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4화. 천서각(天書閣)
*
성도는 그리 크지 않아 한립은 이용이 내준 지도를 보고 이리저리 걷다 작은 전송진 앞에 도착했다. 그는 해 도인을 데리고 전송진에 올라 수결을 맺었다.
웅!
전송진에서 우윳빛이 강하게 발산되자 그들의 신영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잠시 후 거대한 누각 앞에 하얀빛이 반짝이고 한립과 해 도인이 진법 속에서 나타났다.
‘천서각.’
한립은 고개를 들어 대문에 걸린 편액을 보고 해 도인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둘러보고 바로 나오겠습니다.”
“한 수사, 편한 대로 하시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당히 누각 대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는 창백한 얼굴의 노파 앞에 서있었다.
“천서각이 각종 비술을 수집해 둔 곳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살펴볼 수 있게 금제를 열어주시게.”
“낯선 얼굴인데 성에 새로 들어온 수사십니까? 천서각의 규정은 아시겠지요?”
1층 대청 중간에 앉아 있던 노파는 한립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얼굴의 주름이 깊어졌다. 수행을 파악할 수 없어 내심 긴장을 한 탓이었다.
“한 가지 비술을 배워가려면 상응하는 영석을 지불하거나 누각에 비치되어 있지 않은 다른 비술로 교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수사께서는 영석으로 지불하시겠습니까? 비술을 배우는 대가가 엄청나도 다른 비술로 교환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본 각은 소장한 비술들이 너무 많아서 새로운 비술을 가져와 교환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까요.”
노파가 탁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내게 이종족 비술이 몇 개 있는데 수사가 이 중에 천서각에 없는 비술이 있는지 봐주게.”
한립은 각종 서책을 불러내 허공에 띄웠다. 언뜻 보기에도 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이것들을 전부 이종족에게서 수집하셨다고요?”
“그래, 직접 살펴봐 주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노파가 겨우 평정을 되찾고 옥간에 하나씩 의식을 불어넣었다.
“소원분광술(消元分光術)! 비우족(飛羽族)의 유명한 비술이 아닙니까. 정순한 혈통을 지닌 비우족의 핵심 제자가 아니면 전수 받을 수 없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런 비술은 천서각에서도 소장하지 못하고 있고요. 이걸로 교환이 가능하겠습니다.”
“이종족 비술에 대해 퍽 잘 알고 있구만. 비우족에게서 우연히 얻은 것인데 체질이 맞지 않아 이제껏 익히지 않았다네.”
단번에 비술의 내력을 알아보는 노파를 보고 한립도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하, 제가 양족에서 비술 연구로는 알아주는 수사입니다. 그래서 천서각에 머물 수 있는 것이지요.”
노파가 주름 가득한 얼굴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녀는 다음 옥간을 가져가 의식을 불어넣었다.
“구염마대법(九焱魔大法), 이건 마공 같은데 본 각에 없는 것입니다.”
“천망청목공(天芒靑木功), 이건 목족 비술이라 본 각도 보유하고 있는 종류입니다.”
노파는 옥간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놀랍게도 대부분의 내력을 알아보았다. 양족 중에 비술 분야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라는 소리가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열댓 개째 옥간을 살피던 노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떨려왔다. 옥간 속 비술들은 출처가 다양했고 3분의 2는 천서각에도 없는 비술들이었다.
평소 누군가 천서각과 비술을 교환하러 와도 기껏해야 옥간 한두 개를 내밀곤 했다. 한립처럼 거의 백 개에 달하는 비술을 늘어놓은 일은 천서각이 건립된 이래 최초일지도 모른다.
일다경이 지나 옥간을 훑어본 노파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수사께서 보여주신 옥간 중에 총 61개가 본 각에 없는 비술이 적혀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교환하시겠습니까?”
“61개라 적지는 않구만. 그것들로 이곳의 61가지 비술을 교환하겠네.”
