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3화.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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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진룡이 떠나자 안심했다. 하지만 상대가 떠나기 전 남긴 말을 곱씹을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서둘러 푸른빛으로 변해 아래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속 밀실 안에 파동이 일고 푸른 소인(小人)이 돌아왔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녹색 영체와 한립의 몸이 그걸 보고 몸을 일으켰다.
한립의 몸이 눈을 감고 두개골을 열어 푸른 소인을 받아들였다. 찰나의 순간 한립의 본체는 자금색으로 요란하게 반짝였고 은색 주술문자들이 피부에 떠올랐다.
잠시 후 한립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두 눈을 떴다. 그리고 곁에 서있던 영체가 말없이 성큼 다가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서있던 한립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천외강풍 세례로 원영이 이전보다 안정화 되었어. 신유만리는 공격 수단임과 동시에 수련에도 도움이 되는구나.”
자리에 앉은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은색 비늘을 불러냈다. 그는 손끝으로 비늘을 만져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번포자가 언급한 진룡의 섬에 대해서는 이전에 경전에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진정한 계면이 아니라 여러 계면들 사이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했다.
섬에는 각종 천지생령들이 존재했는데 대부분이 교룡이라서 사람들은 그곳을 진룡의 섬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광령도과대회라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막간리와 오소 노조에게 물어보고 섬에 갈지 말지 결정해야 할 듯싶었다.
마음을 정한 그의 몸에 은색 문양이 흐르고 피부에 수십 개의 소형 진법이 형성되었다. 진법에서 우윳빛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뒤덮었다.
밀실 안은 자욱한 우윳빛 안개로 가득 찼고 무언가 튀기는 소리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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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후, 밀실 대문이 열리고 한립이 평온한 안색으로 걸어 나왔고, 반나절 후에는 동부에서 눈부신 둔광 두 개가 날아올랐다. 다시 일다경이 지나자 열댓 개의 둔광이 한데 모여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대청 안에 해 도인, 은월, 주과아가 한립 앞에 서있었다.
“천연성으로 출발하시죠. 제자와그 제자의 제자들을 못 본지도 오래되었는데 어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담담하게 말하고 소매를 펄럭여 금빛으로 모두를 휘감고 대청 안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하늘에 파동이 일고 푸른빛이 벽옥 선박으로 변해 그들을 태우고 하늘 저 끝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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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성은 인요 양족에서 막대한 명성을 지닌 거대한 성으로 여전히 두 종족과 만황세계 접경지에 입구를 두고 있었다.
높다란 성벽은 마겁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곳들을 수리해 새것과 같았고, 새로 모집한 순찰 병력이 성벽 위를 돌아다녔다.
비록 마겁은 지나갔지만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천연성 병사들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천연성 중심의 거대 석탑대전 안.
여덟 명의 인요족 합체기 장로들이 모여 이런저런 일들을 논의 중이었다.
“가장 바깥쪽 초대형 금제 108개가 어제부로 정상화되었습니다. 남은 11개는 복구에 필요한 재료가 비교적 진귀해서 성내의 진법사들이 손을 보려면 몇 년은 걸릴 것 같고요.
또한 성 지하의 꼭두각시들은 손상이 너무 심해 아직 2할밖에는 수리하지 못했고 지난번 논의에서 폐기하기로 결정한 일부 꼭두각시들은 이미 분해해 재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천기문(天機門)에 맡겨 주문제작한 신형 괴뢰 10만 마리는 한 달 전에 창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본 성의 3,800개 달하는 운중각(雲中閣)들은…….”
은발 노인이 수사들을 향해 천연성의 복구 현황을 읊고 있었다. 마족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마겁 중에 천연성이 입은 피해도 어마어마해 아직도 전성기 때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겁이 지나갔지만 인족과 인근의 다른 종족들 간의 상황이 미묘했기 때문에 장로들의 근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목족이 몇몇 무리로 나뉘어 여러 종족으로 귀속되고 나서 목족의 방대한 영토가 방치되어 있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어떤 종족도 먼저 나서서 그 구역을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다들 목족 영역 변두리로 인원을 파견해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라도 인요족과 다른 종족간의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종족간의 충돌이 벌어지기 전에 천연성의 방어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은발 노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장로들이 한두 마디씩 질문을 했고 이에 노인이 대답해 주었다.
“좋습니다. 아직 전성기 때보다는 부족해도 10년이면 완벽하게 복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는 종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곡 형, 이제 다른 일을 논의 하시죠.”
금색 가사를 걸친 노승이 은발 노인에게 미소를 보였다. 노승은 금월선사였고 은발 노인은 천연성의 곡 장로였다.
“예, 이번에 장로분들을 소집한 것은 본 성의 복구 작업 외에도 중요하게 상의할 일들이 몇 가지 있어서입니다. 그중 가장 시급하게 이야기를 나눠 봐야할 일이 성도사자에 관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테니까요.”
은발 노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정말로 성도에서 사자를 보냈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성도가 반드시 그 수사를 데려가겠다고 작심한 모양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성도가 원하는 자가 하필 ‘그’의 제자인데요.”
다른 합체기 장로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성도에서 직접 사자까지 보내올 정도로 버텼으면 우리도 할 만큼 한 것 아닙니까? 그냥 그의 제자를 내줘버리지요. 천연성이라도 성도에 직접적으로 반항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금색 얼굴 거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실력과 천연성에 공헌한 점을 생각해 보세요. 일단 제자를 성도에 내주었는데 그가 돌아오면 누가 책임지고 해명할 것입니까?”
