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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82화 (1,039/2,000)

1282화. 번포자와 광령도과대회

*

세밀하게 세 마리의 반보충왕을 살피던 한립이 의식을 움직였다.

웽!

거대한 금색 딱정벌레가 날개를 바르르 떨고 금빛으로 변해 밀실 안을 날아다녔다. 금빛이 밀실 모서리마다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며 귀신처럼 움직였다.

그 모습에 한립이 수결을 맺어 반보충왕들을 소매 속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로써 세 명의 합체 후기 조력자가 생긴 것과 다름없었다.

한립은 즐거운 표정을 거두고 곰곰이 생각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누군가에게 전음을 보내는 듯했다.

곧 그의 옆에 파동이 일고 은빛 뇌전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한 수사.”

“앉으시죠, 해 형!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니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하셔도 됩니다.”

한립이 자리를 권하며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수사는 제 주인이 될 기본 조건을 갖추었기에 앞으로 몇 가지 일을 완수하면 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기본 조건과 해야 할 일은 누가 정한 것입니까? 해 형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선대 주인께서 정해둔 조건입니다. 오직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나타나야 관련 사항을 말할 수 있게 되어있고요.”

“전 주인이라면 진선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 분이 정한 조건이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해 형께서 이야기해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 이곳에 적힌 물건들을 전부 구해주십시오.”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이 남색 옥간을 날려 보냈다. 남색 옥간을 받아 들고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다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수사께서 이것도 해내지 못한다면 다음 조건은 들을 필요도 없겠지요.”

“그 말은 맞는 말이군요.”

담담한 해 도인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옥간 속으로 의식을 불어넣었다가 순식간에 의식을 회수하고는 입을 열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군요!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인연이 닿아야 모을 수 있겠어요. 운이 나쁘다면 평생 모으지 못할 수도 있고요. 반드시 여기에 적힌 물건을 전부 모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도 부족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분량도 적힌 것보다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알아들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수사께서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용건이 없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해 도인이 은색 뇌전으로 변해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은 그가 사라진 곳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전에 생각한 대로 그가 대승기에 이른 후 해 도인이 훨씬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저 위선뢰에 남모를 비밀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는 옥간을 저물탁에 넣고 양손을 무릎에 올리고 두 눈을 감았다. 급한 일들을 마쳤으니 이제 운기조식을 하며 경지를 안정시킬 때였다.

그가 밀실에서 두문불출하는 동안 한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이날 밀실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던 한립이 번쩍 눈을 뜨고 태양처럼 빛나는 남색 안광을 번뜩였다.

팟!

그가 뒤통수를 치자 금색 소인(小人)이 떠올랐다. 한립과 똑같이 생긴 소인은 등에 푸른 단검을 메고 양어깨와 가슴팍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금색 딱정벌레가 붙어 그의 옷을 꽉 물고 있었다.

소인은 허공에 떠올라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희색을 드러냈다. 이때 꼼짝 않던 한립의 본체가 얼굴 근육을 꿈틀하고 고개를 들었다.

한립의 육체는 스스로 일어나 푸른 소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립의 육체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그와 몹시 닮은 푸른 인영이 옆에 나타났다. 곡아가 조종하는 영체였다.

“너희 둘이 내 몸을 잘 지키고 있거라. 원영을 대성하면 펼칠 수 있는 신유만리(神遊万里) 술법을 사용해 보고 곧 돌아오마.”

푸른 소인은 놀랍게도 한립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파공음과 함께 푸른 소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립의 육체와 푸른 영체는 시선을 교환하고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각, 한립의 원영은 수만 장 고공에 나타나 하얀 구름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돌풍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칼날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천외강풍(天外罡風)은 듣던 대로군. 이전의 원영이 이정도 고도에 올라왔으면 강풍에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텐데. 지금은 뭐, 약간 고통스러운 것을 제외하면 강풍도 두려울 것이 못 되는구나.”

푸른 소인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금빛으로 변한 다음 불가사의한 속도로 돌풍 사이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갈수록 하얀 돌풍도 사납게 몰아쳤다.

광풍은 점점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로 실체화되어 푸른 소인 주변에 새까만 공간균열을 베어냈다. 그러나 소인은 피하기는커녕 바람을 타고 속도를 높였다.

쉐액!

