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93화 (1,050/2,000)
  • 1293화. 허천정의 비밀

    *

    한립은 수정 실을 움직였고 수많은 허상들이 혈홍색 괴충을 둘러싸고 단단하게 당겨졌다.

    푸확!

    수정실이 사라지고 괴충은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핏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주 독한 요충이라 합체기 수사라 해도 일단 당하면 제거하기 어렵지만 몸에서 뽑아내기만 하면 아주 허약해지지.”

    “선배님의 가르침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혈혼 선배님께서는…….”

    “걱정 말게. 혈고충을 제거했으니 한동안 요양하면 스스로 깨어날 수 있을 걸세. 헌데 내가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단 말이지……. 어쩔 수 없이 내가 손을 써야겠군.”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이렇게 말했다.

    “허 가가 선배님께 큰 은혜를 입습니다!”

    허교가 감격한 표정으로 다른 장로들과 같이 감사를 표했다. 한립은 미간의 요목을 거둬들이고 관 바로 옆으로 이동해 손가락을 백의 여인의 이마로 가져갔다.

    막대한 영력을 함유한 푸른 빛기둥이 여인의 몸속으로 들어가 빠른 속도로 막혀 있던 경맥을 시원하게 뚫어버렸다. 이에 백의 여인은 고통스러운지 끙끙거리며 인상을 찡그린 채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휙!

    한립이 다른 손을 튕겨 녹색 빛을 쏘아 보냈다. 향기로운 약 향이 퍼지고 녹색 빛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여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미련 없이 돌아서 대청을 나섰다.

    “혈혼 수사가 앉아서 단약의 효과를 연화시킬 수 있게 돕고, 일각 후에 내게 데리고 오게.”

    “예, 한 선배님!”

    한립의 명을 들은 허 가 사람들이 즐겁게 대답했다. 해 도인은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다 무표정하게 그를 따라나섰다.

    일각 후, 원래 앉아 있던 전각의 대청 안에서 한립은 정신을 차린 백의 여인과 만났다.

    “혈혼 수사, 몸은 어떤가?”

    “한 선배님이 주신 보원단(補元丹) 덕에 잠시 동안은 무탈할 겁니다.”

    혈혼이 매우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원단이 수사의 정기 절반을 채워주었지만 완전히 회복하려면 잘 쉬어야 할 걸세. 그보다 혈고충은 풍원대륙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요충인데 어쩌다 그런 것에 당한 것인가?”

    “한 선배님께서 혈고충을 알아보셨다면 풍원대륙 요충이 아닌 것도 아셨을 겁니다. 저는 혈천대륙에서 누군가의 흉계에 빠져 혈고충에 당한 것입니다. 제가 특수한 육신을 지니지 않았다면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에 썩은 핏덩이로 변하였겠지요.”

    혈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혈천대륙에 다녀온 것이었어. 허교 수사의 말을 들으니 원래는 뇌명대륙에 다녀오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 혈천대륙으로 간 것인가?”

    “먼저 뇌명대륙에 가기는 했습니다만 어쩌다 기억 일부를 되찾아 혈천대륙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고요.”

    “내가 알기로 혈고충은 혈천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영충이네. 평범한 수사는 부릴 수 없는 영충이지. 혈천대륙에서 꽤 사고를 치고 다녔나 보군.”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정말 죽다 살았습니다. 혈천대륙에서 강력한 적들과 원한을 맺어 다시 그곳에 가게 된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거 왠지 그래도 꼭 혈천대륙으로 돌아갈 거란 소리 같은데?”

    “맞습니다, 혈천대륙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제 기억 속의 빙백은 마지막에 혈천대륙에서 실종되었기 때문이지요. 지난번에 실마리를 찾아 두었기에 본체를 되찾으려면 혈천대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빙백 선자가 혈천대륙에서 실종되었다면 오랜 세월 허 가 수사들이 전혀 단서를 못 찾을 만도 하군. 그럼 허천정을 내게 선물로 보낸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인가? 빙백 수사를 찾기 전에는 쓰임새가 많은 보물일 텐데 말이야.”

