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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81화 (1,038/2,000)
  • 1281화. 육익상공의 소식

    *

    두 시진 후 동부의 대청 안.

    허천우가 어색한 얼굴로 나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석에는 한립이 그 옆에는 은월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허천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른 허 가 제자들과 흑봉왕, 동천서왕 등은 보이지 않았는데 다른 곳에 거처를 안배 받은 듯했다.

    잠시 후 허천우가 말을 멈추었다. 한립과 시선을 마주친 은월이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허 수사의 말에 따르면 마계는 30년 전에 영계와 분리가 되었고 마족대군도 영계를 떠났단 말이지. 그런데 난 얼마 전에도 마족 무리를 마주쳤네, 심지어 합체기 고마도 있었고.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마족의 주요 병력은 영계에서 철수했지만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 종족들이 연합해 빠르게 남은 마족 병사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각지로 달아난 마족들의 수가 엄청나고 마존급 고계 마족들도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허 가 자제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것도 명을 받아 인근에 숨어 있는 저계 마족들을 소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마족들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지요. 영롱 선배님께서 구해주지 않으셨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천우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런 일이……. 허나 내가 폐관에 들어가기 전 마족들은 분명 목족 영역을 점령하고 있었네.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은 그들답지 않은데, 각 종족이 그들과 어떤 협약을 맺은 것이지?”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부분을 언급했다.

    “그것은 겨우 화신기 수사인 저도 잘 모릅니다. 장로들의 말씀으로 미뤄보아 대승기 수사들이 각 종족을 대표해 마족의 3대 시조와 비밀서약을 맺은 후 마족들이 영계에서 철수한 것 같습니다.”

    “무슨 약속을 했기에 3대 시조들이 영계 침략을 포기했단 말인가?”

    허천우의 말에 한립이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한 형,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부님이나 막 선배님을 찾아가 물어보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마계가 드디어 영계에서 물러났다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은월이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그건 그렇지. 은월, 너는 허 선자가 머물 곳을 알아봐 주거라. 난 따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사람이 있다.”

    한립이 갑자기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따로 볼 사람이요? 소 수사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 동천서왕이다.”

    은월의 말에 한립은 한 발을 성큼 내딛었을 뿐인데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천서왕? 그자와는 처음 만난 것이 아닌가?”

    그때 동천서왕은 한적한 밀실에 앉아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 파동이 일고 금빛 속에서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직접 찾아오셨군요.”

    동천서왕은 놀라기는커녕 씁쓸하게 웃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몇 마디 말로 나를 속일 수는 없겠지.”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곱슬 수염 거한 맞은편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대승기에 이른 선배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어리석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인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천란성수(天瀾聖獸)의 본체가 칠요왕 중 한 명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 천란 수사, 자네의 천란 분신이 아주 입이 무겁더군?”

    동천서왕을 보는 한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동천서왕이 인계의 천란성수 본체였던 것이다. 직접 만나보지 않았으면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저도 겨우 천년 만에 별 볼일 없던 인족 수사가 제가 우러러봐야할 대승기 수사가 되어 나타날 거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와 선배님 사이에는 악감정이 없고 심지어 인계의 분신과는 약간의 교분도 있었으니 그 일로 저를 나무라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래, 자네의 인계 화신과는 확실히 정이 들기는 했지. 허나 그 전에 천란 화신이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 나를 죽이려한 일도 있지 않은가? 그 빚을 본체인 자네에게 받겠다면 어쩔 텐가?”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동천서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인계의 일은 전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 분신도 막 강림했던 터라 의식이 없어 다른 이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니까요. 게다가 선배님은 적이었던 천란 성녀와도 벗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동천서왕이 다급히 해명했다.

    “하하, 일리가 있는 소리네만. 내가 자네의 그 변명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한 선배님, 제가 어떻게 해야 인계에서의 일을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한립의 말에 동천서왕은 눈을 딱 감고 답했다. 비록 한립이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좋네. 동천수사가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니 나도 기회를 주지. 내 육익상공의 행방에 대해 알려주게. 그럼 인계의 일에 대해 더는 거론하지 않을 것이야.”

    한립이 담담하게 말했다.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는데 동천서왕은 귀 옆에서 천둥이 친 것처럼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유, 육익상공이요? 농담이시지요? 제 발로 달아난 영충의 행방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동천서왕은 당황해 변명을 해보려다 후회할 만한 소리를 했다.

    “오, 내가 언제 육익상공이 제 발로 달아났다고 알려주었지?”

    한립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반문했다.

    “알겠습니다. 육익상공의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모릅니다. 선배님께서는 제가 영충과 만난 것을 어찌 아셨는지요? 저는 아무에게도 발설할 적이 없는데요.”

    거한이 한숨을 푹 쉬고는 조금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유야 간단하네. 내가 말해 주지 않아도 짐작 가는 바가 있을 텐데?”

    “그 영충이 원래는 한 선배님을 주인으로 모셨으니……. 그때 설마!”

    “육익상공이 나와 맺은 주복혈주(主僕血呪)를 끊고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미약한 의식 연계는 남아 있기 마련일세. 그러니 그와 한동안 어울린 자네에게 흔적이 남는 것은 당연하지.”

    “그런 것이었습니까? 하지만 한 선배님의 의식이 갑자기 대폭 증가한 덕도 있는 것 아닙니까. 다른 수사들이 어찌 의식의 힘만으로 오래전에 남겨진 기운의 흔적까지 감지하겠습니까. 어쩌다 우연히 선배님과 마주쳐서는!”