바람의 칼날이 푸른 소인의 몸을 스쳐 갔고 동시에 가느다란 균열이 만들어졌다. 소인은 모호하게 균열에 빨려 들어가다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그곳을 벗어났다.

합체기 수사라도 목숨이 오락가락할 만한 공간균열도 푸른 소인을 해칠 수는 없는 듯했다.

파아앗!

그런데 거꾸로 올라가는 유성처럼 치솟던 소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낮은 울음소리를 듣고 괴이한 파동에 휘말렸다. 그 순간 방대한 물체가 튀어나와 커다란 눈으로 소인을 노려보았다.

‘이럴 수가!’

푸른 소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맹수를 마주쳤을 때 느껴질 법한 공포감이 들었던 것이다.

소인이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낮게 기합을 넣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에 주변 허공이 쩌렁쩌렁 울리고 공간이 응결된 듯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 틈을 타 푸른 소인은 번득 허상을 남기고 사라져 멀리서 떠올랐다. 거리를 두고 살펴보니 드디어 방대한 물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무언가의 대가리였다. 보라색 눈과 거대한 금색 뿔, 은빛이 도는 비늘과 네 줄기의 기다란 수염을 지닌 거대한 용의 대가리!

“진룡(眞龍)!”

한립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거대한 용머리가 살짝 고개를 저어 인근의 파동을 정상화 시키고 그를 응시했다. 커다란 용의 입에서 웅웅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대승기에 진입한 수사였군요. 처음으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신유만리를 하는 중이신가 봅니다.”

“그걸 알아보셨군요. 그런데 수사께서는 전설로만 듣던 진룡 중 한 분이신 듯한데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소인이 빠르게 평정을 회복하고 신중하게 물었다.

“하하, 수사의 원영이 막 대승기 이른 수사보다 굳건하기는 해도 아직 원기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막 원영을 대성했다는 증거지요. 아, 제 본체는 진룡 중 자정룡(紫睛龍)입니다. 얼마 전 계면 사이에서 강적을 만나 이곳에 잠시 피해있는 중이었고요.”

거대 용머리가 웃음을 흘렸다.

상대는 머리를 털고 감춰두었던 방대한 몸을 드러냈다. 은색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용의 몸은 그 말대로 상처가 가득했다. 비늘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이 심한 듯했다.

그 모습에 한립이 할 말을 잃었는데 용이 화려한 은빛을 방출했다. 강렬한 빛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찡그린 한립은 거대한 용이 있던 자리에서 은색 장삼을 걸친 열대여섯 살 소년을 발견했다.

창백한 얼굴의 소년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번포자라 합니다! 수사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귀 족의 막 수사와는 한 번 만나 뵌 일이 있습니다.”

“번포자 수사께서 막 형과 아는 사이셨군요. 저는 한립이라 합니다! 자정진룡의 위명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수사에게 이런 부상을 입힐만한 적이면 평범한 존재는 아니었겠습니다.”

“하아, 누구라도 계면 간 허공에서 ‘칠수효(七首梟)’를 만나면 멀리 돌아갈 겁니다! 이번에는 중요한 물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붙었지만요. 저도 심한 부상을 입고 오랜 세월 수련한 진린(眞鱗)들을 약간을 잃었지만, 칠수효 그놈도 무사하지는 않습니다. 일곱 머리 중 두 개를 비틀어 터트려 주었으니까요.”

은삼 소년이 헛기침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칠수효요! 진령급 조류 중에서 흉악하기로 소문이 난 진령이 아닙니까. 번 형께서 그런 칠수효를 격퇴시켰다니 대단하십니다.”

한립은 ‘칠수효’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격퇴랄 것은 없고 보다시피 양패구상이라 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칠수효가 포악하기는 해도 지능이 그리 높지 않아 원하던 물건은 제가 챙겼지요.”

“보물을 얻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은삼 소년이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했고 푸른 소인은 포권을 해보였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렇게 심하게 다친 것은 몇 번 되지 않아서요. 그 칠수효도 부상을 입고 인근 계면을 떠돌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저와 힘을 합쳐 그놈을 없애는 것이 어떠십니까?

수사의 원영이 남다른 것으로 보아 본체의 신통도 일반 대승기 수사에 비할 바가 아닐 것 같은데요? 저와 손을 잡는다면 이길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겁니다. 칠수효를 죽이는데 성공하면 내단은 수사가 가지시고 살점과 피는 제가 복용해 부상을 치유하는데 쓰겠습니다.”

