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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95화 (1,052/2,000)

1295화. 흑호성(黑葫城)

*

마계의 어느 늪지 위에서 새까만 구멍이 나타나 금빛을 토해냈다. 금빛 안의 인영들은 방금 마계로 진입한 한립 일행이었다.

한립은 주위를 훑어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도처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의식을 방출해 늪지대 바깥에 석재 건물들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크기가 제각각인 수백 개의 건물들은 몇 개의 방어용 진법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진법에서는 금제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엉망이 된 건물에서도 마족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마족 성으로 가서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한립은 조금 당황했지만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전과 달리 그는 대승기 수사였고 해 도인까지 있으니 마계 3대 시조와 마주친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세 개의 둔광이 습지 바깥으로 향했다. 그들은 서쪽으로 반나절 정도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한 형, 무슨 일이에요? 해 형과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했나요?”

“그래, 전방에 무언가가 있다.”

한립은 차분하게 답했다. 그 말에 은월이 반짝이는 눈으로 앞쪽을 주시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윙윙 거리는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가까이에서 울리고 있었다.

은월은 깜짝 놀랐지만 한립과 해 도인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하늘 끝에서 백여 개의 둔광이 나타나 그들 쪽으로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다양한 수행을 지닌 백여 명의 마족과 마수들이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마치 뒤에서 무서운 존재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은월이 눈을 깜빡이며 마족과 마수들을 쫓는 존재의 정체를 추론할 때 윙윙 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하늘 끝이 회색 먹구름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법력을 불어넣고 안력을 돋워 회색 구름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하얗게 질렸다. 회색 먹구름은 엄청난 종류의 기괴한 형태를 지닌 괴충 떼였다.

작은 것은 주먹만 했고 큰 것은 사람만 했는데 등에 가시가 박힌 괴충, 송곳니가 날카로운 괴충 등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요충들이 아니었다.

거기다 회색 구름의 양으로 보아 그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괴충들의 수는 기함할 만한 수준이었다.

충운(蟲雲) 속 괴충들의 속도는 확연히 달라서 몸집이 큰 괴충들이 다른 괴충들을 앞질렀다.

뒤처진 마족과 마수들은 그런 대형 괴충들에게 따라잡혀 교전해야 했다. 도망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괴충들의 공격을 막느라 마수들의 포효소리와 수사들의 함성이 뒤섞였다.

그러나 마족들과 마수들이 조금이라도 속도가 느려지면 뒤따르던 회색 충운이 그들을 파묻어 버렸다. 참혹한 비명이 울리고 나면 아무리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마수와 강력한 방어보물을 지닌 수사라도 살아남지 못했다.

“해 형, 저 곤충들이 마계의 다른 요충들과 차이가 있습니까?”

“기운이 조금 다릅니다. 지니고 있는 마기가 정순하지 않은 것이 마계 본토에서 탄생한 요충들이 아닌 듯합니다.”

한립의 질문에 해 도인이 덤덤히 답했다.

“하아, 역시 그랬군요. 괴충 떼도 명충모와 연관이 있나 봅니다.”

“명충모라면 마계 대겁을 초래한 존재가 아닙니까. 제 조부님과 막 선배님이 억지로 마계로 오게 된 원인이기도 하고요!”

은월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래, 바로 그 명충모를 이르는 것이다.”

“괴충들이 마계를 휩쓸고 다니다니. 명충모가 벌써 탈출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확실치 않다. 봉인 속에서 명충모의 후손 일부가 탈출한 것일 수도 있겠지.”

고개를 젓는 한립을 보고 은월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백여 개의 둔광 중 대부분이 회색 충운에 잡아 먹혔고 겨우 십여 개만 살아남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둔광 속 고계 마족들은 하나같이 딱한 몰골로 겁에 질려 있었다. 한립이 육안으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마족들도 고공에 떠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중 젊은 마족 여인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거기 서서 뭐하는 것입니까! 명충떼가 옵니다! 어서 달아나요!”

한립 일행을 지나친 마족들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날아갔다. 그러나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멀리 충운을 바라보았다.

쿠웅!

