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90화 (1,047/2,000)
  • 1290화. 흑효왕(黑梟王)

    *

    “마, 마족시조?”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광장의 수사들이 종족을 막론하고 안색이 급변했다. 이제 막 마겁을 버텨낸 그들에게 마족의 최강자인 마족시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광 영족인도 미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답을 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실례를 범했더라도 제발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오늘 들은 대답은 그대로 성왕 대인께 전달하겠습니다.”

    영족 사자의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광 영족인이 자리에 앉고 다른 이족 사자가 일어나 선물을 바치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중에는 여러 무리로 갈라져 인근 종족에 합류한 목족(木族) 사자도 있었다.

    한립은 자신의 종족을 대표해 경전에 참가한 이종족 사자들에게 일일이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이종족 사자들의 차례가 끝나고 광장 한쪽에서 호리호리한 여인이 일어나 쓰고 있던 노란 삿갓을 벗어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용 선자? 이럴 수가!”

    “정말 용 선자가 아닙니까. 성도에서 용 선자는 삼천 년 전에 만황세계에서 실종되었다고 공표하지 않았던가요?”

    여인의 얼굴을 알아본 인족 수사들이 숙덕거렸다. 뜻밖에도 이름과 얼굴이 잘 알려진 여인 같았다.

    수사들의 말에 흥미가 인 한립은 여인을 훑어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녔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이한 기운을 품고 있고 피부에 투명한 광채가 돌아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수사는…….”

    한립이 무표정하게 운을 뗐다.

    “저는 이용이라 합니다! 성도를 대표해 한 선배님께서 대승기에 이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인족의 두 번째 대승기 수사가 되신 것을 기념해 최상급 전함 한 척과 시녀 열 명 그리고 최상급 영수 백 마리 그리고 괴뢰병사 천 마리를 선물로 전합니다.”

    여인의 달콤한 미소와 듣기 좋은 목소리는 마치 천상의 음악 같았다.

    “알고 보니 성도사자였군. 귀한 선물은 감사히 받겠네. 내 안 그래도 경전을 마치는 대로 성도에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네.”

    “선배님께서 성도를 찾아주신다면 저희의 영광이지요. 성도에서도 선배님을 섬으로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 때문에 긴히 논의를 드려야 해서요.”

    이용은 빙긋 웃음 지었다.

    “알겠네. 꼭 들르겠네.”

    “선배님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

    “누가 몰래 숨어 있는 것이냐!”

    이용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립은 얼굴을 굳히고 소매를 펄럭이며 낮게 소리쳤다.

    쿠쿵!

    무형의 힘이 거산 밖 금제를 통과해 허공에서 무언가와 충돌했다. 폭음이 들리고 검은 갑옷을 입은 거한이 튀어나왔다.

    용맹한 얼굴의 거한은 이렇게 멀리서 한립에게 들켰다는 것에 아연해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한 수사, 초대하지도 않은 자가 찾아왔다고 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흑갑 거한이 한립을 향해 포권을 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거대 산봉우리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내려왔다.

    치직!

    몇 겹의 금제가 거한의 몸이 닿을 때마다 종잇조각처럼 찢겨나갔다. 곧바로 광장으로 내려온 거한은 거리를 두고 한립과 마주 보았다.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인족 수사들은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질책했다. 하지만 신중한 자들은 거한이 대승기 수사인 한립을 앞에 두고도 태연한 것에 가슴이 철렁했다.

    “흑효왕(黑梟王)……. 야차족(夜叉族)의 흑효왕입니다! 수천 년 전 대승기 고비를 넘기다 진뇌겁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 나타난 것입니까! 설마 당신도 대승기에 이른 것입니까?”

    이용이 거한의 얼굴을 보고 싸늘하게 소리쳤다.

    ‘흑효왕.’

    미간을 좁힌 한립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수사들은 거한의 이름을 듣고 모두 조용해졌다.

    “오, 어린 계집이 날 본 적이 있더냐?”

    거한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보고 의외라는 듯 물었다.

    “몇 천 년 전에 스승님을 따라갔다가 수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용은 불편한 얼굴로 겁에 질려 답했다.

    “그때 막 노괴 옆에 있던 어린 계집이로구나! 못 본 사이에 합체기에 이른데다 미모가 아주 물이 올랐어. 본 좌는 만 년 전 대승기 고비를 넘어섰다! 진뇌겁에 당해 절명했다는 이야기는 본 족에서 다른 세력들의 눈을 속이려고 퍼트린 것이고. 그걸 여태껏 사실로 믿고 있었다니 우습기 그지없구나.”

