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9화. 사자와 선물
*
드디어 처음 도착한 무리가 산 정상에 도착했고, 정상을 가리고 있던 안개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백옥을 깎아 만든 거대한 광장 곳곳에 다양한 색깔의 방석이 깔려있었다.
광장 가운데에는 수정처럼 반짝이는 높은 탑이 있었는데 총 7층으로 각 층마다 비취색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거탑 위로 거대한 푸른 연꽃이 둥실 떠있었고 꽃잎의 중심에는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아래에는 금색의 작은 짐승이 멀리서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표린수였다.
한립은 그들이 광장으로 들어서든 말든 개의치 않았지만 수사들은 멀리서도 공손히 예를 올리고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가서 방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뒤따라온 이들도 한립에게 예를 올리고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는 백발의 노인도 있었고 어린 소녀도 있었다. 또 털이 북슬북슬하고 머리에 뿔이 난 요족들도 꽤 보였다. 수사들은 방석에 앉아 눈을 감았고 그 누구도 함부로 떠들지 않았다.
한립이 위치한 산꼭대기 광장은 기껏해야 3, 4만 명밖에는 앉을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에 놓인 방석 중 열에 아홉은 자리가 채워졌다.
물론 거대 산봉우리 아래쪽 광장 주변에 모인 수백만의 수사들은 포함하지 않은 수였다.
일반 수사들의 입장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크고 작은 세력을 대표해 참석한 수사들이 나타나 한립과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사자들 중에는 인족과 요족도 있었지만 아예 기운이 다른 이종족 사자들도 섞여 있었다.
다시 반 시진이 지나 광장 안이 가득 찼을 때 은발 노인 등 천연성 장로들이 광장 입구에 나타났다. 일곱 개의 태양이 모두 하늘에 떠오른 오시(午時)였다.
“시간이 되어 경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공간파동이 일고 탑 아래 기령자가 나타나 손님들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산봉우리 아래에서 종소리가 그윽하게 울렸고 하늘에서는 오색 기운과 함께 천상의 음악과 같은 불경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색 기운 속에서 호리호리한 인영들이 나타나 하늘을 날아다닐 때마다 기이한 향기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숨을 들이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편안해지는 향기였다.
“초목정(草木精)! 81가지 진귀한 꽃과 풀로 제련해 만든다는 초목정입니다!”
누군가 놀라 소리를 높였다가 깜짝 놀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에 많은 이들이 얼굴이 활짝 핀 채 공법을 발동해 향기를 들여 마시려고 노력했다.
“예를 갖춰주십시오!”
기령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엄청난 수의 인족 수사들이 분분히 일어나 한립을 향해 참배 대례를 올렸다.
“한 선배님의 대승기 진계를 경하드립니다!”
“한 선배님의 대승기 진계를 경하드립니다!”
“한 선배님의 대승기 진계를 경하드립니다!”
요족이나 이종족 사자들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어나서 공손히 예를 올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축하 인사가 연달아 울려 천연성 하늘 높이 만수(万修)들이 한립을 알현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축하 인사가 총 아홉 번 정도 외쳐졌을 때 푸른 연꽃 위의 한립이 소매를 펄럭였다.
“모두 일어나시지요! 한 모의 대승경전을 축하해 주기 위해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주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맑은 차 한 잔으로 주인으로서 예를 다하고자 하니 부디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립의 말이 끝나자 탑 아래에 있던 기령자가 짝! 짝! 두 번 손뼉을 쳤다. 그 소리에 백의 여인들이 차가 담긴 장반을 들고 나타나 수사들 앞에 호박색 찻잔을 하나씩 내려 두었다.
차는 두말할 것 없이 극상품 중의 극상품이었다. 그러나 수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청수한 얼굴의 백의 여인들이 전부 꼭두각시라는 것이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수백 개의 괴뢰인형들을 보고 수사들은 신기해 혀를 내둘렀다.
잠시 후 탑에서 비교적 가까이 앉은 거한이 벌떡 일어나 한립을 향해 깊게 예를 올렸다.
“저는 화천종(華天宗)에서 온 사자입니다. 한 선배님의 대승 진계를 축하드리기 위해 약소하지만 만년 수충(壽蟲)의 껍데기 한 쌍을 준비했습니다. 앞으로 만세무강하시고 공법과 신통이 극에 달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거한이 노란색 목함의 뚜껑을 열어 주먹 크기의 곤충 껍데기 두 개를 선보였다. 적홍색 보석처럼 반짝여서 붉은 화염으로 둘러싸인 듯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화천종은 인족의 3대 종문 중 하나지. 귀 종의 대장로의 명성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네. 기회가 된다면 들려 이야기를 나누도록 함세.”
화천종은 인족의 유명한 거대 종문으로 열댓 개의 인족의 성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합체기 수사도 여럿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화천종 대장로도 오랫동안 인족에서 위세를 떨친 인물로 한 번에 두 명의 합체기 이종족을 격살한 전력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오랜 세월 여러 번 대승기 고비에 도전했으나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대장로께서도 이 일을 아시면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선배님께서 대승기에 이른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하필 본종의 대장로께서 생사관(生死關)에 들어가셨을 때라 직접 참석하지 못하셨지만 친히 만년 수충의 껍데기를 내주셨습니다.”
거한이 기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만년 수충의 껍데기는 안신영액(安神靈液)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주재료 중 하나지. 내가 막 대승기에 이르러 안신영액이 필요할 줄 알고 일부러 구해 보내주었다니 귀 종의 대장로가 고생을 많이 했겠군.”
한립의 칭찬에 거한이 벅찬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목함을 다가온 백의 시종에게 건네주었다. 화천종 사자가 자리에 않자 이번에는 광장 중심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갑옷을 입은 청년이 일어났다.