    한립의 질문에 백의 여인은 갑자기 허교 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물러가 있거라. 한 선배님과 단독으로 나눠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이후에 다시 부르겠다.”

    “예, 선배님. 저희들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허교가 다른 장로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분분히 대청 밖으로 나갔다.

    “한 선배님, 여기 수사분들도 아무래도…….”

    백의 여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은월과 이용 등으로 향했다.

    “혈혼 수사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할 모양이군. 은월, 너희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거라.”

    그것을 보고 한립이 평온히 명을 내렸다. 은월과 이용 등도 거부하지 않고 문밖으로 향했다. 해 도인도 말없이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별안간 대청 안에는 한립과 백의 여인만 남게 되었다.

    “이제 무슨 이야기든 해보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들 앞에서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서요. 선배님께서는 허천정의 진정한 용도를 아시는지요? 저는 그 비밀로 선배님과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백의 여인이 정색하고 제안을 했다.

    “진정한 용도? 거래?”

    한립도 관심이 생길만한 내용이었다.

    “제가 장담하건대 이 비밀을 아시면 선배님께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흠, 자네가 말한 대로라면 거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세. 하지만 그 전에 나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야.”

    “좋습니다. 허천정의 내력에 대해 설명을 드리려면 인계에서 제가 얻은 기연부터 설명해야 합니다. 그 솥은 사실 금궐옥서에 기재된 것을 제가 고생스럽게 모방해 제련한 보물입니다. 진정한 용도는 싸울 때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열쇠…….”

    혈혼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처음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한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고 나중에는 놀란 기색이 확연했다.

    * * *

    반나절 후, 한립은 허 가 수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얀 선박에 올라 인족 중심 방면으로 날아갔다.

    “한 형, 혈혼 수사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신 거예요?”

    은월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별 것 아니다. 혈혼 수사와 한가지 약속을 했을 뿐이야.”

    “약속이요?”

    “어떻게 보면 거래라고도 할 수 있고.”

    그의 대답에 은월은 빙긋 웃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때 주과아가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선배님, 허 가는 다녀왔고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물론 성도로 갈 것이다. 이 수사, 자네가 길 안내를 해줘야겠군.”

    “예, 제가 가장 빠른 길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일세. 나도 하루빨리 성도에 가보고 싶으니까.”

    한립의 말이 끝나자 옥 선박이 위잉 소리를 내며 더욱 속도를 높여 나아갔다.

    * * *

    두 달 후, 인요족 접경지대의 인적 드문 산맥 안.

    안개가 바다를 이루듯 산맥의 3분의 1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운해 속으로 만리를 들어가자 거무튀튀한 섬이 저공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백 개가 넘는 바위들이 섬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거대한 바위 위에는 누각과 탑 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배치되어 그곳을 지켰고 비차와 배들은 수시로 거대 섬을 드나들며 더 먼 곳까지 순찰을 돌았다.

    섬 주변 허공에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금제 보호막이 겹겹이 펼쳐져 있어 하늘을 다 가릴 정도였다.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 이곳은 인요 양족의 수사들이 흠모하는 성지, 바로 ‘성도(聖島)’였다.

    그때 성도 중심부의 전당 안에서는 십여 명의 합체기 장로들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초초하고 불안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 선자는 곧 돌아오겠지요?”

    희고 말쑥한 얼굴을 지닌 사내가 백발 노옹(老翁)에게 물었다.

    “순 수사,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용 선자가 오늘 도착할 거라고 소식을 보내왔으니 곧 올 겁니다.”

    “저도 그건 압니다만 벌써 오시(午時)입니다.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서요.”

    “하하, 한 선배님과 함께 오는 중인데 무슨 일이 생긴단 말입니까?”

