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7화. 백광계(白光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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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진 후, 그들은 구름 속에서 우뚝 솟은 거대한 산봉우리를 발견했다.
산허리부터 위쪽으로는 하얀 얼음과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검은 안개가 드리운 아래쪽에서는 귀곡성과 거센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조천봉이라고요? 어쩐지 섬뜩한데요.”
은월이 산봉우리의 모습에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이런 눈속임으로 나와 해 형을 속일 수는 없지.”
한립은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일렁이고는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눈속임이요?”
은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세히 산봉우리를 살폈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한립은 수결을 맺고 미간에서 제3요목을 불러냈다.
그의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요목에서 빛기둥이 뻗어나가 허공에 스며들었다.
쿠쿵!
강렬한 파동이 퍼지고 음산한 풍경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거대한 산봉우리 대신 넓은 분지와 수려한 산이 나타났다.
크기는 이전보다 작았지만 각종 신비한 꽃과 나무가 가득하고 오색 보호막이 펼쳐져 있어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한립은 산꼭대기의 궁전에 먼저 눈길을 보냈다. 정교해 보이는 궁전은 비취색 목재를 이용해 지은 듯했다.
“이게 진정한 조천봉이었네요!”
은월이 멍하니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입을 떼려는데 산 속에서 냉랭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수사 분께서 조천봉까지 찾아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실 것을 미리 알지 못해 마중을 나가지 못했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취색 궁전에서 동일한 빛깔의 둔광이 솟아올라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몇 번 번득이다 멈춰선 둔광 속에는 냉랭한 표정의 녹색 궁장 차림 여인이 서있었다.
“보화? 아니, 당신은 보화 수사가 아니군.”
녹색 궁장 여인은 보화와 아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훨씬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저와 ‘보화’를 헷갈리시다니 확실히 성계 분들은 아니십니다.”
차가운 눈빛의 여인은 한립과 해 도인을 찬찬히 살피고는 안색을 풀었다. 이에 은월의 표정은 미미하게 달라졌지만 한립은 재빨리 놀란 기색을 감추었다.
“수사를 직접 찾아왔을 때부터 우리의 신분을 감출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련 수사를 보고 꽤나 놀랐습니다. 보화 수사와는 어떤 사이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보화는 제 친언니입니다. 이 일을 모르는 대승기 수사는 이계의 강자들뿐일 테고요.”
“그랬군요. 어쩐지 외모가 비슷하다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찾아온 연유는 사련 수사도 알고 계시겠지요?”
“시인의 땅 때문에 오셨겠죠.”
녹색 궁장 여인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사련수사께서는 저희가 찾아온 것이 놀랍지 않은가 봅니다.”
“세 분은 영계에서 오셨나요, 아니면 흑염계(黑炎界)에서 오셨나요?”
한립의 질문에 사련성조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떻게 영계 아니면 흑염계에서 왔을 거라 확신하신 겁니까?”
“도움을 주러 강자들을 보내온 계면들 중 흑염계와 영계에서만 아직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라면…….”
“시인의 땅에 진입하지 않은 성조들 말입니다. 비록 만화산에서 은거중이지만 다른 수사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다른 계면의 강자들이 시인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아보려면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수사의 말씀대로 영계에서 왔습니다. 시인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련수사께서는 알고 계신 것입니까?”
“수사의 얼굴이 낯익다 했는데 혹시 이전에 성계에 오신 일이 있으신지요?”
궁장 여인은 바로 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그 말에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한번 다녀간 일이 있습니다. 저를 알아보신 것 같은데 굳이 묻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정말 원염과 육극이 멸선령을 내렸던 한 씨 성의 수사였습니다. 당시 합체기 수사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승기 수사가 되어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들이 당시 수사를 눈여겨보았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쪽 분은 마원해의 해 수사시겠습니다. 마계에서 몇 안 되는 마원해에 가보지 못한 성조라 몰라 뵈었네요.”
사련이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돌려 해 도인을 보았다. 그러나 합체 초기인 은월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한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해 형을 알아보셨다니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시인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듣고 싶은데요.”
“아는 바가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나눌 말은 아닙니다. 저를 따라 아래쪽으로 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궁장 여인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얼음장 같던 표정을 풀었다.
“저희를 수사의 거처로 초대하는 것입니까?”
한립이 오색 기운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해라도 끼칠까 걱정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인이 싱긋 웃자 서늘하던 인상이 확 달라졌다.
“그럴 리가요! 사련수사의 신분에 그런 치졸한 짓을 벌일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두 명의 대승기 수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 한요.”
“그럼 되었네요. 가시죠!”
여인이 웃으며 몸을 틀어 길을 내주었고 한립도 거절하지 않고 금빛 기운으로 해 도인과 은월을 데리고 산봉우리로 내려갔다.
녹색 둔광을 일으켜 따라온 사련성조가 그들과 함께 오색 기운 틈으로 들어갔다.
이때 궁전 안에서 괴이한 복색을 한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나왔다. 은색 눈동자와 새까만 피부를 지닌 그들은 은회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에 적홍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대머리로 인상이 험악했고 나머지는 머리를 산발하고 양 팔뚝에 두꺼운 금색 고리를 끼고 있었다. 그들의 칼날 같은 시선을 받고 한립은 움찔했다.
“대승기!”
한립이 낮게 중얼거렸고 그 말에 은월도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까만 피부의 장한들은 그와 같은 대승기 수사로 마족과는 다른 낯선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련 수사, 이분들도 다른 계면에서 지원을 나오신 것입니까? 그런데 어째서 한 명은 겨우 합체기 수사란 말입니까.”
