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84화 (1,041/2,000)

1284화. 성도사자

*

“곡 형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금월선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은발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그 결과를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이 중요하지요.”

은발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렵더라도 성도와 한 수사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성도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하기도 어렵지만, 한 수사의 실력은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양족의 합체기 수사들 중 1인자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한 수사의 마음이 변변찮은 구실이나 보상으로 쉽게 달래질 턱도 없고요. 노승은 이번 일로 오해가 생겨 청룡 수사 때처럼 큰일이 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금월선사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다른 이들도 ‘청룡’이라는 말에 섬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룡상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지만 속으로는 다들 십중팔구 한립이 손을 쓴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당시 명의상의 사매를 위해 청룡상인 같은 구성종 합체기 대장로도 제거했는데 이 일로 그들에게 어떤 잔혹한 수를 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직접 한립에게 문하 제자들을 안전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금면 거한과 흑포인도 약간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하아, 장로회 구성원이라면 모두와 긴밀하게 연관된 안건이라 오늘 내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듯합니다. 성도사자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른 장로들이 마저 모인 후에 다시 상의하지요.

그동안 한 수사의 제자들이 천연성을 떠나지 못하게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은광 수사께서는 오소 선배님과 막간리 선배님께 다시 한 번 연락을 취해 주시고요. 두 대인께서 결론을 내려주시면 우리끼리 걱정만 하고 있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언 수사께서는 성도에서 이번에 사자로 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성도에서 한 수사의 제자를 소환하라는 명령을 거두기만 한다면 어떤 조건이든 수락하겠다는 말씀도 해주시고요.”

은발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어째서 마족과의 정전협약을 맺은 후로 두 대인분들을 뵐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들의 친족이나 제자들과도 연락이 닿지 않고요. 어찌 되었든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은광선자가 큰 희망을 품지 않고 답했다.

“저도 성도 쪽에 친분이 있는 수사들에게 소식을 물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명령을 거두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생각일 겁니다.”

흑포인이 작게 탄식했다.

“저도 두 가지 일이 모두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주세요. 어떻게든 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할 것 아닙니까.”

은발 노인이 무표정하게 당부했고 노인의 말에 은광선자와 흑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천연성 주변에 남은 마족들을 소탕하는 일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었다.

* * *

세달 후, 천연성 한쪽의 거대 성문 밖.

두 줄로 들어선 백여 명의 병사들과 다양한 복색의 수사들이 서서 먼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중 은발을 지닌 노인과 금색 가사를 걸친 승려는 곡 장로와 금월선사였다.

그 옆으로 흑포인, 은광선자 등 다른 합체기 장로들도 자리하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한식경이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은발 노인이 고공에 뜬 태양을 올려다보며 곁의 흑포인에게 물었다.

“언 수사, 성도의 선박이 오늘 오시(午時)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식은 확실합니다, 곡 형. 아마 오는 길에 문제가 생겨 약간 지체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입니까? 총 3명이 사자로 오는데 수사마저 그들의 신분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성도가 그리 좋은 마음을 품고 사자를 보낸 것 같지 않아요.”

은발 노인이 생각에 잠겨 고개를 저었다. 흑포인이 바로 대답을 못하는데 금월선사가 한마디 했다.

“몇 번이나 장로회에서 상의를 했지만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적절하게 대처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옵니다!”

은광선자가 가면에 가려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다른 수사들도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빛이 반짝이고 푸른 빛줄기가 극히 빠른 속도로 성문 인근까지 접근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벽옥색 선박이었다. 뱃머리에 선 푸른 장포의 청년이 아래쪽에 모인 수사들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포권을 했다.

“곡 형, 금 대사,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돌아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성문 밖의 장로들이 청년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청년은 쉬지 않고 반년을 날아 겨우 천연성에 도착한 한립이었다.

그 뒤로 두 여인과 사내가 걸어 나왔다. 바로 은월, 주과아 그리고 해 도인이었다.

은월도 성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을 훑고 이상하다는 눈빛을 했다.

“한 형께서 돌아오셨군요! 본 성의 큰 경사입니다. 저희는 다른 일 때문에 이곳에 모여 있던 것입니다. 한 수사가 오늘 돌아오실 줄은 몰랐군요. 알았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은발노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밝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노인은 포권을 하며 의식으로 한립을 훑었지만 도저히 경지의 높고 낮음을 파악할 수 없어 뜨끔했다.

수행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보다 수행이 심후해진 것은 분명했다.

곡 장로뿐 아니라 다른 합체기 장로들도 한립의 수행을 파악하려 했지만 그들의 의식으로 그의 수행을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들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고 몇몇은 억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립은 장로들의 괴상한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 재빨리 물었다.

