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300화 (1,057/2,000)
  • 1300화. 상고봉인

    *

    한립도 신중하게 내용을 살폈는데 과연 사련이 말해준 것과 똑같았다.

    원염은 시인의 땅에서 곤경에 처했으니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을 남겼고 마지막에 제대로 끝맺지 못한 문장은 뜻이 애매했지만 어떤 경고를 담고 있는 듯했다.

    “보아하니 보화 수사의 말에 거짓이 없었습니다. 이제 각자 대책을 생각해 봐야겠네요.”

    대승기 수사들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각각 생각에 빠져 들었는데 점잖게 차려입은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자고요? 이곳에 백여 명의 수사가 모여 있는데 다들 한 마디씩 하는 것을 언제 다 듣고 있겠습니까. 이 모임은 보화 수사가 제안했고 내로라하는 신통을 지녔으니 일단 보화 수사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보화 수사의 실력이 이곳에서 가장 뛰어나다 이 말입니까? 우리 천아계를 뭘로 보는 것입니까.”

    천아계 중년 대승기 수사가 입을 비죽였다. 동시에 눈을 감고 있던 새를 닮은 노인도 두 눈을 번쩍 떴다. 뜻밖에도 눈동자 깊은 곳에서 뇌전이 번득인 것 같았다.

    대승기 수사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지자 보화가 새를 닮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아 수사의 명성이야 저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이번 행보에 고견이 있으신지요?”

    “노부는 오직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지 자폭 명충이건 명충모건 내 앞길을 막지 않는다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 말에 대청 안이 소란스러워졌고 많은 대승기 노조들이 천아계 9명 수사들을 의아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동아 형, 적절치 않은 언사 같습니다.”

    보화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크게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흥, 뭐가 적절치 않단 말입니까? 노부는 유일한 직계 후인을 대승기 수사로 키우기 위해 오랜 세월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런 아이가 당신네 마계를 도우러 왔다가 갇혀 있고요. 명충모가 세상천지를 갉아먹고 전 종족을 멸하는 무서운 힘을 지녔다고 해도 당장 천아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먼저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내 후인을 구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동아 노인이 코웃음을 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닙니까!”

    녹석이라 불린 이계 대승기 수사가 얼굴을 찌푸리고 따졌다.

    “노부는 평생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수사가 내게 지금 훈계라도 해 보겠단 말입니까?”

    동아 노인은 표정을 굳히고 음산하게 녹석을 노려보았다.

    녹석은 화가 났지만 동아와 눈을 마주치자 심장이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다른 노조들도 끼어들지 않고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일부 수사들은 마계에 온 목적이 동아 노인과 같아 좋아하기도 했다.

    다른 계면까지 명성이 자자한 그가 나서주면 동족 수사들를 구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테니 말이다.

    한립은 이 틈을 타 흥미롭게 동아 노인을 감상했다.

    상대는 다른 신통은 몰라도 의식에서만큼은 일반 대승기 수사를 초월했다. 심지어 마족 시조인 보화 이상이었다.

    ‘4대 조류 중 하나라더니 명불허전이기는 하구나.’

    물론 여러 가지 기이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의식 비술을 수련해 일반 대승기 수사보다 몇 배는 의식의 힘이 강한 그만은 못했지만!

    “동아 수사, 혈육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명충모는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은 아닙니다. 특히 명충모도 제압하고 그곳에 갇힌 수사들을 구출할 수 있다면요.”

    보화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동아 노인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었다.

    “보화 수사, 괜한 말로 노부를 속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동아 노인은 어두운 얼굴로 보화를 응시했다.

    “감히 동아 수사를 속이다니 제가 그렇게 담이 커 보이십니까?”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마계 3대 시조 중 수사가 가장 지략이 뛰어났었다는 것을 누가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서 지마(智魔)라 불린 적도 있었고요.”

    동아 노인은 냉소했다.

    그 말에 보화가 미간을 좁혔다가 돌연 빙긋 웃고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직접 전음으로 말하는 듯했다.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던 동아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지금 한 말이 거짓이면 내 가만있지…….”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걸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보화가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노인의 손으로 쏘아 보냈다.

    동아 노인이 신중하게 손을 펴자 적홍색 깃털이 보였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것이 얼음으로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

    “보화 수사가 그 분을 만나는 기연을 얻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분의 체면을 보아 이번만은 수사의 말을 믿어보도록 하지요.”

    노인은 손을 털어 깃털을 다시 날려 보내고 보화를 바라보았다.

    “양해 감사드립니다. 이제 제가 자세히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보화가 미소를 띠고 주변 수사들을 향해 물었다.

    “저도 수사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보화 수사가 생각해낸 방법이라면 노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아 노인이 물러나자 몇몇 대승기 수사들이 보화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실은 반년 전 또 한 번 시인의 땅에 잠입했었습니다.”

    “뭐라고요? 보화 수사께서 시인의 땅에 또 다녀오셨단 말입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거라 들었습니다.”

    이계 대승기 수사는 물론 마계 성조들도 놀란 얼굴로 의견이 분분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또 한 번 홀로 정탐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몇 가지 현묘한 은신술을 익혀서 이기도 하지만 새로 제련한 소환천경 덕분이니까요. 이 보물로 몸을 숨겼기에 명충들에게 들키지 않고 시인의 땅에 숨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변화를 발견했기 때문에 동아 수사께 명충모도 제압하고 수사들을 구출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고요.”