    흑효왕은 말을 하면서도 이용을 탐욕스런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마음이 무거워진 이용은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었지만 막 대승기에 이른 본 족 선배가 함께 있어 겨우 두려움을 달래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상대의 혐오스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야차족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야차족 흑효 수사셨군요. 대승기 수사의 신분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주시니 감사하면서도 조금 놀랐습니다.”

    드디어 입을 연 한립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하하, 인족에 두 번째 대승기 수사가 탄생한 것은 인근 종족에서는 드문 일이고, 나를 제외하고는 수사가 가장 최근에 대승기에 이른 것 아닙니까. 노부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거한은 고개를 돌려 한립을 보았다. 그리 호의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그러셨군요. 저도 운이 좋아 대승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봐라, 멀리서 오신 손님이시니 흑효 수사께 자리를 마련해 드리거라!”

    “예, 스승님!”

    기령자가 곧바로 명을 수행하려 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오래 머물 생각은 없고 할 말이 끝나면 갈 것이니.”

    거한이 커다란 손을 내저으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맞습니다. 본 좌가 오늘 찾아온 것은 일단 한 수사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멀리서도 내 존재를 알아챈 것으로 보아 신통이 남다르더군요.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는 한 명을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두 명을 데려가고자 합니다.”

    거한이 씨익 웃으며 위협적으로 말을 꺼냈다.

    “두 명을 데려가겠다……. 누구를 이르는 것입니까?”

    “듣자니 한 수사 문하에 은뇌영근을 지닌 자가 있다지요? 본 좌가 빌려가서 다음번 천겁에 쓰려고 합니다. 다른 한 명은 이쪽의 선자로 하지요. 생긴 것이 썩 마음에 듭니다. 야차족으로 데려가 시첩으로 삼아야겠어요.”

    거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광장에 모인 모두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뭐라는 것인가? 한 선배님의 제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다니!”

    “게다가 용 선자를 시첩으로 데려가겠다고? 우리 양족을 뭘로 보고!”

    노기가 섞인 웅성거림이 들려왔지만 대승기 수사 앞에서 큰 소리로 욕설을 내뱉지 못하고, 인요족 수사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야차족 흑요왕을 노려보았다.

    “흑효왕! 나를 데려가려 하다니, 설마 스승님의 경고를 잊으신 건가요.”

    그 말에 난색을 표한 이용이 용감하게 소리쳤다.

    “으하하, 막 노괴라! 그 늙은이와 오소 노괴는 진작 인요족을 떠나 아직까지 생사불명이라는 것을 모르더냐!”

    흑효의 말에 광장 수사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막 선배님과 오소 선배님께 문제가 생겼단 소립니까?”

    “헛소리일 겁니다. 두 분의 신통에 그럴 리가요!”

    “하지만 오랫동안 두 분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도 사실 아닙니까!”

    겁에 질린 수사들이 마구 떠들어 광장 안이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이종족 수사들도 크게 놀란 눈치였고 일부는 생각에 잠겼다.

    “한 수사, 하찮은 이들 때문에 인족에 재앙을 불러들이지는 않겠지요. 이제 막 대승기에 이르러 제대로 대승기 수행을 발휘하려면 수백 년은 걸릴 것 아닙니까. 그러니 아예 내 적수가 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흑효 수사께서는 제 대승경전에 참석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고의로 난동을 부리고 계신 거군요.”

    한립이 평온한 얼굴로 피식 웃음 지었다.

    “난동? 흐흐,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러던가요.”

    거한이 교활한 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스스로 불순한 의도로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하셨으니, 주인 된 도리도 직접 처리해야겠군요.”

    한립이 드디어 얼굴을 굳히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삼색 거대 산봉우리가 웅! 하고 진동하며 광장 곳곳에서 무수히 많은 오색실들이 솟아올랐다.

    하늘에서 금은색 뇌전들이 마구 떨어져 꿈틀거리는 뇌전 뱀으로 변해 거한에게 달려들었다. 한립이 산봉우리 금제를 발동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내게 손을 쓰려들어? 힘 빼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했더니 안 되겠구나.”

    거한이 놀라기는커녕 불끈 두 주먹을 쥐고 가슴 앞에서 부딪쳤다.

