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99화 (1,056/2,000)

1299화. 동아 노인

*

얼마나 지났을까.

토성 양쪽 하늘에서도 영기의 빛이 반짝였다. 검은 빛줄기와 은색 빛줄기가 공간을 넘어 등장해 역시 궁전으로 향했다.

다시 반 시진 후, 또 다른 방향에서 불경 소리와 함께 일곱 빛깔 기운이 반짝이더니 천 명이 넘는 무리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리의 절반은 사내였고 절반은 여인들로 금색 갑옷을 입고 도, 검, 창, 도끼와 같은 병장기를 들고 있거나 피리를 불고 금을 타서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병사와 선녀들 같아 보였다.

그 가운데에는 일곱 빛깔 광채가 뭉쳐 있었는데 희미하게 의자에 앉은 거대한 인영이 보였다.

느긋하게 토성 위로 날아든 무리 속에서 일곱 빛깔 광채만이 궁전으로 하강했다. 빛이 가시자 왕관을 쓰고 칠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서있었다.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궁전 앞에 내려서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시에 토성 위 병사들과 선자들은 빛 알갱이로 변해 거품처럼 사라졌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환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몇 시진 동안 사막 밖에서는 검은 기운, 극렬한 화염 등이 속속들이 모여들어 말없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 * *

얼마 후 암녹색 연꽃이 하늘 끝에서 나타났다. 한립과 사련 및 금차 등이 그 위에 서있었다.

“이곳이 모임 장소로군요. 황사 노괴가 썩 좋은 곳을 찾아냈습니다.”

드넓은 모래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토성을 보고 한립이 한마디 했다. 찬사인지 조롱인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이에 사련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황 수사는 토건마공(土乾魔功)으로 성계에서도 흙 속성 마공의 일인자로 꼽히지요. 사막에서라면 보화와 같은 시조에게도 필적할 정도로요. 게다가 원체 무리를 이루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데다 남들과 쉽게 교류하지 않아 그의 거처가 여러 수사들이 모이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었군요. 토성은 평범한 영보(靈寶)라 치고, 성곽 위의 연허기 위력을 지닌 만여 마리 꼭두각시들이 볼만합니다.”

대머리 거한은 괴뢰 병사들을 신중하게 훑었다.

“토건신위(土乾神衛)들은 황 수사가 직접 연구해낸 독특한 꼭두각시들이라 조종을 하려면 반드시 토건마공을 익혀야 합니다. 다만 토건신위들이 제 위력을 내는 곳은 사막뿐이고 이곳을 떠나면 위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흙 속성이 충만한 곳에서는 부수기가 어렵기 때문에 토성을 지키는 병사로는 제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대승기 수사들도 사막에서 저렇게 많은 괴뢰 병사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정말 골치가 아플 테니까요.”

사련이 웃음을 머금고 설명해 주었다.

“아, 불멸체를 지닌 녀석들은 상대하기 짜증나기는 합니다.”

금차가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모두를 태운 거대 연꽃이 서서히 토성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한립이 연꽃에서 내려서서 금빛 찬란한 궁전을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궁전 벽 너머를 살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전 전체가 거처이자 황사 노괴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사련이 마치 이곳의 주인처럼 두 제자를 데리고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도 형, 들어가시죠.”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해 도인과 은월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전까지는 거리낌 없이 행동하던 금차가 궁전을 살피며 머뭇거렸다.

옆에 있던 산발 장한이 무표정하게 걸음을 떼자 금차가 움찔하다 그제야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파앗!

한립은 궁전 정문을 지나는 순간 발밑에서 금제의 파동을 느꼈다. 푸른빛이 바닥에서 올라와 그와 해 도인 그리고 은월을 비추었다.

은월이 놀라 모종의 신통을 발휘해 벗어나려는데 귓가에 한립의 온화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서워할 것 없다. 악의를 품고 설치해 둔 금제가 아니다.”