번포자가 눈을 굴리다 느닷없이 한립이 안색이 변할 만한 제안을 해왔다.

“번 형께서 농담도 잘하십니다. 이제 막 대승기에 이른 제가 어찌 흉명이 자자한 진령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푸른 소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거절했다.

“관심이 없으시다니 아쉽습니다! 정말 드문 기회인데요. 칠수효의 내단은 세상천지에서 제일가는 흉악한 물건이라 그걸 취해 살기(煞氣)에 관한 신통을 수련하거나 보물을 제련하면 이득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십니까? 수사에게 쓸모가 없다면 경매에 내놓기만 해도 필요한 이들이 잔뜩 몰려와 진귀한 보물과 바꾸고자 할 테고요. 다음번에는 이 정도로 부상을 입은 칠수효를 마주치지는 못할 겁니다.”

은삼 소년은 불쾌한 기색 없이 그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제 막 진계하여 보잘것없는 실력으로 일족(一族)을 멸하고 일국(一國)을 파탄 낸다는 흉물을 상대할 자신이 없습니다. 수사께서 복수하기를 원하신다면 다른 벗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한 수사가 싫다면 됐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벗이 없지는 않지만 인근 계면에 머물지 않아 지금 찾아가기는 어렵거든요. 다른 평범한 대승기 수사들은 그런 흉물을 상대로 별 희망이 없을 것이고요. 쯧, 혼자 가서 겨룰 것도 아니니 자리를 이동해 조용히 부상을 치유하고 제가 머물던 계면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한립의 완곡한 거절에 은삼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뜻밖에도 그는 한립의 진짜 실력을 대충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진령은 대승기 수사와 같은 급으로 분류되지만 일반적으로 평범한 진령도 대승기 수사 여럿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다. 심지어 강력한 진령들은 진선과도 같이 거론되었다.

“번 수사께서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십니까?”

“하하, 공간균열 속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수사가 찾아내지 않았습니까. 수사께서도 솔직히 제가 이곳에서 계속 머물기를 원치는 않겠지요? 괜히 칠수효를 불러들여 귀 종족이 싸움에 휘말리게 될까 걱정일 테니까요.”

“그런 일이 생기면 확실히 인족의 힘만으로 처리하기 힘들 겁니다. 괜히 예의를 차린다고 수사께 더 머물다 가시기를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일순 멋쩍은 얼굴을 한 한립이 표정을 바로 하고 포권을 했다.

“한 수사와는 처음 보지만 인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시죠. 제가 좋은 인연을 시작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입에서 은빛을 쏘아냈다. 이에 푸른 소인이 움찔하며 감사 인사를 건네고 한 손으로 무언가를 받았다. 고개를 숙여 자세히 살피니 놀랍게도 은빛 비늘 조각이었다.

“번 수사, 이것은…….”

“몇 백 년 후에 우리 진룡 일족의 금룡 대장로가 진룡의 섬에서 광령도과대회(廣靈道果大會)를 개최합니다! 각 계면의 진령들과 몇몇 대승기 수사들이 참가 자격을 얻을 것이고요. 섬에서 자체적으로 일부 명망이 높은 대승기 수사들을 초대하는 것 외에 저 같은 몇몇 진령들도 다른 수사들을 초대할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 비늘은 섬으로 들어올 수 있는 초청장으로 대회기간이 되면 정확한 위치와 일시가 나타날 것입니다. 시간이 되면 한 수사께서도 참석해 주시지요.”

“광령도과대회……. 알겠습니다. 번 형의 호의이니 감사히 받아두겠습니다.”

푸른 소인이 은색 비늘을 만지작거리다 정중히 답했다.

“진룡의 섬에서 다시 뵙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 떠나기 전에 수사께 충고 하나만 드리지요! 대승기에 이르러 원영이 육체를 멀리 떠나 돌아다니고 전투도 벌일 수 있겠지만, 웬만하면 강대한 존재 앞에서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적잖은 진령들이 탈각(脫殼)한 원영들을 보면 군침을 삼키니까요. 원영이 더 옹골차게 응결되어 있을수록 맛이 그만이라 합니다. 그 신선한 맛을 잊지 못하는 진령들이 많을 정도로요! 하하하하.”

번포자는 그 말을 끝으로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은빛 속에서 거대한 진룡 본체를 드러냈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은룡은 은빛으로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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