보랏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미 여러 구실을 찾아 성도의 명령을 몇 차례나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도에서 아예 사자를 보냈는데 협조하지 말란 말입니까? 천연성이 이렇게까지 했으면 그자에게도 미안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돌아와서 제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해도 우리에게 따질 게 아니란 소리예요. 그렇게 실력이 대단하면 성도로 가서 제자를 내놓으라고 하겠지요!”
금면(金面)의 거한이 얼굴을 굳혔다.
“다들 성도만 무서워하시는 것 같은데, 그가 폐관수련 중이라는 사실은 잊으셨나요? 그가 대승기 고비를 돌파하고 돌아와 나중에 제자가 사라진 것을 알면 천연성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도 충분히 고려해 보셔야 할 겁니다.”
은색 가면을 쓴 여인이 금면 거한을 힐끗 보고 냉랭히 말했다.
“허허! 은광선자가 그 자가 교분이 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만 천연성 전체의 안위가 달린 일에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두둔하시면 안 되지요. 대승기에 이르기가 그리 쉬웠으면 오랜 세월 양족에서 대승기 수사가 왜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대승기 고비를 넘어보겠다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던 수많은 수사들 중 누가 성공했냐 이 말입니다.”
금면 거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다들 눈치를 보는데 은색 가면 여인이 눈을 번득이고 쏘아붙였다.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희박하다 쳐도 그 소문을 잊은 건 아니겠죠?”
여인의 말에 순간 대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금면 거한도 안색이 달라져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소 선배님과 막간리 선배님께서 특별히 한립 수사를 중시한다는 소문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금월선사가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며 한마디 했다.
금월선사의 말에 한립의 제자를 내주자던 이들이 난색을 표했다. 두 종족의 유일한 대승기 수사인 막간리와 오조의 명망은 성도라 해도 따라잡기 어려웠다.
상고시대부터 대승기 수사는 성도의 일상적인 업무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없었다면 그들이 직접 성도를 관리해도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대승기 수사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다들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대전 안이 고요해졌다.
“흠, 그 소문은 제가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두 분께서는 한 수사를 두 종족 수사들 중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로 여기고 있으시더군요. 오소 선배님의 직계 후인인 영롱선자도 어쩐 일인지 한 수사를 따라 같이 폐관 수련에 들어갔고요. 섣부른 판단으로 한 수사를 분노케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침음하던 금월선사가 마저 이야기를 마쳤다. 이에 합체기 장로들은 표정이 가지각색이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성도가 우리 천연성에 한 수사의 제자를 요구한 것은 두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성도에 따르면 만년 넘게 폐관수련 중이던 두우 수사가 드디어 합체 후기를 대성하고 예정보다 일찍 출관했다고 하더군요.
유가의 무상 신통인 호연탕사공(浩然蕩邪功)을 높은 수준으로 깨우치고요. 두우 수사가 수련한 유가의 공법에 성도가 공을 들여 준비한 각종 단약과 법기가 더해지면 대승기 고비를 넘길 확률이 놀랍게도 2할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그저 진뇌겁을 어찌해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없었는데 성도에서 한 수사의 제자가 극히 희귀한 은뢰근을 지닌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두 수사가 진뇌겁을 이겨내는 것을 돕기 위해 그를 불러들이려는 것인데, 막간리 선배님과 오소 선배님도 이 일을 아시면 찬성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한 수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도 우리를 탓할 수 없을 테고요.”
줄곧 말이 없던 흑포인이 무감정하게 의견을 밝혔다.
“언 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성도에서는 한 수사의 제자를 데려다 두우 수사의 도겁을 도우려는 것뿐인데 반드시 사달이 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예상을 깨고 기연이 될 수도 있고요.”
금면 거한이 옳다구나 하고 나서서 찬성했다.
“흥, 그럴싸한 말씀이긴 합니다. 허나 한 수사의 제자는 겨우 화신기 수행을 지녔습니다. 아무리 은뇌영근을 지녔다고 해도 어떻게 진뇌겁을 막는단 말입니까! 분명 때가 되면 원신의 힘과 수명을 대가로 강제로 수행을 증폭해 소모품으로 쓸 텐데 운 좋게 살아남아도 이후 폐인이 되고 말겁니다. 한 수사가 그 꼴을 보고 그냥 넘어갈 듯싶습니까?”
은광성자가 노기를 드러냈다.
“두 종족의 대업을 위해 겨우 화신기에 이른 수사 하나를 잃는 것이 뭐가 어때서요? 화신기 수사의 목숨을 대가로 대승기 수사가 탄생한다면 못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흑포인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매몰차게 말했다.
“하하하, 한 수사가 대승기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 문제없을 지도 모르지요! 성도가 알아서 힘으로 굴복시킬 테니까요. 그런데 만에 하나 한 수사가 대승기 경지에 올랐다고 칩시다. 그때 가서 성도가 천연성 장로회 핑계를 대고 우리를 희생양 삼아 한 수사의 노기를 가라앉히려고 한다면 어찌합니까.
수사의 계산법 대로면, 대승기 수사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우리 같은 합체기 수사 몇을 잃는 것이 두 종족의 미래에 득이 되는 일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 장로회는 한 수사가 떠나기 전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문하 제자들을 돌봐주기로 약조하였습니다. 일단 일이 벌어지면 그 후의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자발(紫髮) 여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 말에 흑포인도 안색이 미미하게 변해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대전 안 수사들은 각자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이해득실을 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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