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화. 혈혼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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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이 지나자 삼색 거대 산봉우리는 수사들로 꽉 차고 말았다. 일곱 번의 낮과 밤이 지났을 때 허공에서 다채로운 빛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한립의 강연이 끝이 났다.
술에 취한 듯 흠뻑 빠져 있던 수사들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지만 많은 이들이 강연으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되뇌느라 아직도 멍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한립의 목소리가 다시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모두 한 모의 대승경전에 찾아주어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경전을 마치겠으니 전부 하산하셔도 됩니다.”
수사들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한립의 말에 거역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공손히 산 정상을 향해 예를 갖추고 삼색 거대 산봉우리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대승경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 *
쿠쿵!
반나절 후, 고공에서 거대한 산봉우리가 모호하게 변해 결국에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광장 인근을 지키던 병사들도 고공을 향해 예를 올리고 질서정연하게 물러났다.
커다란 석탑 꼭대기 층의 대청 안.
한립이 상석에 앉아 있고 양쪽으로 기령자, 해대소 등 문하 제자들과 은발 노인 등 천연성 장로들이 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그리고 한립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무사히 천연성으로 돌아온 백과아 역시 비슷한 연배의 주과아와 나란히 서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비슷해 마치 자매 같았다.
그녀는 지금 화신 중기의 수행을 지녀 해대소보다 약간 경지가 높았다.
천연성 장로들은 대승대전 전보다 한립을 훨씬 극진히 대했다. 그냥 구색만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난 공경스런 태도였다.
한립이 흑효왕을 중상을 입혀 쫓아낸 일 때문이 분명했다. 이때 이용이 한립 앞에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소 선배님과 막간리 대인께서 마계로 간 이유는 다른 종족의 대승기 수사들과 마족 시조들을 도와 마계의 대겁(大劫)을 해결하기 위해서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인근 종족의 대승기 수사들이 전부 마계로 향한 것은 물론이고 영계의 초대형 종족들도 대승기 강자를 파견해 이 일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마족도 강대 세력의 위협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점령한 목족 영토까지 포기하고 전부 마계로 철수한 것이고요.”
한립의 물음에 이용이 공손히 답했다.
“그 대가로 인요족을 포함한 인근 종족의 대승기 수사들이 마계로 향하는 것이었을 테고 말이지. 마계가 명충모로 인해 멸망한다면 그다음은 우리 영계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족들도 쉽게 군사를 물리지 않았을 것이고 초대형 세력의 대승기 수사들이 간섭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쩐지 우리 양족과 영족 그리고 야차족 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아직까지 아무런 충돌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알고 보니 대승기 수사들이 전부 마계로 간 것이었구나. 야차족에서 흑효왕의 존재를 숨겨 둔 것은 대승기 수사를 남겨두어 비장의 한 수로 쓰려던 것이었을 테지. 만일 내가 대승기에 이르지 않았으면 양족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겠구나.”
한립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한 선배님께서 대승기에 이르지 못하셨으면 합체기 수사들만으로는 흑효왕을 저지할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대승경전에서 있었던 일이 주변 종족으로 퍼지면 앞으로 그들이 먼저 양족을 도발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용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성도 장로회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 것은 첫째로 다른 종족과 관련한 문제를 상의하려는 것일 테고, 둘째는 내가 두 선배님의 행방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일 게야.”
“예, 성도 수사들의 뜻은 그러합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나를 성도로 안내해 주어야겠어. 반드시 논의해야 할 사항도 있고 나도 성도의 비술을 보관한다는 천서각(天書閣)과 유명한 혼돈만령방에도 흥미가 있으니까.”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곡 수사, 이후로도 한동안은 내 문하의 제자들을 여러 장로들이 보살펴 주어야겠네.”
한립이 고개를 돌려 곡 장로에게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선배님! 천연성에 머무는 한 그들이 무사하도록 책임지고 돌보겠습니다.”
은발 노인이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었고 다른 장로들도 열심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자네들을 믿네. 해월천은 내가 데리고 떠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령자, 주과아 너희도 함께 가자꾸나.”
“예, 선배님!”
“존명!”
주과아와 기령자가 동시에 답했다.
한립은 천연성 장로들과 해대소 등 제자를 물리고 마지막으로 대청을 빠져나가는 기령자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기령자가 놀라 전음으로 답하고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한립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밖에서 가벼운 걸음 소리가 들리고 백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허천우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일어나게. 이번에 자네더러 경전이 끝나고 남아있으라 한 이유는 알고 있겠지?”
“허천정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것으로 압니다.”
허천우가 감히 한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그렇다네. 내 기억대로라면 허천정은 허 가에 중요한 보물일 텐데 갑자기 축하 선물이라며 내게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저는 빙백 선조님의 혈혼의 명을 받아 허천정을 갖고 온 것입니다.”
한립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자 허천우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혈혼? 빙백 수사의 혈혼 분신이 허 가로 돌아왔는가?”
“그러합니다. 반년 전에 중상을 입고 돌아오셨는데 곧 발작을 일으키시고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그 전에 혈혼 선배님께서 가문의 제자들에게 허천정을 선배님께 전하라 명을 내려두셨고, 그 솥을 들고 허 가를 한번 찾아주시기를 바란다고 전하셨습니다.”
“그 말은 혈혼 수사가 내가 대승기에 이른 것을 알고 허천정을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구만.”
“선배님 말씀대로입니다.”
“허 가에서는 혈혼 수사를 치료하고 있는가?”
“가문 어르신들이 최선을 다하셨지만 혈혼 선배님의 부상은 손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까지도 혈혼 선배님은 의식이 없으셨고요.”
