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6화. 위세를 떨치다
*
거탑의 뇌전 공격 없이는 명충들에 대한 살상력이 크게 떨어져 집중적으로 공격받으면 검은 보호막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성을 지켜야겠습니다!”
한립이 돌연 이렇게 선언했다. 은월도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 형, 서둘러 해결해야 하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해 도인의 평온한 대답에 한립은 미소를 짓고는 소매 속에서 작은 산봉우리 세 개를 불러냈다. 그가 수결을 맺자 등 뒤로 삼두육비 범성법상이 나타났다. 여섯 개의 눈을 번쩍 뜬 법상은 길게 포효했다.
크아아앙!
포효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린 순간 투명한 음파가 형성되어 멀리 충해로 날아갔다.
범성법상의 포효는 괴이한 신통을 품고 있는지 미친 듯이 보호막으로 달려들던 명충들의 몸이 터져 추락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명충 떼의 양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남은 명충 떼가 윙! 하고 한 덩어리로 뭉쳐지자 고공에서 거대한 산봉우리 세 개가 나타났다.
쿠쿠쿵!
산봉우리들이 동시에 명충 떼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연이어 회색 기운, 날카로운 검기 그리고 화려한 광채가 괴충들을 휩쓸었다.
명충 대부분이 세 극산의 위력에 힘을 잃었고 큰 거대 괴충들 일부만 다급히 달아났다.
콰르릉 콰쾅!
고공에서 은색 뇌전이 떨어져 잇달아 십여 마리의 거대 명충을 스쳤다.
처절한 비명을 지른 거대 괴충들이 가까이 있던 천여 마리의 일반 명충들과 함께 재가 되어 흩날렸다.
은색 뇌전이 흩어지고 허공에 도포를 입은 해 도인이 나타났다. 그는 달아난 거대 괴충을 훑고 굵직한 뇌전으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괴충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쿠쿵!
충해 한쪽에서 산만한 거인 허상이 불쑥 나타났다. 삼두육비의 범성법상이었다.
한립은 뒷짐을 쥐고 무표정하게 괴충들을 응시했다.
거인 법상은 보라색 주술문자가 떠오른 여섯 개의 팔을 마구 휘둘러 은색 불구슬을 도처로 날려 보냈다.
은색 불구슬이 터진 곳마다 대량의 불바다가 펼쳐져 명충들을 태워 죽였다.
일반 명충이든 거대 괴충이든 은색 화염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사라졌다.
한립과 해 도인이 나서자 무궁무진해 보이던 명충들이 놀라운 속도로 제거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반 명충들은 두려움을 모르는지 보호막을 버려두고 한립과 해 도인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에 한립과 해 도인은 연달아 강력한 신통을 발휘해 한식경 만에 주변을 정리했다.
몇몇 거대 괴충들이 달아나기는 했지만 그들을 뒤쫓을 생각이 없었기에 한립은 해 도인을 불러들여 흑호성으로 서서히 하강했다.
은월도 멀리서 날아와 그의 옆에 서있었다.
흑호성의 수많은 마족들은 한립과 해 도인이 엄청난 신통으로 명충들을 물리치는 것을 보았기에 열광하며 환호했다.
세 사람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고계 마족들이 급히 분부를 내려 보호막을 열고 그들을 맞이했다.
“성조 대인을 뵙습니다. 선배님들 덕에 성 안의 수천만 수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감히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될 지요? 모두 가슴이 깊이 간직하고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합체 초기 흑포 중년인이 한립과 해 도인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고 감격스럽게 말했다.
일반 마족 수사들도 한립 일행이 성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전부 지면으로 내려가 그들을 둘러싸고 우러러 보았다.
평범한 마인들에게 성조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갑자기 성조가 두 명이나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놀라울 만도 했다.
“내 이름은 알 것 없고, 이곳의 성조는 어디 있느냐? 만나야겠으니 불러오도록 하게.”
“그것이……. 성주 대인께서는 충해에 대항하느라 원기를 크게 상하시고 성주부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바로 사람을 보내 알리겠습니다.”
한립의 분부에 마족 중년인이 눈치를 보며 답했다.
“그렇다면 기다리지. 다른 이들은 각자 할 일을 하라 이르게.”
“예! 저희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마족 중년인의 명이 떨어지자 인근의 마족들은 그들을 향해 예를 올리고 황급히 물러났다.
이제 마족 사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한산해졌다.
* * *
일다경 후, 새까만 둔광이 성 안 거탑에서 날아올라 한립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흑포를 입은 마른 노인이었다. 노인은 의식으로 그들을 훑어보고는 황송하다는 듯 대례를 올렸다.
“호암이 두 분 성조 대인을 뵙습니다. 두 분이 흑호성을 찾아주시고 큰 은혜까지 베풀어 주셔서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자네가 흑호성 성주인가?”
“예, 제가 흑호성 성주 직을 맡은 지 천 년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분부하실 일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자네들은 자리를 비켜주게. 내 호 수사와 단독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네.”
상대의 눈치 있는 대답에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마족들을 물렸다. 마족 중년인과 사내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신속하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노인은 홀로 대승기 수사 두 명과 마주하고 있자니 마음이 불안했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명충들이 이 정도 규모를 이루려면 꽤 시일이 걸렸을 텐데, 그것들이 어째서 흑호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겐가?”