“하하, 다른 일이 있다고요. 곡 수사와 다른 장로들이 죄다 모여서 기다리실 정도니 귀빈이 오시나 봅니다. 막간리 선배님이나 오소 선배님께서 찾아오시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두 분은 연락이 끊긴 지 한참…….”

은발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지만 솔직히 성도사자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주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하늘 저편에서 오색 기운이 몰려와 극히 빠른 속도로 성문 앞에 멈추었다.

한립의 벽옥 선박 옆에 새하얀 옥 선박 한 척이 나타났는데 크기가 네다섯 배는 되었다.

한립이 움찔해 하얀 선박을 살폈다. 열댓 명의 수사들 중 가장 앞에 서있는 셋의 수행이 나머지를 압도했다.

왼편의 노란 머리카락을 지닌 삼사십 대 거한은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고, 중간의 귀품 있어 보이는 잘생긴 청년은 바람에 백의를 펄럭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맨발의 새까만 피부를 지닌 추하게 생긴 부인은 오른쪽에 서있었다.

좌우의 거한과 부인은 합체 중기, 중간의 백의 청년은 합체 후기를 대성한 수사였다. 백의 청년은 언제라도 대승기 고비에 도전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백옥 선박에 새겨진 성(聖) 자 모양의 도안이었다.

‘성도.’

한눈에 도안을 알아본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천연성 장로들이 몰려나와 한참을 기다린다 했더니 성도에서 사자를 파견한 것이다.

천연성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성도에서 사자를 보낸 것인지 그리고 그를 보고 왜 다들 표정이 어색한지 모든 것이 미심쩍었다.

‘설마 나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한립은 성도에서 온 수사들을 보고 진상에 가까운 추측을 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다른 이들을 살폈다.

이때 은발 노인과 금월선사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씁쓸한 얼굴을 했다. 오랜 시간 고민해왔는데 뜻밖에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말았다.

게다가 성도사자 중 백의 공자를 제외하고 양 옆의 수사들은 유명한 자들이었고 중간에 있는 청년도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곡 형,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한 수사가 직접 성도사자들과 제자에 관해 교섭하게 하면 나중에 쌍방이 불쾌한 일이 생겨도 우리를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은발 노인이 주저하고 있을 때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의 흑포인이 전음을 보낸 것이다.

그 말에 무심코 한립의 표정을 살핀 노인은 상대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가슴이 철렁해졌다.

“성도에서 오신 사자 분들이시군요. 노승 금월이라 합니다.”

금월선사가 불호를 외고 거대 선박 위 합체기 수사들을 향해 예를 취했다.

“명성이 자자한 금월선사 아니십니까! 두우가 대사를 뵙습니다. 여기 이분들은 웅 수사와 이 수사시고요.”

백의 청년이 빙긋 웃음 지었고, 양쪽의 두 수사는 그의 소개에도 말이 없었다.

“두우 수사라면, 대승기 고비를 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그 수사가 아닙니까.”

청년의 말에 은발 노인의 안색이 달라져 하마터면 큰 소리를 낼 뻔했다. 그 소리에 다른 장로들도 표정이 달라졌다.

“이쪽이 곡 수사시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성도에서 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곧 대승기 고비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제가 뜻을 이루려면 귀 성의 협조가 필요할 듯합니다.”

백의 청년이 겸손하게 말했다. 곡 장로가 입꼬리를 꿈틀하고 힐끗 한립의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성도의 명이라면 당연히 천연성도 협력을 해야겠지요. 그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두 형, 웅 수사, 이 수사 그리고 한 형께서 도요.”

“한 형? 설마 수사가 바로 그…….”

백의 청년이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져 한립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사실 두우는 처음부터 그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꼈고 의식으로 그의 수행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자 경계하고 있었다.

늘 자신감 넘치던 그도 그를 보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립의 소문은 출관하고 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고, 한립의 제자 중 하나가 자신이 진뇌겁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될 거란 소식을 듣고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왔다.

짧은 시간 동안 화신기에서 합체기에 이르렀고 합체기에 이른 후에는 불가사의한 속도로 후기에 이르러 겨우 천 년 동안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심지어 마겁 기간에는 엄청난 수의 마족 존자들을 격살했고 마계 깊이 침투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한 수사’는 너무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두우는 스스로 인족 역사상 다시없을 절세의 천재라고 여겨왔지만 한립의 수련 속도와 전공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천연성을 떠나 대승기 고비를 넘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던 그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제자에 대해 듣고 온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순조롭게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두우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제가 한 형을 몰라뵈었습니다! 수사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오신 김에 같이 상의하시지요.”

“상의라……. 정말 곡 형께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나 봅니다. 그럼 어디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시는지 구경이나 해볼까요?”

한립이 담담하게 답했다.

“큼, 그러시지요. 다 같이 성 안으로 돌아갑시다.”

금월선사가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모두를 불러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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