아주 작은 산봉우리 세 개가 떠올라 눈부신 빛 속에서 거산으로 커졌다. 회색 충운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세 산봉우리를 둘러쌌다.

한립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산봉우리들이 우웅! 하고 울며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까만 산봉우리 위로 회색 기운이 번졌고, 회색 기운에 말려든 괴충들은 괴이하게 사라졌다.

푸른 산봉우리는 날카롭게 울며 무수히 많은 무형의 검기를 분출했다. 검기가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 괴충들을 조각냈고 대량의 녹색 피가 하늘을 적셨다.

마지막 산봉우리에서는 오색 기운이 화려하게 뻗어나갔다. 오색 기운에 닿자 괴충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퍽! 퍽! 으깨졌다.

이에 회색 충운이 거대 산봉우리 세 개를 중심으로 구멍이 뚫린 것처럼 줄어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충운이 희박해지고 얼마 남지 않은 괴충들 중 머리가 둘 달린 거대 괴충이 날카롭게 울었다. 그러자 괴충들은 냉큼 방향을 틀어 왔던 방향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걸 본 한립은 눈을 반짝이고 검은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우웅!

검은 산봉우리가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머리가 둘 달린 거대 괴충 위에 나타나 회색 기운을 뿌렸다. 이에 거대 괴충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다른 괴충들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나머지 괴충들은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 뿔뿔이 흩어져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립도 나머지 괴충들까지 쫓을 마음은 없었는지 산봉우리들을 불러들였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마족 여인이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고 비틀거렸다. 그녀는 너무 놀라 고공에서 추락할 뻔했다.

“마, 말도 안 돼!”

마족 여인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소리쳤고, 그녀와 같이 달아나던 마족들도 그녀의 모습에 놀라 뒤쪽을 보고는 대경실색했다.

그들을 죽이려고 따라붙던 무서운 충운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아연한 기색으로 한립 일행을 바라보았다. 충운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물어볼 것이 있으니 이리들 와보게.”

마족 여인은 흠칫 놀라 고분고분 그쪽으로 날아갔고 다른 마족들도 수군거리다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방향을 틀었다.

충운을 가뿐하게 없애는 놀라운 실력을 보고도 어찌 거스를 수 있겠는가!

“대인들을 뵙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족 여인이 가장 먼저 인근에 도착해 예를 올렸다. 의식으로 그들의 수행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후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디 출신이지?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은 어디에 있느냐?”

“저희들은 난운산(亂雲山)을 찾아온 손님들이고,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이라면 북쪽에 흑호성(黑葫城)이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가고자 하시면 직접 안내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흑호성? 안내는 필요 없고 주변 지도가 있으면 주거라.”

“마침 주변 지형을 상세하게 표기한 지도가 있습니다. 선배님께 바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한립의 거침없는 분부에 마족 여인이 새까만 돌조각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그는 고개를 까닥하고 돌조각을 끌어와 의식으로 훑고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이때 다른 마족들도 여인 옆으로 와 손을 모으고 대기했다.

“이제 저 괴충들은 어찌 된 것인지 설명해 보거라. 성계에서 본 적이 없는 괴충인데다 기운도 기존의 마충들과는 다르던데?”

“아, 명충을 모르십니까?”

마족 여인은 의심스런 기색으로 머뭇거렸고 다른 마족들도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몇 백 년 간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명충을 모르는 것이 이상하더냐?”

“은거 중이신 선배님이셨군요! 그럼 명충 떼에 대해 모르실 만도 합니다. 저 것들은 최근 백년 사이에 출현했으니까요.

원래는 성계의 평범한 마충이었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변이가 생겨 저렇게 흉악하게 변했습니다.

명충들은 지금 성계 전역을 휩쓸고 다니고 있고 성들도 명충 떼에 포위당하면 아무도 그 안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륙당한다고 합니다. 지금 성계 수사들은 다들 이 일로 두려움에 떨고 있지요.”

“도륙! 성계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3대 시조나 다른 성조들은 나서지 않는 것이냐? 명충 떼가 평범한 마충보다 위력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닐 텐데.”

