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5화.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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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석탑의 꼭대기 층.
커다란 대청 안으로 은발 노인과 한립 그리고 백의 청년 등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은발 노인의 명에 시녀들이 차와 과실을 내와 탁자에 올려두었다.
“곡 형, 무슨 일이기에 성도에서 두 수사와 사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까? 이제는 제게도 알려주셔야지요. 저와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한립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곡 장로를 향해 물었다.
대승기에 이른 그는 인족에서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긴장할 까닭이 없었다.
“한 형,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두 수사께서도 이의가 없으시겠지요? 어찌 되었든 한 수사의 제자가 관련된 일이니까요.”
은발 노인이 한립과 백의 청년을 향해 안색을 바로하고 말했다.
“제자요?”
“물론 이의 없습니다.”
한립은 멈칫했고 두우는 바로 동의했다.
“맞습니다. 한 형, 문하에 전설 속의 은뇌영근을 지닌 제자가 있지 않으십니까?”
은발 노인이 뜸들이지 않고 물었다.
“해월천을 말씀하시는 것이면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은뇌영근을 지닌 것을 외부에 알린 일이 없는데 어찌 아셨습니까.”
“그게……. 한 형의 그 제자가 다른 수사들과 모여 놀다 흥에 겨운 나머지 술김에 스스로 털어 놓은 듯합니다.”
옆에서 금월선사가 끼어들어 답했다.
“하아, 그랬군요. 원래 덜렁거리는 성격이라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곡 형,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한립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은발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은뇌영근 수사의 특성은 저희보다 한 수사께서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성도에서 이 사실을 알고 본 성으로 한 형의 제자를 성도로 보내 달라 요청을 해왔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더 이상 이야기 않겠습니다. 두우 수사께서 설명해 주시지요.”
은발 노인은 의도적으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백의 청년에게 미루었다.
은광선자 등 다른 천연성 장로들이 그것을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말 한마디로 성도와 한 수사에게 밉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두우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로 곡 장로의 의도를 알아차린 두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제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한 형의 은뇌영근을 지닌 제자는 종족 전체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인요 양족에 막간리 선배님과 오소 선배님을 제외하면 다른 대승기 수사가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두 분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양족의 버팀목이 되어주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요.”
두우는 여기서 말을 잠시 멈추었고 대청 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대승기 수사가 없는 인요 양족이 어떻게 영계에서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오래전부터 마겁이 초래한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새로운 대승기 수사를 양성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인족이든 요족이든 대승기 수사가 나와야 양족의 수만 년이 안락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성도의 장로들이 그동안 모아온 자원을 합체 후기를 대성한 몇몇 인족과 요족 수사들에게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동시에 대승기 고비를 도전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수사의 제자가 필요합니다. 한 수사께서 전체 종족의 안위를 위해 제자를 성도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두우는 이번 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한립이라는 것을 깨닫고 천연성 장로들을 언급하지 않고 곧바로 그를 공략하려 들었다.
“세 분이 오신 이유가 겨우 제 어린 제자를 데려가기 위해서라 이 말이군요.”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누구라도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성도는 절대 수사의 제자가 목숨을 잃게 하지 않을 것이고 일이 끝난 후에는 후한 보상도 있을 겁니다.”
두우도 흠칫 놀랐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목숨을 잃지 않게 하겠다고요? 내 제자는 수행이 낮아 은뇌영근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대승기 진뇌겁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최소한 연허기는 되어야겠지요. 강제로 수행을 높이는 방법을 저도 예닐곱 개는 알고 있습니다만 전부 잠재력과 수명을 대가로 하는 것입니다. 요행이 그 자리에서 절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성도에서 준다는 후한 보상을 누릴 수나 있겠습니까?”
한립의 말투가 갈수록 싸늘해졌다. 누가 들어도 두우의 말을 비꼬고 있었다.