“알았으니 일단 돌아가도록 하게. 며칠 후에 직접 허 가로 가겠네.”
침음하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허천우가 기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 * *
사흘 뒤 한립은 은월, 해 도인, 주과아 그리고 이용 네 사람을 데리고 천연성을 떠나 허 씨 가문으로 향했다.
마족들이 떠나고 허 가 자제들은 다시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 들렸던 몇몇 거대성의 전송진을 거쳐 겨우 보름 만에 허 가에 이를 수 있었다.
한립이 신분을 밝히자 허 가 전체가 시끌벅적해졌다.
가주인 허교와 허천우가 헐레벌떡 뛰쳐나와 영접한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장로들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긴장된 기색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중에는 한립과 만난 적 있는 허암과 허화도 보였다.
허 가는 마겁이 끝나고도 크게 세가 꺾인 것 같지 않았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시어 허 가 수사들 전부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교는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고 다른 장로들도 들뜬 얼굴로 인사했다.
한립이 합체기 수사만 되었어도 인족에서 명망 있는 가문인 허 가의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겠지만 대승기 수사가 된 한립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다들 사소한 행동 하나도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한립은 귀빈을 모시는 전각의 대청으로 안내를 받아 곁에 선 허 가 가주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번에 찾아온 이유를 알 것이네. 혈혼 수사에 대해서는 허 선자에게 들었지만 가주가 다시 한 번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으면 좋겠군.”
“존명! 혈혼 선배님께서는 대략 7개월 전에 갑자기 돌아오셔서…….”
허교가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한립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일다경이 지나 상대가 말을 마치자 한립이 입을 열었다.
“혈혼 수사가 내게 허천정을 전하라고 한 것 외에 오직 나만이 그녀를 깨울 수 있을 거라 말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혈혼 선배님은 선조님의 분신으로 수행은 연허기 정도이지만 육체가 허상과 실체의 중간에 있어 원래는 상처를 입히기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겉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전신에 검은 기운이 침투해 줄곧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희들이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고요. 선배님께서 빙백 선조님과의 인연을 생각해 도움을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허교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듣고 있자니 나도 혈혼 수사가 어째가 의식을 잃은 것인지 궁금하군. 일단 혈혼 수사를 한 번 보세. 도울 방법이 있다면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야.”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제가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해 형도 같이 가서 보시지요. 은월, 과아 그리고 이 수사는 잠시 남아 있게.”
“알겠어요. 저는 이 수사, 과아와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은월이 고분고분 답했고 이용과 주과아도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립은 해 도인과 함께 허교의 안내를 받아 허 가의 지하 석전으로 향했다.
대청 중심에는 반투명한 관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백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희미하게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여인은 빙백 선자의 혈혼 화신이었다.
한립은 몇 걸음 다가가자 기이한 한기를 느꼈다.
“만년현빙!”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저건 만년현빙관으로 혈혼 선배님의 기운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기의 힘은 대부분 부상이 악화되는 것을 약간이나 억제하는 효과가 있네. 치료법을 알 수 없는 혈혼 수사를 잠시 만년현빙관에 둔 것은 나름 현명한 판단이라 볼 수 있군.”
허교가 서둘러 변명을 하려는데 한립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있는 혈혼은 얼굴에 검은 기운이 가득했고 미간에는 괴이한 핏빛 문양이 나타나 어두워졌다 밝아졌다하며 깜빡거렸다. 피부를 통해 핏빛이 넘나들고 있었다.
한립은 핏빛 문양을 보고 무엇을 연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한 선배님, 혈혼 선배님이 정신을 잃으신 이유를 찾으셨습니까?”
“확진을 하려면 확인할 것이 있네.”
한립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의식을 방출해 관을 살폈다. 잠시 후, 한립은 표정이 달라지며 손끝으로 자신의 미간을 짚었다. 검은 기운이 떠올라 새까만 제3요목으로 변했다.
번쩍 눈을 뜬 요목에서 수정 실이 뻗어 나와 옥관을 뚫고 백의 여인 몸속으로 들어갔다.
쉭!
수정실이 금방 되돌아 나왔는데 앞쪽에 엄지손가락만한 혈홍색 괴충(怪蟲)을 꿰뚫고 있었다. 그러자 백의 여인의 미간에 생긴 핏빛 문양이 보이지 않았다.
괴충은 달팽이와 비슷하게 생겨서 머리에 길이가 제각각인 더듬이가 여덟 개나 솟아 있었고 백의 여인의 몸을 벗어나자마자 발광하듯 꿈틀거렸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저희가 혈혼 선배님의 몸을 조사할 때는 없던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허 가 일족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허교는 깜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자네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네. 혈고충(血蠱蟲)은 본래 무형무색으로 혈액 속에 녹아들거든. 의식을 실로 바꾸는 비술을 사용해 강제로 뽑아내지 않으면 영원히 흔적도 찾지 못했을 것이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척에서 혈홍색 괴충을 관찰했다.
“혈고충이라면 고충(蠱蟲)의 일종인지요? 이렇게 강력한 요충을 저희들은 어째서 이제껏 들어본 적도 없단 말입니까.”
“하하, 이 요충은 풍원대륙의 고충이 아니라 영계의 3대 대륙 중 가장 비밀에 싸여 있는 혈천대륙(血天大陸)에서만 자생하는 종일세. 자네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고충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
“혈천대륙이요? 그럴 수가!”
한립의 설명에 허교는 굉장히 놀란 얼굴이었다.
“나도 직접 가본 일은 없지만 뇌명대륙을 유람하다 관련 경전에서 혈고충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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