그 말에 은월이 안심하며 영기의 빛을 흩어버리고 세 사람은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휘황찬란하고 격조 높은 비밀 대청 안.

푸른빛이 반짝이고 한립 일행이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나자 수십 개의 칼날 같은 시선들이 그들을 훑었고 몇몇은 놀라 웅성거렸다.

“흠? 인족 수사?”

“저 자는 마원해의 황금 게가 아닙니까?”

한립은 그들의 수군거림에도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대청 중심에 서있었고 도처에 백여 명의 인영이 보였다.

일부는 여러 탁자에 나뉘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고, 절반 이상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공손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사련은 이미 대청 한쪽에 자리를 잡아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여 제자들이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한 수사, 해 형, 편한 곳에 앉으세요.”

사련이 그들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리는 곳을 눈여겨보다 해 도인과 은월을 데리고 다른 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고여덟 개의 의식들이 대놓고 그를 훑어댔다.

‘이것들 봐라.’

이에 한립은 얼굴을 굳히며 냉랭히 코웃음을 쳤고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의식의 주인들은 혼백이 진동하는 것 같은 느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제야 수사들은 가슴이 철렁해 의식을 거두고 더는 그를 향해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때 대청 안에 번득 나타난 금차와 산발 장한도 똑같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차의 시선이 잠시 한립에게 닿았으나 하하 웃으며 지나쳐 또 다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로도 시간 간격을 두고 대승기 수사들이 전송되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혼자 오는 자들도 있었고 여럿이 오거나 아니면 제자들을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다.

몇 시진이 지나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대청에 앉은 노괴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다른 수사들을 살폈다.

한립도 예의 차리지 않고 다른 대승기 수사들을 관찰했다.

백광계 수사인 금차와 석정처럼 다른 계면에서 온 강자들은 모습이 특이하거나 색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이런 노조들은 대승기 수사들 중에서도 비교적 강력한 존재일 것이다.

사련을 제외하고 여섯 명이 마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성계 성조들의 수는 이계 강자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고 보화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마계의 ‘전’ 시조였던 여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립은 눈을 감고 있는 황발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평범한 얼굴에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노인은 회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주위로 황토색 안개 고리가 맴돌았다.

그것은 흙 속성 천지원기를 마음가는대로 조종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이곳의 주인인 황사 노괴인 게 확실했다.

그때 대청 중앙에 빛이 반짝이고 아홉 명의 사람이 새롭게 나타났다. 전부 엄청난 기운을 지닌 대승기 수사들이었다.

대승기 수사들이 한 번에 대청으로 들어오자 노조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무리는 남녀노소가 섞여 있었고, 비슷한 종류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깃털을 연결해 만든 것 같은 특이한 갑옷이었다.

여덟 명의 대승기 수사들은 진법 쪽에 둘러서 있었고 그 가운데에 눈이 작고 코가 튀어나와 새를 닮은 노인이 음울한 얼굴로 서있었다.

노인의 기운은 다른 수사들과 비슷했는데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이들은 대부분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고 순간적으로 의식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대승기 수사들은 안색이 변했고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동아 노인’이라고 말했다.

노인이 여덟 명의 대승기 수사들을 데리고 대청 구석에 자리를 잡자 주변 수사들도 함부로 그쪽을 곁눈질하지 못했다.

그 뒤로 몇 명이 더 도착했고 오기로 약속한 수사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유독 보화만 보이지 않았다.

이에 오랜 세월을 수련해온 노괴들도 이쯤 되자 하나둘 씩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다시 한참이 지나서야 대청 중간이 밝아지고 우아한 모습의 여인이 나타났다.

바로 모두가 기다리던 보화였다.

그녀 뒤로 검은 갑옷을 입은 흑악도 보였다.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이 이전보다 훨씬 수행이 늘어난 것 같았다.

보화의 매끈한 피부에는 광채가 흘렀고 아름다운 두 눈에는 생기가 가득해 부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화 수사, 드디어 도착하셨습니다.”