“한 수사의 제자에게 피치 못할 후유증이 남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이 일은 양족의 흥망성쇠가 걸린 일입니다. 개인의 목숨과 종족 전체의 안위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한 수사께서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참다못해 두우 옆의 황발벽안 거한이 나섰다.
“무엇이 중요한지 물론 잘 압니다. 그래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내 제자가 나서면 반드시 성도에 또 한 명의 대승기 수사가 나온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세 분이 심마에 걸고 맹세한다면 제자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만일 확률도 희박한 일에 내 제자를 공연히 희생하고자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성 싶습니까?”
한립의 거침없는 말에 두우 등 성도 사자들이 난색을 표했고, 곡 장로를 비롯한 천연성 장로들도 서로 눈빛만 주고받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형, 양 종족에 새로운 대승기 수사가 나타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의미 없는 희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성도의 명령을 거부하고 종족 전체의 안위를 개의치 않으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수사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저희가 성도로 돌아가 장로회에 뭐라고 고하겠습니까?”
맨발의 추한 부인이 입을 열어 위협했다.
“협박이라도 하는 것입니까! 말끝마다 ‘성도’와 ‘종족의 안위’를 들먹이는데 세 분이 정말 양족 전체를 대표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겨우 가식적인 말 몇 마디로 내게서 제자를 데려갈 생각이라면 꿈 깨야할 겁니다. 날더러 문하의 제자 하나 비호 못하는 무능한 사부라는 소리를 들으란 말입니까?”
눈을 부릅뜬 한립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추한 부인이 열이 받아 뭐라고 쏘아붙이려는데 한립이 소매를 저어 입을 막았다.
“분명히 말합니다. 성도가 내 제자를 희생해 대승기 수사를 배출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면 나도 제자를 내주지 않을 겁니다.”
“한 수사께서는 대승기 고비가 애들 장난인 줄 아십니까! 대승기 수사를 배출하는 것이 그렇게 쉬웠으면 뭐 하러 성도가 자질이 뛰어난 수사들을 선발해 오랜 세월 대승기 고비에 도전할 후보들을 양성했겠습니까. 고의로 어깃장을 부리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두우도 처음과 달리 말투가 험악해졌다.
“내 제자를 끌고 가 희생하려는 자들이 나보고 어깃장을 부린다라. 두 수사를 보니 성도에서 이번에 선발된 후보들 중 한 명이시겠습니다.”
한립이 싸늘해진 얼굴로 냉소했다.
“맞습니다, 성도 장로들의 허가를 받아 저도 후보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왜요, 제가 적합하지 않다 여기십니까?”
“적합한지 아닌지는 제가 내릴 결정이 아닙니다. 두 수사가 사심 없이 전 종족의 이익을 위해 생각을 하시니 제안을 드리지요. 제가 대승기 고비를 넘을 때 수사가 준비한 모든 단약과 보물을 내주시겠습니까? 제가 대승기에 이를 확률이 티끌만큼이라도 늘게 말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시겠다면 저도 두말 않고 세 분의 제안을 따르겠습니다.”
“그,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닌 단약과 보물은 전부 성도에서 분배해 준 것인데 어떻게 함부로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무표정한 한립의 말에 두우가 머뭇거리다 변명을 해댔다.
“참 아쉽습니다. 두 수사의 대답이 달랐으면 저도 제자를 내드렸을지 모르는데요. 세 분은 별다른 일이 없으시면 이만 성도로 돌아가 보시지요.”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두우를 비웃으며 휘휘 손을 저었다. 그의 말에 두우와 다른 성도사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곡 형, 금월 대사, 두 분이 한 수사와 교분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설득을 좀 해주시지요. 이번에도 한 수사의 제자를 데리고 돌아가지 못하면 뭐라고 보고를 한단 말입니까? 천연성도 성도에 이 일을 해명해야 할 테고요.”
두우가 안색이 변하며 홱 고개를 돌려 은발 노인 등을 쳐다보았다.