“위운성(衛雲城)에서 한 선배님의 대승경전을 축하드리기 위해 금정(金精) 삼만 근과 현음사(玄陰沙) 십만 근을 가져왔습니다.”
“귀 성의 마음은 잘 받겠네.”
위운성은 인요 양족 변경의 중급 정도 되는 성으로 대승경전에 간신히 참석할 자격이 주어진 세력이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해준 것만으로도 청년은 감격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가 자리에 앉았다.
“저는 천환산(千寰山) 사자입니다. 산주의 명을 받아 한 선배님의 대승경전을 축하드리기 위해 구현동목(九玄桐木) 세 그루와 매령주(魅靈珠) 세 개를…….”
청록색 피부를 지닌 두 명의 붉은 머리 요족 수사들이 옥함을 꺼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여러 세력들이 준비한 선물을 들고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대승기에 이른 노조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명의 사자들이 신분을 밝혔다. 사자들의 수행을 달라도 다들 명성이 있는 세력에서 파견되어 극진한 태도로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이에 산수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천지영물들을 보게 되어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한립은 모든 사자들에게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이고 짧은 몇 마디로 고마움을 표했다.
다음으로 백의 여인이 일어나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허 선자도 한 모의 경전에 참석해 주었군. 허 가를 대표해서 온 것인가?”
백의 여인은 바로 허천우였다. 그 모습에 수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이곳에 모인 수사들 중 여인의 수행은 그리 높지 않았는데 한립이 친근함을 표하자 놀란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허 씨 가문을 대표하여 선배님께서 대승기에 이르신 것을 감축드리러 찾아뵈었습니다. 특별히 남해자염죽(南海紫焰竹)과 무량령과(無量靈果) 세 개 그리고 허천정(虛天鼎)을 준비하였으니 앞으로 더 높은 곳까지 이르시어 세상과 수명을 함께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허천우는 긴장하고 있다가 한립의 말에 한결 편한 얼굴로 준비한 인사를 건넸다.
“허천정……. 알았네, 허 가의 호의는 잘 받아두도록 하지. 선자는 나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이니 시간이 되면 경치를 조금 구경하는 것이 어떻겠나. 혹시 얻어가는 것이 있을지 모르지 않은가.”
한립이 눈을 빛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허천우가 기쁨에 차 답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주변 수사들이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한립이 저렇게 말한 정도면 허 가의 사자에게 막대한 이득이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어 진령세가에서 보내온 사자들이 잇달아 선물을 바쳤고 그중에는 곡 가 가주 효풍 선자와 엽 가의 엽영도 있었다. 그들도 한립과 이전부터 알던 사이여서 감회가 남달랐다.
직접 한립의 헤아릴 수 없는 기운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가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승기 수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인사를 올릴 때도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몇 마디를 건넸다. 주변 수사들의 선망과 질투어린 시선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번 일로 그들이 대승기 수사인 한립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고 이후 두 가문에 악의를 품은 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한립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농 가에서 나선 이는 농 가의 신임 대장로였다. 그는 농 가에서 숨겨둔 합체기 수사로 한립에게 극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고, 농 가 노조의 죽음을 전해준 것에 대해 구구절절 고마움을 표했다.
한립이 마계를 벗어나 목족에 다다랐을 때 따로 사람을 시켜 농 가와 엽 가에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당시 양 가문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립이 대승기에 이른 이상 그 일을 거론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인사를 받으며 의외였던 것은 흑봉족에서 보낸 사자가 대아가 아니라 또 다른 합체기 장로라는 점이었다.
보아하니 대아는 아직 출관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흑봉왕이 대아와 그의 관계를 알고 있는데 그녀를 사자로 보내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흑봉족과 대승기 수사가 긴밀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영족(靈族) 사자 분월입니다! 영족의 성왕 대인을 대신해 오행영핵(五行靈核) 하나씩과 무광영염(無光靈焰) 세 덩이 그리고 최상급 법보 열점과 청색벽(靑索壁) 백 개, 심해자정철(深海紫晶鐵) 만근을 한 선배님의 대승기 진계 축하 선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보랏빛 기운 속 인영이 일어나 예를 올렸다. 나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족 사자였다.
“영족에서 귀한 손님이 왔군. 성왕의 명성을 흠모한지 오래일세. 친히 사자를 파견해 후한 선물을 주셨으니 감사를 전해주게.”
한 종족을 대표하는 사자였기에 한립은 푸른 연꽃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아닙니다. 성왕 대인께서는 제게 선물과 축하인사를 전하는 것 외에 다른 것도 명하셨습니다. 선배님께 묻고 싶은 말이 있다 하셨습니다.”
자광(紫光) 영족인이 감히 한립의 예를 받지 못하고 손을 저으며 몸을 굽히고 본론을 꺼냈다. 광장에 모인 여러 수사들과 사자들이 움찔할 만한 말이었다.
“어떤 일인지 말해보게.”
한립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성왕 대인께서 두 가지 질문을 전하라 하셨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성왕 수사가 직접 사람을 보내 묻는 말인데 답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지. 허나 딱 두 가지 질문만 허용하겠네.”
“물론입니다! 절대 선배님의 시간을 길게 빼앗지 않을 것입니다.”
한립의 무표정한 물음에 가슴이 서늘해진 영족 사자가 서둘러 답했다.
“물어보게.”
“첫 번째로 성왕 대인께서는 영족의 천추성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알고자하십니다.”
“세상을 떠났네.”
공손한 영족 사자의 물음에 한립이 고민 없이 답했다.
“누가 그리한 것입니까?”
“마족 시조.”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번에도 뜸들이지 않고 바로 답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