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6화. 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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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경 후 거대한 전당을 절반가량 가린 둥그런 빛의 장막 안에서 한립과 두우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신중한 표정의 두우와 달리 한립은 더없이 가벼운 얼굴로 뒷짐을 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수사의 일격을 멀쩡하게 막아내면 저희가 수사 문하의 제자를 데려가도 막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제 일격을 맞고 멀쩡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일격도 버티지 못할 거라면 빈손으로 돌아가셔야 할 테고요.”
“시작하시죠.”
두우가 긴장한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이 웃음을 머금었고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법상이 떠올랐다.
“커져라.”
여섯 개의 손으로 수결을 맺은 법상이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천둥소리가 잇달아 울리고 금빛 뇌전들이 솟아오르자 법상의 몸이 거대하게 불어났다.
세 얼굴이 눈을 번쩍 뜨고 집채만 한 거대한 손바닥 하나를 아주 느리게 뻗었다. 별 것 아닌 움직임에 공간이 부서질 것 같은 엄청난 압력이 생성되었다.
이에 두우의 안색이 변해 즉시 한 손으로 뒤통수를 때리고 입을 벌려 옥으로 만든 서책을 불러냈고, 소매에서는 우윳빛 흘러나와 새하얀 벼루로 변했다. 안에는 정체모를 은색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백의 청년의 머리를 한 바퀴 돈 두 물체는 각각 오색 광채와 무수히 많은 금은색 주술문자를 뿜어냈다. 하나는 강력한 통천령보였고 다른 하나는 보기 드문 현천조각으로 제련된 보물이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코웃음을 쳤다.
서서히 내려가던 금색 거대 손바닥이 부르르 떨리고 피부에는 은색 문양이 뿜어져 나와 크고 작은 은색 문양 진법으로 변했다.
웅웅!
거대 손바닥이 진동하며 자금색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이전보다 서너 배는 강력한 영기의 압력을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보물을 발동 중이던 두우가 영기의 압력을 감지하자마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쿵, 쿵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합체 후기를 대성한 그는 엄청난 압력에 몸이 터져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절대 합체 후기 수사의 실력이 아니야. 대, 대승기 존재만이 이런 신통을 쓸 수 있을 텐데!”
백의 청년이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는 몇 마디 소리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압력에 더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호연성상(浩然聖像)!’
겁에 질린 두우는 자금색 거대 손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소리 없이 외쳤다. 그가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자 그의 정수리에서 하얀 원영이 나타났다.
두우와 똑같이 생긴 원영은 급하게 고공을 향해 금빛 정혈을 뿜었다.
그 순간 아래쪽 두우의 얼굴이 10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초췌해졌다.
그때 두우의 원영이 어깨를 털며 하얀빛을 발산해 커다란 인영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인영은 진짜 사람처럼 또렷했지만 얼굴은 흐릿했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거대한 백의 유생이 극한의 양기를 발산했는데 유생 허상은 죽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에 떠있었다.
아래쪽 두우가 힘차게 손을 뻗자 금빛 정혈이 폭발하며 금색 주술문자로 변해 유생의 허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유생 허상 표면에 광채가 흐르고 눈을 감은 유생의 얼굴이 또렷해지며 무시무시한 영기의 압력이 퍼지기 시작했다.
자금색 거대 손이 손가락을 굽혀 백의 유생 허상에게 다가갔다. 엄청난 압력에 흐릿해진 유생 허상이 몸을 떨었고 발산하던 기운이 대부분 흩어지는 듯했다.
바로 그때 유생 허상이 눈을 번쩍 뜨고는 고공을 향해 한쪽 소매를 털고 다른 손으로 앞쪽을 쥐었다.
허상의 장포 자락에서 우윳빛 기운이 흘러나와 하얀 거대 손으로 변해 자금색 손바닥을 공격했고, 반대쪽 손바닥에서는 천지원기가 꿈틀거리다 눈부신 빛을 터트리고 거대한 오색 붓으로 변했다.
쿠쿵!
하얀 거대 손과 자금색 거대 손이 충돌해 주변 빛의 장막이 진동을 할 정도로 극심한 파동을 일으켰다.
자금색 거대 손은 잠깐 움찔했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하얀 거대 손을 부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 찰나의 순간 두우의 머리 위를 맴돌던 두 보물이 쉭! 하고 앞으로 날아들어 반짝이는 기운을 방출했다.
거대 유생 허상인 호연성상이 거대 오색 붓으로 벼루의 액체를 찍어 천천히 서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느닷없이 불경 소리가 울리고 서책이 오색 빛이 휩싸여 커다란 은색 주술문자들을 쏟아냈다. 주술문자들은 고공으로 날아올라 은색의 거대한 ‘유(儒)’ 자를 만들어냈다.
자금색 거대 손이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굽히고 거대한 ‘유’ 자를 잡아챘다.
웅웅!
빛의 장막 속에서 천지원기들이 미친 듯이 ‘유’ 자로 밀려들어 금색과 은색 두 가지 빛으로 반짝였다. 놀랍게도 잠시 동안 거대 손을 버티고 있었다.
“재미는 있습니다만 그걸로 제 일격을 받아내기는 무리일 겁니다.”
그 모습에 한립이 피식 웃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법결이 튀어나가 자금색 거대 손끝에 은색 문양이 응결되어 각각 현묘한 문양 진법으로 변해 현란한 금빛을 터트렸다.
다섯 개의 금빛 구슬이 뭉쳐 바람을 타고 몸집을 키웠고 강렬한 금빛 속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떠올라 맹렬히 회전했다.