    한립의 솔직한 대답에 거한은 자신의 운 없음을 탓했다.

    “궁금한 것을 다 알려주었으니 이제 자네가 육익상공에 대해 말할 차례네. 현명한 사람이니 미덥지 못한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야. 내가 영충을 찾아내기만 하면 진위를 판별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한립이 담담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잔머리를 굴리던 동천서왕이 뜨끔해 입을 열었다.

    “물론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저도 그 육익상공과는 우연히 만난 것인데 잠재력이 엄청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래를 한 것뿐입니다.”

    “거래?”

    “예! 제가 오래전 손에 넣은 역령진음대법(逆靈眞陰大法)이 있습니다. 금궐옥서 내의 비술을 거꾸로 활용하는 역천의 신통이지요. 제가 그래서…….”

    동천서왕은 이제와 숨길 것도 없다 여겨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하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립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에서는 파랑이 일었다.

    “그렇게 육익상공과 헤어진 다음에는 어떤 소식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제게 본명 혼패(魂牌)가 있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만황세계에서 살아남은 것도 몰랐을 겁니다.”

    말을 마친 동천서왕이 눈치 있게 허리춤에서 남색 수정패를 꺼내 바쳤다. 수정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한립이 바로 받아들지 않고 물었다.

    “자네의 말 대로면 육익상공은 역령진음대법을 얻어 이미 합체기에 이렀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로군? 너무 허황된 가정이 아닌가.”

    “허언이 아닙니다, 선배님! 역령진음대법은 확실히 건곤(乾坤)을 역전하고 천지조화를 획득하는 신묘한 효과가 있습니다. 종족과 자질의 제약으로 그 공법을 수련할 수 없지만 않았다면 저도 절대 영충에게 넘겨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음, 거짓말 같지는 않군. 그렇다면 이렇게 자네의 빚은 청산하는 것으로 하세.”

    침음하던 한립이 밝은 얼굴로 곱슬 수염 거한의 손에서 수정패를 끌어왔다. 동천서왕은 그제야 안심했다. 상대의 신분과 수행에 한 번 내뱉은 말을 쉽게 번복할 리 없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수정패를 한 번 훑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동천서왕도 따라 일어나 배웅하려 했다.

    “아, 육익상공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지 말게.”

    “심마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절대 이 일을 제3자에게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동천서왕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알았네. 동천 수사는 한동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다 알아서 떠나면 될 것이야.”

    그의 대답에 한립은 흡족해하며 금빛 기운에 휩싸여 사라졌다.

    * * *

    또 다른 밀실 안.

    흑의 부인 앞에 한립이 나타났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지만 얼른 일어나 예를 올렸다. 한립은 손을 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소 선자를 찾아온 것은 딱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네. 사실대로 답해주길 바라네.”

    “무엇이든 하문하시면 숨김없이 답하겠습니다!”

    머뭇거리던 흑의 부인이 신중하게 답했다.

    “긴장할 것 없네. 다른 잡스러운 일은 되었고 주아 그 아이는 어찌 지내는가? 마겁이 시작된 후에 연락이 끊겼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한립이 여인의 근심을 알아채고 부드럽게 물었다.

    “아, 대아요……. 그 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아의 자질이 흑봉족 자제들 중 손에 꼽히게 뛰어나 마겁이 시작될 무렵 다른 제자들과 비밀 금지에서 폐관수련을 하도록 명했습니다. 줄곧 수련에 전념하느라 아직까지 출관하지 않고 있고요.”

    “대아에게 별일이 없다니 안심이 되는군. 그만 갈 테니 쉬시게.”

    한립은 흑의 여인의 대답을 듣고 괴이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떤 둔술을 사용한 것인지 그녀는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바닥에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한립은 평소 수련하던 밀실로 돌아와 차분히 방석에 앉았다. 운 좋게 대승기 경지에 이르렀지만 육신과 의식을 안정시켜야 진정으로 대승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의 소매 속에서 웽! 하고 세 덩이의 금색 꽃잎이 날아올라 커다란 영충으로 변했다.

    세 마리 서금충은 수만 마리 성체 서금충들과 열두 마리 충왕 후보들이 서로 갉아먹고 최종적으로 남은 영충이었다.

    한립은 세령지에 몸을 담그고 대량의 영물을 갉아먹어 진화 중이던 서금충 떼를 소환해 냈다.

    그 결과 성체 서금충들과 열두 마리 충왕 후보들은 진뢰의 공격을 받고 진뢰의 힘을 갉아먹은 다음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인 동시에 희소식이었다.

    그가 천겁을 무사히 치르고 남겨진 세 마리는 충왕 후보라고도 할 수 있었고 충왕까지 반걸음을 앞둔 ‘반보충왕(半步蟲王)’이라고도 부를 수 있었다.

    세 반보충왕들은 체격이 원래보다 몇 배는 커졌고 짙은 보라색 문양도 어렴풋이 뇌전 모양을 띠고 있었다.

    영충들의 생김새는 더욱 흉악했고 기운도 합체 후기 수사에 맞먹었다.

    거기에 서금충의 단단한 몸과 무엇이든 갉아먹는 천부적인 능력을 생각하면 그 위력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이 되었다.

    아쉬운 점은 세 마리가 남자 더 이상 서로 갉아먹지 않고 싸움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청원자가 진선도 마주치면 피해간다던 서금충왕이 탄생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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