자와 척을 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알면서 뭘 그러십니까. 저야 어차피 이미 틀어진 사이이니 한 번 더 그자에게 밉보인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일 리가 있는 말씀이긴 합니다. 하지만 성제를 취소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다만 제가 성계를 다시 관리하게 되면 이번 생에는 인족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요.”
안색이 수시로 바뀌던 보화가 조건을 조정했다.
“인족만으로는 안 됩니다. 요족 영역도 포함해주시면 거래하겠습니다. 영계에서 양족은 공진공퇴(共進公退)하는 하나의 일족과 다름없으니까요. 요족이 공격을 받는데 인족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알겠어요. 인족과 요족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단약도 받았고 서로 심마를 걸고 맹세한 다음 자세한 사항을 이야기 합시다.”
한립이 과감히 상황을 정리하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한 시진 후, 한립은 해 도인과 은월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사막 외곽의 언덕을 찾아 내려갔다.
* * *
십여 일 후, 토성 위로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전부 연허기 이상의 수만 마족 정예병들이었다.
백여 개의 초대형 선박 위에 한립 등 수십 명의 대승기 수사들이 타고 있었다.
* * *
세 달 후, 마계의 황폐한 골짜기 상공.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마족 병사들이 빼곡하게 하늘을 채웠다. 대규모 마족 병사들이 보물을 타거나 둔술을 이용해 하늘위에 떠있었다.
마족 대군 중심의 작은 섬만 한 초대형 선박 안에 대승기 수사들이 모여 보화의 말을 듣고 있었다.
“병사 일부를 먼저 시인의 땅 주변으로 날아가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충해(蟲海)와 고계 명충들의 주의를 돌린 다음 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병사 수만 명의 비호를 받으며 시인의 땅으로 진입하면 됩니다. 시인의 땅으로만 들어가면 아직 남아 있는 금제를 발동해 명충들을 차단할 수 있을 테니 미리 논의한 대로 각자 행동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족대군이 몇 개의 무리로 갈라져 어딘가로 날아가고 골짜기 위에는 수만 명의 정예 병사들과 대승기 수사들만 남게 되었다.
몇 시진 후에는 정예병들과 대승기 수사들이 탄 거대 선박들도 골짜기를 떠났다.
* * *
이레 후, 황량한 고원 위에 십여 만 명의 마족 병사들이 충해를 향해 공격을 쏟아 붓고 있었다.
마족대군은 진군과 퇴각이 일사불란했고, 수백 척의 전함이 고공에서 둥그렇게 진형을 이루어 여덟 겹이나 되는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굵은 빛기둥과 검은 기운이 보호막 속에서 날아올라 충해를 덮칠 때마다 괴충들의 시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충해를 이룬 명충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새로운 괴충들이 떼로 달려들어 진법을 공격했다. 이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마족 병사들은 제자리에 멈춰 섰고 강력한 반격을 쏟아내 겨우 보호막이 받는 압력을 줄이곤 했다.
이때 거대 선박에 탄 합체기 마족 수사들은 신중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지금 모든 힘을 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앞으로 한참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요.”
새빨간 갑옷을 걸친 마족 거한이 씩씩거렸다.
“당장 진법이 붕괴되게 생겼는데 그렇게 안하면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는 마른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성조 대인들께서 내린 명령은 명확합니다. 반드시 충해 속에서 반나절 이상 버텨야 한다고 하셨지요. 이제 겨우 몇 시진이 지났을 뿐인데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면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합니다. 초반에 모든 힘을 소진하면 지친 상태로 어떻게 충해를 뚫고 나간단 말입니까.”
적갑(赤甲) 거한은 여전히 반대했다.
“아니, 이미 한계라고요! 충해를 탈출할 때는 비술로 우리의 잠재력을 증폭하면 될 일이에요.”
마른 노인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말이 쉽지, 약간의 착오라도 생기면 명충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힐지도 모릅니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서 적시를 노리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적갑 거한의 말에 마른 노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때 그들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년 부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두 분은 다투기만 하십니까.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간 후에 싸워도 늦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무리해서 잠재력을 증폭해 달아나기보다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천묘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무턱대고 악수를 두기 보다는 찬찬히 머리를 맞대고 다른 방법을 고려해 보는 게 나을 겁니다.”
적갑 거한이 겨우 불만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큼, 명충들이 예상 외로 흉악하니 모두 합심해서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감합니다.”
그제야 마른 노인도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풀었다. 이렇게 세 마존은 충해에서 무사히 퇴각할 다른 방법을 논의했다.
같은 시각, 다른 대군 무리들도 충해에 휩싸였고 명충들의 공격을 어렵사리 막아내고 있었다.
명충들이 마족대군에게 몰려든 동안, 대승기 수사들은 정예 마족 수만 명을 데리고 시인의 땅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이동해 있었다.
그러나 명충 떼들도 눈치를 챘는지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어 그들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마족대군과 달리 대승기 수사들은 손을 쓰지 않아도 정예병들과 노조들 문하의 제자들이 명충들을 잘 물리쳤다.
무수히 많은 검기와 공격들이 난무하고 앞길을 막는 명충들은 핏물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마기로 둘러싸인 정예병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반각 후, 충해 속에서 쉭쉭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놀랍게도 명충들이 양쪽으로 물러나 청록색 거대 괴충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앞다리가 게의 집게발처럼 유난이 크고 송곳니가 튀어나온 거대 괴충들이었다.
“고계 명충들입니다! 저것들은 합체기 마존의 일격에 상당하는 공격을 가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고계 마족 중 한 명이 거대 괴충을 알아보고 경고했다. 그러나 전방의 거대 괴충들은 이미 비취색 빛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이에 앞쪽에 있던 수천 명의 연허급 정예 마족들이 방어막이 뚫려 참혹한 비명을 지르며 녹아버렸다. 빛기둥의 위력이 병사들의 보호막과 갑옷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하하, 고계 명충들이 떼로 몰려오다니 저들도 우리가 주력 부대라는 것을 눈치 챘나 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뭘 더 기다리겠습니까.”
거대 선박 뱃머리에 선 검은 갑옷을 입은 마족 성조가 손을 뻗어 검은 실 뭉치를 날려 보냈다. 실 뭉치는 하늘을 뒤덮고 커다란 그물이 되어 거대 괴충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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