“저는 수행이 낮아 시조 대인과 성조 대인들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명충 떼가 심하게 들끓는 지역에는 몇몇 성조 대인들이 나서서 토벌하기도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시조 대인들과 성조 대인들은 동시에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마족 여인이 주저하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성조들이 실종되었다? 그게 언제 일어난 일이더냐.”

“정확한 시기는 모르고 명충들이 나타난 때와 엇비슷하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알겠다. 이제 됐으니 그만 가 봐도 좋다!”

“예, 저희는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마족 여인이 공손히 답하고 뒷걸음질 쳐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다른 마족들도 예를 올리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한 형, 마계와 영계의 대승기 수사들이 곤경에 처한 것이 분명합니다. 안 그랬으면 마계가 이 지경이 되었을 리 없지요.”

마족들이 멀어지자 은월이 탄식했다.

“마계의 상황이 정말 좋지 않구나. 하지만 구체적인 정보를 더 수집해 봐야겠다. 흑호성에는 마족 존자가 머물 테지. 성조와 영계 대승기 수사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일리가 있는 말씀이에요. 일단 흑호성에 가봐야겠네요.”

“하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한립이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소매 속에서 회색 기운을 불러냈다. 빛이 가시고 바닥에 사람만한 회색 거대 괴충이 나타났다. 마지막에 포획한 머리 둘 달린 명충이었다.

기운이 빠져있었지만 화신 후기 수행을 지녀 곤충 떼 안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거대 괴충은 발작하듯 날개를 털며 달아나려 했지만 한립의 압도적인 기운에 꼼짝하지 못했다.

괴충은 연신 처량한 울음소리를 냈지만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뻗어 거대 괴충의 머리로 가져갔다.

쉬쉬쉬쉬쉭-!

수정실 다섯 개가 손끝에서 빠져나가 괴충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극통에 꿈틀거리던 괴충은 결국 몸을 부르르 떨고 쭉 뻗고 말았다.

눈을 감은 한립의 몸에서 금빛 기운이 흘렀다. 괴충을 상대로 추혼술을 펼치는 중이었던 것이다.

일다경이 흐르고 한립은 손을 거두고 눈을 떴다.

펑!

괴충의 머리가 수축했다 늘어났다 하다가 스스로 폭발해 터져나갔다. 한립은 남은 괴충의 몸통도 새빨간 불덩이를 날려 남김없이 태워버렸다.

“뭔가 알아내셨어요?”

은월이 조급히 물어왔다.

“아니, 괴충의 지능이 높지 않아 본능에 따라 움직여 왔더군. 헛고생을 했네.”

묘한 얼굴로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명충이 변이로 인해 순식간에 난폭하게 변했다고 해도 지능마저 당장 높아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 본능에 의지한 공격이라면 명충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대승기 수사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할 테니까. 해 형, 흑호성으로 가시죠. 그곳에 우리가 원하는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둘러 북쪽으로 날아올랐다.

* * *

하루 뒤, 그들은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고원에 도착했고 드디어 어두컴컴한 성의 윤곽을 발견했다.

마족 여인이 지도에 표시한 흑호성의 위치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성 안에서는 함성과 굉음이 가득했고 회색 괴충들이 바다를 이루듯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일전에 본 명충 구름의 양도 놀라웠지만 눈앞의 충해(蟲海)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현재 흑호성은 보호막이 움푹 눌려 괴충 떼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먹이 같아 보였다.

성벽은 물론 보호막 위에도 괴충들이 다닥다닥 붙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보호막 속에서 마족들이 빼곡하게 떠서 각종 마공과 보물로 반격하고 있었다. 명충들의 수행이 그리 높지 않아 곤충들의 잔해와 핏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성 중심의 백여 개의 탑에서 검은 뇌전이 쉼 없이 튀어나가 보호막 밖의 명충들을 재로 만들었다. 대충 보면 보호막의 비호를 받는 마족들이 유리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보호막의 빛은 이미 암담해져 언제라도 깨져나갈 것 같았고 성 안에서 공격을 퍼붓고 있는 마족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천둥소리가 그치고 거탑들이 검은 뇌전을 뿜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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