    “시인의 땅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말씀이십니까?”

    “시인의 땅은 봉인의 힘이 작용하고 있어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에서 조사를 해야 했습니다. 조사 결과 상고봉인이 이전과 달라졌더군요.”

    “어떻게 달라졌던가요?”

    제왕 복장의 노조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좋은 쪽으로 변화했으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옥검 수사. 대부분 흩어졌다고 생각한 상고봉인이 아무래도 스스로 복구 중인 듯했습니다. 아주 느리지만 상고봉인이 이전보다 강화되어 있었거든요. 마치 영성을 지닌 것처럼 말입니다.”

    “봉인이 영성을 지녀 스스로 복구를 한다고요!”

    대청 안 노조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보화 수사께서 직접 확인하셨다면 사실일 겁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상고봉인의 힘을 명충모가 통제하고 있다던데 봉인이 강화되면 흉충을 상대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백광계 금차가 의문점을 지적했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강화된 봉인은 명충모가 장악한 부분이 아닙니다. 비록 증가폭이 작다고 해도 아직까지 상고봉인이 작동하고 있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란 증거죠.”

    “그래서 어떻게 수사들도 구하고 명충모도 제압하겠다는 겁니까? 뜸들이지 말고 무슨 생각인지 말해 보세요.”

    보화의 말에 동아 노인이 약간 짜증스레 물었다.

    “뜸 들이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사실을 확실히 전달해야 계획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디 노부도 귀 기울여 들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명충모가 머무는 곳과 수사들이 갇혀 있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둘 중 어느 곳의 금제를 건드리든 명충모가 알아챌 테니 먼저 전력을 다해 명충모를 제압하고 수사들을 구하는 방향으로 가려 했던 것이고요.

    물론 그렇게 하면 분노한 흉충이 봉인의 힘을 이용해 수사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원염 등 수사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기겠죠. 하지만 이번에 상고봉인이 약간의 영성을 지닌 것을 알고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일단 상고봉인이 잃어버린 통제권을 되찾게 하면 수사들도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후 명충모를 제압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보화가 단숨에 계획을 들려주었다.

    그 말에 대청 안 수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기뻐하는 이들, 생각에 잠긴 이들 그리고 망설이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한립도 턱을 괴고 곰곰이 궁리 중이었다.

    “보화 수사의 계획이 그럴싸합니다만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침음하던 동아 노인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상고봉인이 영성이 있다한들 우리에게 협조할 거라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상고봉인의 보조가 없다면 명충모가 통제하는 봉인의 힘을 빼앗아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상고시대 때 상계 진선도 죽이지 못한 공포스런 존재니까요. 까딱 잘못하면 우리도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각 계면도 더 이상 수사를 파견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이런 계획을 세웠을 때는 당연히 상고봉인과 소통할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상고봉인에 대해서는 원염과 열반 보다 제가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믿을 수밖에 없군요! 게다가 먼저 수사들을 구할 수 있다면 노부의 목적과도 상충되지 않으니 동의하겠습니다.”

    동아 노인이 얼굴을 펴고 미소 지었다. 이에 보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수사들을 향해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십니까? 괜찮으시다면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실까요. 제가 대략적인 계획을 세웠다지만 상세한 내용은 모두의 의견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후 수사들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보화는 그들에게 일일이 답변을 해주었다. 그 후로는 아무도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고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기 시작 했다.

    * * *

    꼬박 하루가 지나고, 대승기 수사들은 논의를 끝내고 십여 일 후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모임이 끝나자 황금 궁전에서 둔광들이 날아올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한립과 해 도인 그리고 은월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사막 주변에서 산봉우리 하나를 찾아 임시로 머물 예정이었다.

    세 개의 둔광이 한참을 가던 중 한립이 갑자기 멈춰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보화 수사, 기왕 따라 오셨으면 숨어 계시지 말고 나서시지요.”

    은월이 놀라 그 옆에 멈춰섰고, 해 도인도 무표정하게 그들 뒤에서 나타났다.

    “이렇게 빨리 한 수사께서 대승기 수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신통도 여전히 대단하고요. 원염이 경계하던 이유가 있었군요.”

    허공에 파동이 일고 분홍색 거대 꽃 허상이 스쳤다. 그 안에는 보화와 흑악이 서있었다.

    “당시 저를 그냥 보내 준 것을 후회하십니까?”

    “후회요, 그럴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저 역시 이렇게 빨리 이전 수행을 되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번 작전에 한 형이 함께해 주셔서 꽤 안심이 되기도 하고요.”

    “농도 잘하십니다. 이제 막 대승기에 이른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저를 따로 찾아오신 이유가 이런 한담이나 나누기 위해서는 아니시겠지요?”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리 냉담하게 구실 것 없잖아요? 그래도 수차례 인연이 닿아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데요. 이번에 수사의 앞길을 막은 것은 확실히 용건이 있어서기는 합니다. 제가 한 가지 거래를 제안하고 싶은데 흥미가 있으십니까?”

    “하하, 거래라…….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수사와 단독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보화가 주변을 둘러보며 해 도인과 은월에게 눈길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며 해 도인과 은월에게 몇 마디 남기고 그녀를 따라 멀리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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