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8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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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사께서는 시인의 땅에서 전해진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사련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가라앉은 얼굴로 반문했다.
“누구냐고요? 바깥에 남은 성조들 중 한 명이겠지요.”
“바로 수사가 저로 착각했던 인물입니다.”
“정말 보화 수사였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한립도 정말 놀랐다.
“그렇습니다. 제 친언니인 그녀가 처음으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염이 판단하건데 바깥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원래 시조였던 보화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명충모와 동족 수사들을 구하는 일을 동시에 진행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도 보화 수사겠군요.”
“제 언니에 대해 꽤 잘 파악하고 계십니다. 맞습니다, 당시 그녀는 다른 성조들을 모두 모이게 해 원염 수사가 전한 소식을 공개하고 진짜라는 것을 확인 시켜 주었습니다. 안 그랬으면 이미 성계 시조가 아닌 그녀의 명에 따르고 있지는 않았겠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원염이 전한 소식 중 마지막 문장에 명충모가 그들을 가두는데 이용한 봉인의 힘이 불안정하다는 것과 윤회기를 지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수십 년 후의 오늘, 상고봉인의 힘이 가장 약해지고 시인의 땅의 금제는 가장 강화된다고 하더군요. 그때가 명충모를 제압하거나 수사들을 구출할 수 있는 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보화입니다. 원염의 소식을 전해들은 후 그녀가 몰래 충해를 지나 시인의 땅을 정찰하고 내린 결론이니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각자 판단을 내리시면 됩니다. 적어도 성조들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다들 시인의 땅을 돌아가며 지켰기에 상고봉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아무리 보화라 해도 우리를 속이기 어렵고, 또 성계의 일원인 그녀가 성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련은 드디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금차와 석정은 놀란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사련이 말한 내용이 그들의 예상과 달라 논의가 필요할 듯싶었다.
“보화 수사가 그리 말했다면 거짓은 아닐 겁니다. 헌데 보화 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시인의 땅을 다녀왔는데 사련 수사 등 다른 성조들이 그곳에 가보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한립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직접 시인의 땅을 조사할 수 있었으면 우리 성조들도 무슨 수를 써서든 다녀왔을 겁니다. 문제는 보화가 정탐한 후에 명충모의 경계심이 높아졌다는 것이예요. 흉충은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도 시인의 땅을 둘러싼 충해를 처음보다 열 배로 늘렸고 심지어 성조들도 꺼려질만한 무서운 명충들을 불러냈습니다. 시인의 땅에 가보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다 이 말입니다.”
사련의 말에서 새로운 명충들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대승기 수사가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면 합체기 고계 명충이라도 나타난 것입니까?”
갑자기 금차가 끼어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팔뚝 크기의 혈홍색 명충들이 있는데 성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된 적이 없고 오직 시인의 땅 주변 충해 속에만 섞여 있습니다. 수량이 아주 적어 천여 마리라더군요.”
“그러니까 그 명충들이 대승기 수행을 지녔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면 겨우 천여 마리 괴충들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텐데요.”
“기운으로만 보면 연허급에 불과합니다. 신통도 딱 두 가지 밖에 쓰지 못하고요. 그런데 충해를 지나보려던 수사 두 명이 그 이상한 명충들 때문에 중상을 입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사련이 입 꼬리를 씰룩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가지 신통으로 성조 두 명을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다니 놀랍습니다. 어떤 신통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한립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간단합니다. 순간이동과 자폭 신통입니다.”
“순간이동, 자폭!”
사련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대머리 거한이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모두 평범한 신통은 아니군요.”
“예, 핏빛 명충의 순간이동은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발각이 되면 온갖 보물과 방어막을 무시하고 지척으로 이동해 버리니까요. 거기다 자폭 신통 역시 어떤 공법과 보물로도 막을 수 없고 오직 맨몸으로 버텨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일단 핏빛 명충의 자폭에 휘말리면 부지불식간에 혼백이 영향을 받아 오염되고 다른 곳에 위치한 모든 분신들이 동일한 중상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힘이 강하지 않은 화신들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기도 한답니다.”
“분신과 정혼(精魂)이 오염된다고요?”
대머리 거한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높였다. 한립도 이 말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 다들 핏빛 명충의 무서움을 아셨으니 보화가 시인의 땅을 탐색한 후 아무도 충해를 건너지 못한 것을 이해하셨겠지요.”
사련은 보화의 이름을 말하며 냉소했다.
“신종 명충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우리가 이번에 모이는 것도 의미가 없을 텐데요. 대적할 방법을 찾으신 것입니까?”
“하! 정말 머리가 비상하십니다, 한 형. 저희가 지금까지 기다렸다 모이기로 한 것은 첫째로 여기 모이신 분들처럼 다른 계면의 강자들이 지원을 나와 주기로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보화가 자폭 명충들을 억제할 특수 보물 두 개를 제련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말로는 보물들이 신종 명충에게 통할 거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보화 수사에게 대책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시인의 땅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모임에 백광계 외에 또 어떤 수사들이 모입니까?”
대머리 거한이 눈을 굴렸다.
“흑염계를 제외하고 성계와 인접한 모든 계면에서 수사를 파견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첫 번째로 넘어온 수에 비할 수는 없지만 40명은 넘죠. 그중 가장 강대하다는 천아계(天鴉界)에서는 9명의 대승기 수사를 보냈고 동아 노인이 친히 본계에 강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련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아 노인은 4대 조류 중 하나인 구리 갈까마귀, ‘동아(銅鴉)’가 아닙니까!”