한립이 턱을 긁적이며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금제를 열어드릴 테니 스스로 원하는 비술을 택하시면 됩니다. 주의하실 점은 61가지 비술을 고르고 바로 나오셔야 하며 가져가신 비술은 다른 사람이나 제자에게 전수해서는 안 됩니다. 추후에 성도에서 제재를 가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게. 그저 참고할 요량으로 가져가는 것이지 수련을 하거나 전수하지는 않을 것이야.”
노파의 당부에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노파가 챙기지 않은 옥간들을 전부 회수했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고 금빛 찬란한 영패를 꺼내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허공을 가리켰다.
웅!
금색 영패에서 은색 기운이 퍼져 나와 계단 입구로 날아들었다.
파앗!
계단 입구의 보이지 않던 금제 몇 겹이 열리고 한립이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한립은 위층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고, 한식경 후 태연한 기색으로 내려왔다.
그는 노파에게 포권을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누각을 나갔다.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새로 성도에 이른 합체기 수사로는 보이지 않는데……. 수행을 파악할 수 없고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이종족 비술을 내놓다니, 설마!”
중얼거리던 노파의 눈이 밝아졌다. 그때 막 누각을 걸어 나온 한립에게 금빛 세 덩이가 쇄도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공으로 소매를 펄럭여 금빛을 거둬들였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주먹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 세 마리가 놓여 있었다. 흑효왕을 추격하러 보낸 가짜 서금충왕들이었다.
“정말 흑효 녀석은 달아나 버렸구나. 그래도 몸 절반을 너희들에게 뜯어 먹혔으면 예상보다 부상이 심각하겠어.”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딱정벌레들을 들여보내고 녹색 옥간을 꺼냈다. 옥간을 보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천서각에서 괜찮은 비술을 많이 건졌지만 가장 큰 수확은 ‘제뢰술(祭雷術)’ 하반부를 알아낸 것이었다.
비익족 지연 요왕들의 손에서 얻은 제뢰술은 완전하지 못해 벽사신뢰의 위력을 높이는 대신 술법을 펼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이전에 흑우 상인이 성도에 나머지 구결이 남아있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두었다가 오늘에서야 그것을 찾는데 성공했다.
나머지 수십 가지 비술들은 덤으로 가져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그 중에서도 몇 개는 관심이 가서 익혀볼 요량이었다.
한립은 옥간 속 제뢰술을 빠르게 살펴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전송진 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해 도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수사, 왔습니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성도의 장로들을 만나러 가볼까요?”
한립은 미안한 기색을 보였지만 해 도인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송진이 우윳빛을 머금자 다시금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며칠 후, 하얀 옥 선박이 성도 상공을 벗어나 날아가고 있었다. 선박 위에는 한립, 해 도인, 은월 그리고 낙 씨 성을 지닌 성도 장로 백발 노옹도 함께였다.
뱃머리에 선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 중이었다.
“낙 수사, 흑효왕은 중상을 입어 수백 년 내로는 우리 양족에 딴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네. 다른 종족들은 대승기 수사가 없는 한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 해도 내가 마계로 향한다는 소식은 비밀에 붙여야 할 것이야. 적어도 백 년 간은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 하네, 알겠는가?”
한립이 미간을 풀고 노옹을 향해 분부를 내렸다.
“한 선배님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출발하셔도 괜찮겠습니까? 막 대승기에 이르셔서 수행을 안정시킬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요.”
노옹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막간리와 오소 수사가 마계에서 실종된 지 시간이 꽤 지났네.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을 지 모르는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지. 또한 내가 익힌 공법이 특수해 대승기 경기를 안정시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네. 연체공법으로 대승기까지 올랐기 때문이야.”
“선배님께서 결정을 내리셨다면 제가 말릴 수는 없겠지요. 저희가 향하는 공간접점은 마족 대군이 철수할 때 사용한 곳입니다. 통로는 사라졌어도 인근에 거주하는 수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공간접점에서 수시로 강렬한 공간파동이 전해진다고 하더군요. 계면 장벽이 약하고 계면 간 압력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선배님의 신통에 성반의 보조가 있으면 마계로 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자네가 말하는 공간접점에 큰 문제만 없다면 마계로 들어갈 수 있을 걸세.”