대머리 장한이 한립 일행을 보고 그리 좋지 못한 어투로 물었다.
“한 수사, 제가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백광계(白光界)에서 오신 금차 형과 석정 형입니다. 보름 전에 먼저 도착하셨고요.”
“금 형, 이쪽은 영계의 한 수사와 해 수사십니다.”
궁장 여인이 앞으로 나서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영계라면 얼마 전에 마계와 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쪽에서는 수사들을 보내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대머리 거한이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약간 멸시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명충모가 봉인을 뚫고나온다면 인근 계면들이 전부 위험에 처할 텐데 저희 영계라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백광계란 곳은 처음 들어봅니다.”
“우리 백광계를 들어보지 못했다니 견문이 너무 좁은 것 아닙니까? 아주 운 좋게 막 대승기에 이르렀나 봅니다.”
대승기 거한이 얼굴을 굳히고 서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산발 장한은 해 도인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립이 차분히 무어라 답하려는데 궁장 여인이 먼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 거처에 말다툼을 하러 모이신 것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다들 명충모 때문에 오셨는데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나누시죠. 금 형, 줄곧 시인의 땅의 소식을 듣게 되기를 고대하지 않으셨나요? 영계 수사 분들도 오셨으니 오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금차가 안색이 달라져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석 형은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말을 마친 금차는 동료를 불러 대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사 분들도 이쪽으로 가시지요.”
궁장 여인이 서둘러 한립 일행을 안내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에 한립은 은월과 해 도인을 데리고 사련성조를 따라 들어갔다.
“사련 대인을 뵙습니다.”
비취색 궁전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격식을 차려입은 시녀들이 3, 40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은 다른 귀빈들도 오셨으니 과일과 차를 준비하거라!”
사련이 온화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잠시 후 한립 일행이 사련을 따라 대청에 도착했을 때 백광계 대승기 수사들은 의자에 앉아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해 도인과 은월을 데리고 그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사련은 사뿐사뿐 걸어가 중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사련 수사, 모두 모였으니 이제 이야기를 해주실 차례입니다.”
대머리 장한이 직설적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말씀 드릴 생각입니다. 다만 그 전에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수사 분들은 성계를 도와 명충모를 제압할 생각으로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동족 수사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사련이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명충모를 제압하는 것과 동족 수사들을 구하는 것은 결국 같은 소리라고 여겨지는데요?”
대머리 거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립도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미간을 좁혔다.
“여러분을 실망시켜드려야겠군요. 시간이 촉박해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원하시든 반드시 모두의 힘을 모아야 성공할 가능성이 있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시인의 땅 소식을 금 형과 석 형께 무턱대고 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련이 처음으로 씁쓸한 얼굴을 했다.
“겨우 두 사람이 더 늘어났을 뿐인데 안심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금차가 불만스럽게 코웃음을 쳤다.
“사실 한 수사와 해 수사께서 와주시지 않았더라도 한 달 정도 더 기다려보고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한 달 후에 성조들과 다른 계면의 수사들이 모여 성계 대겁을 어찌할지 상의하기로 했으니까요.”
“사련 수사, 우리가 성계로 온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시인의 땅 상황을 명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 후에야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한립이 사련의 말을 들고 의견을 밝혔다.
“하하, 한 수사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금차가 웃음을 흘리며 동조했다.
“알겠습니다. 먼저 시인의 땅의 상황을 알고 싶으시다니 알려드리지요. 그저 성계의 성조들도 대략적인 것만 파악하고 있어 구체적인 상황은 모른다는 것을 참고해 주세요.”
침음하던 궁장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적인 것밖에 모른다고요? 설마 들리는 소문처럼 시인의 땅에 무슨 일이 생긴 걸 알면서도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대머리 거한이 어두운 얼굴로 불퉁거렸다.
“하아, 오해를 하셨네요. 시인의 땅에 관해 바깥에 머무는 성계 성조들이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기 전에 시인의 땅에서 소식이 왔었습니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안 그래도 대단한 실력자들이 몰려갔는데 어떻게 소식하나 전하지 못했나 싶었습니다.”
“기뻐하시기는 이릅니다, 금 형. 원염 수사가 희귀한 비술을 사용해 급히 전한 모호한 정보였으니까요. 그 내용은 시인의 땅에 변고가 생겨 명충모가 예정보다 일찍 상고금제 대부분을 뚫었고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봉인의 힘 일부를 조종해 거꾸로 그들을 시인의 땅에 가두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명충모도 완전히 봉인의 구속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시인의 땅을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 흉악한 곤충이 힘을 크게 소모해 깊이 잠들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고요. 성계에 출몰한 명충들은 명충모가 잠결에 발산한 기운이 퍼져 감염된 마충들입니다.”
궁장 여인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다른 계면의 수사들과 귀 계의 성조들이 전부 상고선인의 봉인 속에 갇혀있다는 말입니까! 상고봉인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약간의 힘만으로 그 많은 동급 수사들을 가두다니요.”
금차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게 시인의 땅에서 전해온 유일한 소식이자 마지막 소식이었습니다. 명충모가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도 모종의 수단으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한 것일 테죠.”
“사련 수사, 아직 해주실 말씀이 남아 있을 텐데요? 그것뿐이라면 다른 성조들이 진작 무언가 행동에 들어갔을 테고 이렇게 뒤늦게 모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또한 동족 수사들을 구하는 일과 명충모를 제압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고 하신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턱을 괴고 있던 한립이 차분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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