“선배님께 아룁니다. 몇 해 전부터 명충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수차례 소탕하려 나섰으나 전부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들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충해를 이뤄 이틀 전에 본 성을 공격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이틀 전부터 공격을 했다. 명충들이 지능은 높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은 아닌 것 같구나.”
노인의 설명에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씀입니다. 명충들은 계속 죽여도 끝이 없었고 서로 뭉쳐 규모를 불리고 있습니다. 이에 성계 전역에서 빈번하게 충해가 일어나 성 전체를 도륙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 일은 되었고, 따로 물을 것이 있네.”
“무엇이든 아는 대로 답하겠습니다.”
“나와 곁의 수사는 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성계가 명충으로 인해 아주 혼잡해졌더군. 원염과 육극 등 다른 성조들은 지금 어디에 있기에 명충들을 토벌하지 않는 것인가? 듣기론 명충들이 나타났을 때 실종되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지 아는 대로 말해 보게.”
“아아, 두 분 대인께서는 오랜 세월 은거를 하시고 계셨군요! 어쩐지 처음 뵙는 분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조 대인과 다른 성조 선배님들의 행방은 제가 말씀드리기가…….”
마른 노인이 깜짝 놀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혹시 그들은 사실 명충모를 상대하고 있으니 절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 네게 일러두지 않았더냐?”
한립이 빙긋 미소를 짓고는 느긋하게 노인을 쳐다보았다.
“선배님께서도 명충모에 대해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제가 숨길 이유가 없겠습니다.”
마른 노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듯 보였다.
“명충모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가 있다. 이번에 출관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 현재 성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찾아왔으니 아는 것이 있다면 전부 말해보게.”
“예, 선배님! 저도 십 년 전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로 성계에 출현한 명충들은 평범한 마충이 명충모 봉인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감염되어 변이한 것입니다. 이런 명충들은 성정이 난폭해지고 수행이 대폭 증가하는데다 번식력이 수십 배로 강해졌지요. 성계의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인이 잠깐 기억을 더듬다 한립과 눈을 마주치고 급히 말을 이었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시조 대인 세 분과 다른 성조 선배님들께서는 시인(始印)의 땅에서 명충모를 상대하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계의 강자들과 함께 봉인을 점차 강화해 나가셨죠. 그런데 스무 해 전부터 시인의 땅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곳이 어떤 상황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지요.”
“여러 시조들과 조력자까지 있는데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말인가? 아무도 어찌된 일인지 파악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시인의 땅과 연락이 끊긴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시인의 땅을 중심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충 떼들이 나타나 주변의 성들을 장악했고 무척 강한 고계 명충들도 나타났으니까요. 듣기로는 합체기 수사와 맞먹는 실력을 지녀서 아무도 명충의 바다를 지나 시인의 땅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합체급의 명충! 명충모의 무서움을 생각하면 그런 고계 명충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겠지. 그런데 시인의 땅으로 가지 않고 남아 있는 성조들도 있을 것인데 그들은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한립이 잠시 침음하다 또 물었다.
“다른 성조 선배님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아직 시인의 땅으로 갔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모르고요. 작은 성의 성주인 제가 알 수 없는 정보이지 않습니까.”
마른 노인이 울상을 하고 답했다.
“보아하니 그들은 뭔가를 알고 있어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 같군. 흑호성에서 가장 가까이 머물고 있는 성조가 누구인지 알려주게.”
“본 성에서 가장 가까이 머물고 계시는 성조 대인이라면 만화산맥(万花山脈)의 사련성조님이실 겁니다. 3년 전에 산맥 주위의 명충 떼를 전부다 없애주셨지요.”
“사련성조. 만화산맥은 어디쯤이지? 지도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예전에 만화산으로 가서 직접 사련선배님을 만나 뵌 일이 있기에 주변 지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인은 돌조각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한립은 그것을 끌어와 의식으로 훑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충분히 잘 대답해 주었네. 더는 물을 것이 없으니 물러나도 좋네.”
“예, 저는 물러가 있겠습니다.”
노인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고계 마족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맞이했다.
“우리는 만화산맥으로 그 사련성조라는 자를 만나러 가시죠!”
한립이 호연성을 둘러보고 말했다. 은월과 해 도인도 반대하지 않았고 그들은 서둘러 새까만 마족 비차를 타고 하늘을 갈랐다.
* * *
한 달 후, 한립 일행은 녹음이 푸른 인계의 산맥과 비슷한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풍경이 수려하고 좋네요. 사련성조라는 자는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살고 있나 봐요. 그런데 성조의 거처는 어디에 있을까요?”
은월이 산맥을 둘러보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지도상에는 사련성조의 거처가 산맥 중간 조천봉(朝天峰)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그럼 찾기 어렵지 않겠는데요? 급히 오느라 사련성조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지 않았는데 성격이 이상하지는 않겠죠?”
“하하, 아무리 괴팍한 자여도 반드시 시인의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할게다. 그래야 다음 행보를 정할 수 있을 테니까. 막간리와 오소 선배님의 행방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고.”
은월은 조부의 이름을 듣고 걱정스러운 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한립이 푸른 빛줄기로 날아가고 은월과 해 도인이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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