“이 일은……. 저희가 간섭하기 어렵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 수사와 세 분이 한 걸음씩 물러나 타협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은발 노인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는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
“타협하라고요? 곡 수사,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백의 청년이 의아하게 물었다.
“음, 여기 서들 싸우실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을 고려해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수사께서 한 형 문하의 제자를 데리고 성도로 가되, 한 형께서 동행하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고요. 그때 가서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으면 한 형께서 제때 건의할 수 있고요.”
은발 노인이 곰곰이 생각하다 신중하게 답했다.
“그거 좋습니다. 한 수사께서 안심이 되지 않으시면 저희와 같이 성도로 가시지요.”
눈을 반짝인 두우가 재빨리 말했다.
“성가시게 그럴 것 없습니다. 곡 수사께서 중재에 나서셨는데 저도 체면을 봐드려야지요. 이렇게 합시다! 세 분이 함께 제 일격을 맞고 멀쩡하다면 제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제 일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뭐, 하하…….”
한립이 냉소를 흘렸다.
“우리 셋이서 딱 일격만 막으면 된다고요? 한 수사,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두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떠보며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추한 부인과 황발 사내도 얼굴이 열이 올라 붉으락푸르락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못 믿겠다면 제가 심마에 맹세라도 해보일까요.”
“아닙니다. 한 수사의 신분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시지는 않았겠지요.”
두우가 코웃음을 치며 화난 기색을 지우고 손으로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한립이 시간을 끌거나 다른 속셈이 있다고 의심했지 결코 그들 셋이 상대의 일격을 막지 못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천연성 장로들이 수군거렸다. 한립의 실력이 합체기 수사들 중 손에 꼽혀도 성도사자 셋을 일격에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곡 장로가 금월선사와 시선을 주고받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려는 데 인근에 앉아 있던 은광선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전음을 들은 곡 장로는 한립 옆의 은월을 보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한 수사께서 힘을 쓰지 않고는 안 되시겠다면 저희가 따라야겠지요. 제가 대표로 수사의 일격을 막겠습니다. 수사께서 어떤 공격을 하실지 기대가 큽니다.”
두우는 천연성 장로들이 중립을 지키는 것을 보고 한참 만에 결단을 내렸다. 한립이 왜 저렇게 오만하게 나오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유가의 무상 공법을 익힌 데다 여러 보물을 지녀 대승기 수사를 만나도 일격은 어떻게 버텨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동급 수사의 일격 하나 막지 못하겠는가.
황발 수사와 추한 부인도 두우의 실력을 믿어 그가 대표로 나서겠다는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한립에게 좋지 않은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들은 성도사자로서 어딜 가든 대우를 받았다. 가끔 성격이 괴팍한 합체기 수사들도 냉담한 정도였는데 한립처럼 막 나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두우가 자신의 조건을 수락하자 한립은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저는 그럼 1층에 마련된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을 뗐다. 그가 공간 파동과 함께 허공으로 스며들자 웃음소리만이 대청을 울렸다.
두우는 한립이 손쉽게 허공을 찢고 사라지자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도 전력을 다하면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가뿐하지는 않았다.
그때 해 도인이 말없이 일어나 은월과 주과아를 향해 은색 기운을 뿜었다. 그러자 천둥소리와 함께 그들도 은색 뇌전 속으로 괴이하게 사라졌다.
깜짝 놀란 두우가 서둘러 고개를 돌려 은발 노인에게 물었다.
“곡 수사, 방금 사라진 수사는 또 누구입니까? 실력이 보통이 아니던데요.”
모두 한립에게 이목이 쏠려 있었고 원래 꼭두각시의 몸에 기운을 억누르고 있어 다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저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입니다.”
“누군지는 곧 알게 되겠죠. 어차피 이번에는 한 수사 홀로 공격하기로 했으니 상관없고요. 곡 형, 우리도 가시지요.”
두우가 평정심을 회복하고 말했다. 이에 은발 노인이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자는 심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그러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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