    쾅!

    새까만 음파들이 두 주먹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오색 빛의 실과 고공에서 떨어지던 뇌전 뱀들이 새까만 음파에 휩쓸려 터져버렸다.

    거한이 기합을 넣으며 한 손으로 허공을 쥐자 새까만 음파들이 검은 기린 허상으로 변해 튀어 나갔다.

    기린 허상이 도착하기 전에 음산한 한기가 담긴 바람이 먼저 몰아쳤다. 바람이 지나는 곳마다 허공이 동결되는 것처럼 흐릿하게 변했다.

    한립은 무덤덤하게 손가락으로 고공을 가리켰다.

    휘릭!

    손끝에서 은색 화염이 뻗어나가 거대한 불새로 변하더니 입에서 새빨간 불기둥을 뿜어냈다. 그러자 검은 기린 허상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기린 허상이 낮게 신음하자 검은 형체와 기이한 바람이 사라졌다.

    은색 불새는 고개를 쳐들고 또 다른 새빨간 불기둥을 내뿜었다. 불기둥은 극히 빠른 속도로 거한 앞에 당도했다. 그러나 거한은 큰 입을 벌려 불기둥을 꿀꺽 삼켰다.

    “맛이 좋구나!”

    흑효의 말에 밑에서 지켜보던 수사들이 놀라 눈을 부릅떴는데 한립이 실소했다.

    “대승기 수사답습니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실력 발휘를 해보실까요? 승패는 가려야 할 게 아닙니까?”

    “본 좌도 원하던 바입니다!”

    거한은 한립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고 입에서 청록색 부채를 분출했고 검은 기운을 일으켜 몸을 부풀려 진정한 거인이 되었다.

    그가 들고 있던 부채도 바람을 타고 커져 산만해졌다. 초록빛을 머금은 거대 부채는 금은색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고 일곱 빛깔의 화염이 흘렀다.

    흑효가 거대한 부채를 펄럭이자 일곱 빛깔 기운이 하늘을 뒤덮고 한립과 광장 안 수사들에게 몰아쳤다. 수사들은 기겁하며 재빨리 각종 비도와 비검 그리고 보물들을 발동해 몰려드는 기운을 막으려 들었다.

    그 모습에 거한이 하찮다는 듯 비웃고 옥 부채를 가리켰다. 손끝에서 검은 빛이 쏘아져 나가 부채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웅!

    거대 부채가 내뿜는 일곱 빛깔이 더욱 강렬해지며 수사들의 보물들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모래알처럼 종적을 감추었다.

    이에 광장 수사들은 막대한 영기의 압력에 억눌리고 보물이 부서져 수행이 약한 자들은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직 멀쩡해 보이는 이들도 법력의 반서로 인해 체내의 기운이 들끓어 더 이상 반격하지 못했다. 잠시였지만 흑효가 홀로 광장에 모인 모든 수사들을 제압한 것은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거한이 득의양양해 고개를 쳐들고 웃으려다 한립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거대한 푸른 연꽃에 앉은 한립 위로 푸른 화염이 백장 가까이 치솟아 일곱 빛깔 기운을 밀어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혀 압력의 제약을 받는 눈치가 아니었다.

    거한은 열 받아 법력을 일으켜 부채의 방향을 틀었다. 이에 아래쪽으로 밀려들던 일곱 빛깔 기운 대부분이 한립에게 몰려들었고, 그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빛구슬을 만들어 놀라운 기세를 뿜어냈다.

    그러나 한립은 미소를 지우고 코웃음을 쳤다.

    “정말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구나!”

    그의 등 뒤로 금빛이 치솟아 삼두육비의 자금색 법상으로 변했다. 자금색 광채로 뒤덮인 법상의 몸에는 은색 문양이 가득했고 점차 실체화되었다.

    범상금신이 여섯 개의 팔을 들어 손바닥을 펼쳤다.

    쿠르릉!

    여섯 줄기의 무형의 압력이 용솟음쳐 쿵! 하고 칠색 기운을 막았다. 이에 안색이 달라진 거한은 다시 한 번 기합을 넣고 두 손을 교차해 부채 속으로 법결을 마구 던져 넣었다.

    우웅!

    거대 부채는 부들부들 떨리며 눈부신 빛을 발사했지만 빛구슬은 더 이상 아래로는 내려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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