콰르릉!
이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한 압력에 공간이 왜곡되어 흐릿해졌다. 은색 글자가 아무리 현묘해도 이런 힘 앞에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펑!
결국 ‘유’ 자가 산산이 쪼개지고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이 유생 허상에게 밀려들었다. 호연성상이 사정없이 찌그러지다 폭발하고 참혹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소인(小人)이 튀어나와 두우의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움직임이 없던 두우의 육신이 깨어나자마자 연달아 피를 토해냈다. 조금 전 유생 허상이 파괴되면서 심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두우는 주변 공기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회백색으로 변해갔다.
그 모습에 쉬지 않고 내려오던 자금색 거대 손이 제자리에서 멈췄고 금색 소용돌이도 번뜩하고 사라졌지만 압력은 그대로라 두우는 꼼짝할 수 없었다.
승패는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경기장 밖에서 지켜보던 곡 장로 등은 금제의 영향으로 한립의 공격이 가진 막대한 힘을 감응할 수는 없었지만 두우가 불러낸 호연성상을 대수롭지 않게 부수는 것을 보고 현저한 실력 차이를 알아차렸다.
‘대승기!’
천연성 장로들은 문득 머릿속에 스쳐가는 글자에 경악했고, 황발 거한과 추한 부인도 빛의 장막 밖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우의 진정한 실력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였다.
그저 해 도인과 은월만이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승기 수행을 지닌 한립의 신통에 겨우 합체기 수사 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한립은 두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곁에 있는 두 보물을 보았다. 옥 서책과 벼루 형태의 보물은 주인의 통제를 잃어 암담하게 변했지만 여전히 영성이 넘쳐 보였다.
한립이 두말할 것 없이 두 보물을 향해 손짓했다. 무형의 괴력이 공간을 넘어 두 보물로 향했다.
휙! 휙!
보물들은 쾌속으로 날아들어 한립의 손에 들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두 보물이 크기를 늘려다 줄였다하며 달아나려고 몸부림쳤지만 한립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보물을 사이에 놓고 두 손바닥을 살짝 비볐다.
웅!
보물들이 애달프게 울며 기운을 잃고 힘없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감히 내게 덤볐으니 이것들은 내가 맡아 두마. 언제고 대승기에 이르면 찾아가거라.”
두우를 향해 담담히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보물을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성큼 한 걸음을 내딛자 파동과 함께 천연성 장로들 옆에서 나타났다.
“한 수사, 설마 벌써 대승기에 이른 것입니까?”
은발 노인이 한립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곁에 서있던 이들도 한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운 좋게도 몇 개월 전에 고비를 넘는데 성공하여 대승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차분히 대답하고는 억눌렀던 대승기 기운을 드러냈다.
쿠쿵!
막대의 영기의 압력이 대전 전체에 내려앉았다. 이에 대전에 서있던 합체기 수사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한 형께서 대승기 수사였다니! 아니지, 이제는 한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겠습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다면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노인은 어렴풋이 예상했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그 사실을 전해 듣자 황급히 예를 취했다.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금월선사와 은광선자 등 천연성 장로들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분분히 허리를 숙여 대례를 올렸다. 황발거한과 추한 부인만이 몸을 가누고 아연한 기색을 했다. 당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히익!’
한립의 서늘한 눈빛이 그들에게 향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고 그들은 서둘러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제 성도 사자로서의 오만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립은 수사들을 쭉 둘러보고는 손을 저었다.
“내가 알리지 않은 일을 수사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만 되었으니 일어들 나시게.”
“무례를 벌하지 않으시는 한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곡 장로 등이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사죄의 말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황발거한과 추한부인은 겁이 나는지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있었다.
두 성도사자는 막 대승기에 이른 수사에게 밉보였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다. 앞으로 수만 년간 인요 양족이 의지할 사람은 눈앞의 한립 밖에 없었다.
빛의 장막 속에서 금제에 풀려난 두우는 경기장 위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고 평온하게 황발 거한과 추한 부인에게 명을 내렸다.
“자네들은 두 수사를 데려가게나. 성도의 장로들께는 한 모의 제자는 남의 수행을 높이는데 제물이 되기에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다고 전해주고. 허나 만일 양족을 위해 다른 일로 내 힘이 필요하다면 거절하지 않겠다는 말도 전하게.”
“예, 선배님! 저희가 꼭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황발 거한이 긴장해 침을 꿀꺽 삼키고 빠릿빠릿하게 답했고, 추한 부인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자 두 사람은 두우를 부축해 허둥지둥 대전을 나섰다. 한립이 가져간 백의 청년의 보물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립은 성도 일행이 떠나자 은발 노인 등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양해를 조금 해줘야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지. 일단 못난 제자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만나보고 수사들과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마련하겠네.”
“물론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일단 푹 쉬시지요.”
“맞습니다! 저희가 괜히 한 선배님을 성가시게 하였는데 그 죄를 묻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시선을 마주치고 공손히 답했다. 이에 한립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해 도인 등을 데리고 대전을 나섰다.
은광선자가 한립이 사라진 곳을 한참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정말 대승기에 이르다니. 은월이 제대로 된 상대를 찾았구나!”
그녀를 위해 기쁘기도 했지만 약간 씁쓸함이 들었다. 그가 나가자 흑포인을 비롯해 해대소를 성도로 내줘버리자고 주장하던 장로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새로 대승기에 이른 ‘한 선배님’이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되어 복수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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