“사실 선배님께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다른 거대 종족에서도 마계로 사람을 파견해 소식을 알아보려 할 것입니다. 대승기 수사들이 마계로 들어가 연락이 끊긴 것은 저희 양족만의 일이 아니니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용이 참다못해 한 마디 끼어들었다.
“하하, 그들이야 자신들 종족 수사만 관심을 둘 테지 어찌 약소한 인족이나 요족 수사의 생사에 신경을 쓰겠는가. 게다가 시간이 꽤 지나 다른 초대형 종족은 이미 마계로 수사들을 보냈을지도 모르네. 그들이 무슨 조치를 취하기 전에 우리에게 통보를 하지는 않을 테니까.”
한립의 말에 이용와 노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네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게. 해 형과 은월이 함께 가니 큰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야. 그저 과아 저 아이는 수행이 낮아 데려갈 수 없으니 자네들이 잠시 맡아 돌봐줘야겠네.”
한립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담담히 덧붙였다.
“선배님께서 마계로 진입하시면 저희가 성도로 데려가 안심하고 수련에 임할 수 있도록 보호하겠습니다.”
노옹이 얼른 허리를 굽혔다. 주과아가 옆에서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였지만 감히 반대하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빙긋 미소를 짓고는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주과아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령천에 가려면 멀었다. 잠시 성도에서 수련에 임하면 나중에 소령천으로 돌아갈 때 스스로를 보호할 힘은 생길 것 아니더냐.”
그 말에 속내를 들킨 주과아가 깜짝 놀라 아니라는 듯 고개만 저었다. 은월의 경우 조부인 오소 노조의 안위를 크게 걱정하고 있어 그를 따라 마계로 가는 것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옥 선박은 요족 영역을 향해 보름을 날아가 청록색 초원에 이르렀다. 그들은 초원에 들어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요새 잔해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원래 마족대군의 주둔지였는데 지금은 버려진 지 오래지요.”
백발 노옹이 품에서 진법 원반을 꺼내고 신중하게 살폈다.
“이곳이라고?”
고공을 살핀 한립은 회색 구름 말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손가락을 미간에 가져다대자 팟 하고 제3요목이 나타났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제3요목에서 검은 기운이 뻗어나가 고공으로 사라졌다. 곧 회색 구름들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미약하게 파동이 전해졌다.
노옹 등이 희색을 드러낼 때 한립이 제3요목을 거두고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진법깃발과 원반들이 오색 기운으로 변해 고공으로 스며들었다.
콰르릉!
한립이 양손을 비비자 마른하늘에 금색 벼락이 내리쳤고, 순간 금빛 뇌전들을 품은 거대한 빛의 진법이 떠올랐다.
그의 품에서 하얀빛에 휩싸인 파계(破界) 법기 ‘역성반’이 날아올랐다. 빛의 진법 위에서 빙글빙글 돈 원반은 하늘에 뜬 은색 달처럼 보였다.
“해 형, 은월, 갑시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고 먼저 성큼 앞으로 나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쿵!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빛의 진법 중심으로 이동해 있었다.
해 도인과 은월도 바로 그의 뒤로 향했다. 한립은 옥 선박에 탄 노옹와 이용을 힐긋 보고 수결을 맺은 손을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우웅!
빛의 진법 위의 은색 달이 맑게 울며 회색 구름 속으로 오색 빛기둥을 발사했다. 동시에 빛의 진법에서 천둥소리가 커졌다.
여섯 줄기의 흑백 빛기둥이 뇌전에 휩싸여 뻗어나가 오색 빛기둥과 같은 곳으로 날아갔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회색 안개 속에서 은빛이 터져 나왔다.
그 안의 허공에는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립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금빛으로 변해 해 도인과 은월을 감싸고 빛줄기로 변해 솟아올랐다.
극렬한 공간파동이 지난 후 금색 빛줄기는 검은 구멍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