    하얀 가죽 외투를 걸친 부인이 미소 지었다.

    “한 선배님께서 대승경전에서 보여 주신 실력은 막 선배님과 오소 선배님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성도의 장로들이 반나절이나 이곳에서 그분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겠지요.”

    백발 노옹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입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야 이제 막 대승기에 이르신 한 선배님께서 손을 쓰자마자 야차족 흑효왕이 중상을 입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말쑥한 사내가 미심쩍다는 얼굴을 했다.

    “소문이 과장된 면이 있다하더라도 한 선배님의 실력이 막 대승기에 이른 수사보다 뛰어나다는 것만은 사실일 겁니다. 게다가 막 대인과 오소 선배님께서 마계에서 위험에 빠져 있는데 그분 말고 두 선배님들을 구출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어떻든 한 선배님을 최선을 다해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노옹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양족에 새로운 대승기 수사가 나타났는데 성도에서 적극적으로 그분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허나 제자들 때문에 크게 밉보인 일이 있어 한 선배님이 성도에 불만을 품고 계시면 어찌합니까.”

    말쑥한 사내가 근심을 드러냈고 다른 장로들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대승기 수사인 한 선배님께서 속이 그렇게 좁을 리 있겠습니까? 우리도 양족의 미래를 위해 그런 것이니 크게 나무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백발 노옹의 말에 합체기 장로들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때 전당 밖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이곳에 모여 계시니 따로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대청 안으로 세 명의 여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용, 은월 그리고 주과아였다. 그러나 한립과 해 도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이용 선자, 영롱 수사, 한 선배님께서도 도착을…….”

    백발 노옹이 놀라 묻자 성도 장로들이 분분히 일어났다.

    “한 선배님께서도 성도에 같이 오셨지만 따로 들릴 곳이 있다며 가셨습니다. 금방 볼 일을 마치시고 오실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요.”

    이용이 빙긋 웃음 지었다.

    * * *

    그 시각, 한립과 해 도인은 성도 중심부의 어느 높다란 절벽 아래에서 수정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과 떨어진 곳에 녹색 장포를 입은 노인 두 명이 황송한 얼굴로 손을 모으고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담당하는 수사들로 연허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한립은 수정 벽에 적힌 금색 문자를 전부 읽고 세 번째 줄에 위치한 몇 글자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현천참령검.”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무의식중에 한쪽 팔뚝을 쓸었다. 손끝이 닿은 곳이 뜨겁게 달아올라 희미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현천참령검이 가장 최근에 혼돈만령방에 오른 현천의 보물이라지. 듣자니 그것 때문에 풍원대륙 종족들이 미쳐 날뛰었다고?”

    “선배님께 아룁니다. 현천의 보물이 막 만령방에 올랐을 때는 풍원대륙 뿐 아니라 다른 대륙의 초대형 세력까지 수색에 나섰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전부 실패한 후로는 소식이 끊겼고요. 아마 몇몇 종족들은 아직도 남몰래 현천의 보물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녹포 노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해 형, 만령방은 다 살펴보았습니다. 가시지요.”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해 도인을 불러 걸음을 돌렸다. 이에 두 녹포 노인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해 형, 혼돈만령방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기억 속에 관련 정보는 없습니다. 전 주인께서 언급한 적도 없고요. 하지만 수정벽에서 약간의 선령기(仙靈氣)가 느껴지더군요.”

    “선령기!”

    큰 기대 없이 물었던 한립은 깜짝 놀랐다.

    “희박하기는 해도 굉장히 정순한 선령기였습니다. 수사가 제공한 영액이 함유한 선령기와도 비슷할 정도로요.”

    “영계와 진선계가 연계가 끊긴 지 오래라지만 뭔가 남아 있기는 한가 봅니다. 흥미롭군요.”

    침음하던 한립이 냉소했다. 그러나 해 도인은 덤덤한 얼굴로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