“금 형도 그 이름을 들어보셨나 보네요. 하긴 동아 수사의 명성은 각 계면에서 성계의 3대 시조 이상이니까요. 이번에 시인의 땅에서 실종된 강자 중에 그가 중시하는 직계 후인이 있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대머리 거한의 모습에 사련이 어렴풋이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자가 겨우 후인 한 명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동아 노인에게는 직계 후인이 한 명 뿐이라더군요. 심혈을 기울여 대승기 수사로 키워놓았는데 위험에 처한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겠죠.”
“하하, 그건 또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라도 대승기에 이른 자손이 있으면 더없이 소중하게 여길 테니까요.”
금차가 반들거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련 수사께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셨으니 얼마 뒤에 있을 모임에는 저와 해 수사도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때가 되면 일러주십시오.”
한립이 잠시 고민하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야지요. 출발 당일 직접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저희는 더 이상 수사의 귀한 시간을 뺐지 않고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사련의 대답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에 해 도인과 은월도 같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 급하게 가실 것 있나요? 조천봉 특산의 과일 좀 맛보시고 천천히 일어나시지요.”
궁장 여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음번에도 기회가 있겠지요.”
한립이 포권을 하고 금빛으로 일행을 휘감았다. 그러자 금색 빛줄기가 번득하고 대청 밖으로 사라졌다.
사련이 그것을 보고 더는 만류하지 않았지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으하하, 한 수사는 마계의 성조인 수사와 그다지 깊이 교류할 마음이 없나 봅니다. 하긴 이제 막 마계와 영계의 전쟁이 끝났는데 그 깊은 감정의 골이 금방 메워지겠습니까?”
대머리 거한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성계와 영계의 관계는 금 수사께서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한 수사께서는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을 내리셨는데 금 형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사련이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하하, 물어 무엇 합니까. 반드시 참석해야지요. 그나저나 바깥에서 이슬을 맞으며 노숙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때까지는 수사의 거처에서 좀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두 분이 같이 가주시겠다면 환영해 마지않을 일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고요. 소박하지만 두 분께서 잠시 묵어가시겠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대거리 거한의 대답에 사련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대청 밖에서 궁장 시녀들이 향기로운 과일과 차를 들여오고 있었다.
조천봉을 벗어난 한립 일행은 만화산맥의 한적한 골짜기에 내려섰다.
한립은 원숭이 꼭두각시 몇 마리를 시켜 골짜기 한쪽 절벽에 임시로 동부를 만들었고 세 사람은 각자 밀실로 들어가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성조와 이계 강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따로 상의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소 노조의 일로 근심이 가득하던 은월도 그들이 시인의 땅에 갇혀 있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 * *
한 달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휙!
어느 날 밀실에서 눈을 감고 있던 한립이 번뜩 눈을 뜨고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아챘다.
그는 하얀 옥 조각을 잡아 양손을 비벼 그것을 잘게 부수었다. 그러자 옥가루 속에서 녹색 화염 덩이가 나타나 사련의 목소리가 방출됐다.
“한 형,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천봉으로 와 저희와 함께 오늘 출발하시지요.”
한립은 기다리던 소식에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녹색 화염을 두 손으로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반나절 뒤, 한립은 해 도인과 은월을 데리고 비취색 궁전 안 비밀 전각 속에 서있었다. 사련과 그의 제자로 보이는 여인 두 명, 그리고 금차와 석정도 함께였다.
전각 중심에는 은빛 진법이 미약하게 영기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모임 장소와 가장 가까운 성으로 이어진 전송진입니다. 그곳에 도착해 보름만 가면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금 형, 한 수사, 가시죠.”
사련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좋습니다. 우리가 먼저 가겠습니다.”
금차가 웃음을 흘리고 망설임 없이 산발 장한과 전송진에 올랐다. 영기의 빛이 반짝인 후 백광계 대승기 수사 두 명이 사라졌다.
한립도 해 도인과 은월을 불러 은색 진법 위에 올라 전송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련도 냉소하고 두 명의 여 제자들과 은색 진법에 올라섰다.
* * *
쿠쿠쿵!
보름 후, 아득히 넓은 누런 사막이 마구 흔들리고 흩날리는 모래 더미 속에서 황토색 고성(古城)이 솟아올랐다.
규모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벽은 매우 높았고 둥둥! 북소리가 울리자 병사들이 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섰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각종 병기를 들고 있었는데 특수 제작된 꼭두각시들이었다. 그 수가 만 마리가 넘는 듯 했다.
그리고 토성(土城) 중심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궁전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정교하고 화려한 궁전은 황금으로 주조되었고 오묘한 마족의 문양과 아름다운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돌연 하늘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백옥 요수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는 네 마리의 하얀 교룡이 끌고 있었다.
요수 마차 위에는 남녀가 나란히 서있었다. 하얀 장포를 입고 담청색(淡靑色) 얼굴을 지닌 사내는 은은하게 빛을 발산했고 머리를 묶고 남색 가죽 갑옷을 입은 젊은 여인은 해사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마차는 금방 토성 위에 도착했고 남자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마차와 하얀 교룡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남녀 수사는 하얀 기운으로 변해 금색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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