줄곧 눈을 감고 있던 황사 노괴가 눈을 뜨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 이곳에서 모임을 주최하느라 황 수사가 고생하셨습니다.”

평온하게 답하고 대청 안을 둘러보던 보화가 한립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마계 시조였던 그녀도 이렇게 빨리 그가 대승기 수사가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고생은요! 제 거처에 이렇게 많은 동급 수사들이 모이다니 기분 좋은 일이지요. 이제 보화 수사께서 오셨으니 직접 주관을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모두 약속을 지켜 이곳에 모인 것을 보니 이번 일에 꽤 자신감이 생기는군요.”

황사 노인의 말에 보화가 미소를 머금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보화 수사, 인사치레는 됐고 자폭 명충을 막을 보물들이 완성 되었는가 부터 말씀해 주세요. 그걸 위해 몇몇 수사들이 진귀한 재료들을 모아주지 않았습니까.”

금색 광채로 둘러싸인 사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투로 보아 보화와 잘 아는 사이 같았다.

“한월계(寒月界) 이묘 수사시군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감히 다른 수사들께 귀한 재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보물 제련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직접 확인해 보시죠.”

보화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검은색과 하얀색 빛구슬을 불러냈다.

빛구슬 중심에 각각 은색 별들이 수놓아진 깃발과 날개 달린 백호가 그려진 하얀 거울이 들어있었다.

“이게 자폭 명충들을 해결해 줄 보물이라고요? 겉보기에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요?”

녹색 기운 속 이계 강자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허, 녹석 수사 눈이 삔 것 아니십니까? 저것들은 현천의 보물인 성월기(星月旗)와 환천경(幻天鏡)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현천 보물의 모조품이 아닙니까?”

제왕처럼 차려 입은 중년인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성월기, 환천경!”

다른 대승기 수사들도 그 소리에 다시 눈을 빛내며 보물들을 쳐다보았다.

“옥검 형의 말씀대로 이것들은 성월기와 환천경을 모방해 만든 보물이 맞습니다. 제가 임의로 낙성번(落星幡)과 소환천경(小幻天鏡)이라 부르기로 결정했고요.”

보화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천의 보물 중 성월기는 별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고 환천경은 하늘과 태양을 가릴 만큼 무상의 신통을 지녔다고 들었습니다. 보화 수사의 낙성번과 소환천경은 본래 현천보물의 몇 할이나 신통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렸다. 그러나 누가 한 말인지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이 질문은 흑야계(黑夜界) 수사께서 하신 거겠죠?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조심하시다니 흑암(黑暗) 계통의 신통을 수련한 분답습니다. 두 보물이 본래 위력의 얼마나 낼 수 있냐는 질문은……. 현천의 보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월기와 환천경의 역천의 위력을 100분의 5정도만 따라 해도 대단한 거라 생각하는데요. 제 판단으로는 자폭 명충들을 상대할 정도는 됩니다.”

“보화 수사께서 두 보물의 위력을 장담하신다면 자폭 명충은 해결되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인의 땅에 들어가 명충모를 어떻게 제압할 건지 이야기를 해봐야 할 텐데요?”

다시 흑야계 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두 보물이 문제없다고 여기시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인원이 많아도 따로따로 행동한다면 거꾸로 명충모에게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보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명충모란 흉충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입니까? 지난번에 시인에 땅에 들어간 수사들은 우리보다 많고 귀 족 시조들도 있었는데 갇히지 않았습니까. 보화 수사께서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었다고 하시던데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지요.”

한월계 대승기 수사인 이묘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많은 분들이 직접 그 소식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공개해 모두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보화는 예상했다는 듯 소매 속에서 새까만 수정 구슬을 띄웠다.

파앗!

빙글빙글 돌던 수정 구슬에서 오색 빛이 새어나와 불완전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모인 수사들은 전부 긴장한 얼굴로 그것을 읽어나갔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