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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80화 (1,037/2,000)
  • 1280화. 대승기

    *

    반나절이 흘렀을 때 한립은 거의 백 번에 달하는 윤회를 했지만 한 번도 평정심이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심마는 그동안 부모, 누이, 려비우 등 가까운 관계의 사람으로 변했다가 나중에는 남궁완, 자령 등으로까지 변해 그를 홀리려 들었지만 전부 한립에게 걸려 죽임을 당했다.

    화가 난 심마가 전략을 바꾸어 문 대인이나 극음 사조 등 강적으로 변해 나타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손을 겁먹은 백발노인의 가슴에서 천천히 뽑아냈다. 이에 백발노인의 가슴이 은색 화염으로 뻥 뚫렸고 은색 불 인간이 되고 말았다.

    펑!

    은색 화염 속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올라 커다란 악귀 얼굴로 변했다.

    “흥, 또 내가 누군지 알아냈구나! 악독한 녀석 오랜 세월 키워준 사부의 심장을 노려? 막 기억 봉인이 풀렸는데 실수로 억울한 사람을 죽일까 걱정도 안 되더냐!”

    “내 마음을 어지럽히려 할 것 없다. 처음 몇 번은 머뭇거렸을지 모르나 이미 백번 가까이 경험을 쌓아 심경이 더욱 굳건해졌다. 내 기억 속에서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감동시키려 하다니 우스울 따름이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래? 그럼 다음번에는 진선계 선인으로 변신해 네 놈이 나를 어찌 죽이는지 보겠다.”

    “헛소리 말거라. 나도 진정한 선인을 본 적이 없는데 심마인 네가 변신할 수 있을 리가. 게다가 네가 다음번 변신할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

    한립은 묘한 표정을 지었고 팔뚝에서 비취색 검이 나타났다. 그가 한손으로 허공을 쥐자 은은한 녹색 장검이 나타났다. 한립은 장검으로 거침없이 악귀 얼굴을 베었다.

    “현천의 검! 말도 안 돼! 그걸 발동할 법력이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악귀 얼굴은 겁에 질렸지만 재빨리 몸을 비틀어 검은 기운으로 변했다. 곧바로 피하려 했지만 장검이 떨어지기 직전 천지법칙을 함유한 파동이 도달해 검은 기운을 가두었다.

    검은 기운은 천지법칙의 힘에 억눌려 몸부림치며 악귀 얼굴로 돌아갔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의 수행으로는 현천의 검이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도 없고 단 한 번밖에 공격할 수 없지. 처음부터 이 방법을 썼다면 너를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백번이나 환상을 구현하느라 허약해진 너는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담담한 그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장검이 악귀 얼굴 위에 나타났다.

    “아, 안 돼!”

    심마가 변한 악귀 얼굴은 평범해 보이는 푸른 광채를 보고 기겁했다. 악귀 얼굴은 푸른 광채가 다가오자 검은 기운으로 변해 빨려 들어갔고 참혹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검은 기운은 푸른 광채 속에서 가루가 되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심마가 사라지자 회색 공간이 우웅 울리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손을 뻗자 팔뚝에 사라졌던 검 흔적이 괴이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공간이 사라지기 전, 한립의 원신이 변한 화신은 금빛 빛줄기로 그곳을 날아올랐다.

    회색 거울이 깨져나가고 금빛이 빠져나와 한립의 원영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움직임이 없던 원영이 울음소리를 내며 아래의 육신으로 가라앉았다.

    후우웅!

    한립의 본체가 눈을 번쩍 뜨고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호연한 기운을 방출했다.

    또한 고공을 가득 채웠던 먹구름이 물러가고 찬란한 기류가 몰려들어 분지를 가득 채웠다.

    한립은 오색 기운의 바다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신비한 기운을 함유한 수정실들이 응결했고 일다경 만에 한립은 수정실에 돌돌 말려 커다란 고치가 되었다.

    고치 상태가 되자 오색 기운의 바다는 빠르게 요동쳤고 고치 안에서는 폭음이 쉼 없이 들려왔다.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오색 기운이 끝없이 몰려들어 본래 떠있어야 할 일곱 개의 태양 중 절반 이상이 보이지 않았고 단 세 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 개의 태양마저 빛이 어두웠고 빛의 실들이 작은 개울을 이루어 오색 기운의 바다로 흘러들고 있었다.

    수만 리 밖에서 해 도인이 고개를 들어 무표정하게 세 개의 태양을 살폈다.

    그 근처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흑의 부인과 거한도 놀란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고는 ‘삼양관체(三陽灌體)’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 * *

    “삼양관체! 한 가 녀석이 정말 대승기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놀란 목소리가 산맥 반대편의 어느 산봉우리 위에서 들려왔다. 늑대 가면을 쓴 요영이 한 말이었다.

    “뭐라고? 한 형이 심마의 겁을 넘어섰단 말이냐!”

    하늘에 뜬 3개의 태양이 어둑한 것을 보고 걱정스런 마음을 가졌던 은월이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이미 심마의 공간을 빠져나와 천지원기와 태양의 정기를 받아들여 새로운 육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의 실력에 대승기에 이르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겠지요. 적어도 아가씨의 조부님께서는 적수가 되지 못할 겁니다.”

    요영이 한립에 대한 걱정을 드러냈지만 은월은 그저 기쁘기만 했다.

    같은 시각 또 다른 밀림 속에서 허천우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삼양관체, 대승기 수사……! 누군가 대승기 고비를 넘으려 시도 중이었다니! 호법을 서던 이가 요족이었는데, 요족에서 오소 노조의 뒤를 이을 또 한 명의 대승기 수사가 나타났단 말인가…….”

    그녀의 중얼거림에 다른 허 가 수사들은 ‘삼양관체’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대승기 수사’라는 말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놀란 얼굴이었다.

    수행이 낮은 허 가 수사들에게 대승기 수행은 요원한 일이었고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대승기 수사를 한 번 만나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간혹 대승기 관련 소식이 전해지면 한동안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막 대승기에 이른 수사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허천우와 허 가 수사들은 마음이 요동쳤지만 은월과 요영의 감시 하에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밀림에서 대기했다.

    * * *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겨우 두 시진이 흘렀을 뿐인데 은월은 한 달은 기다린 것처럼 초조해했다. 분지의 오색 바다에서 거대 고치가 움직이며 기이한 향기가 짙게 퍼져나갔고 그윽한 향기가 더욱 농염해졌다.

    쩌저적!

    거대 고치 표면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겼다. 그 안에서 천상의 음악소리와 불경 소리가 들려왔고 금색 주술문자가 꽃잎처럼 흩날려 고치를 에워쌌다.

    쾅!

    고치가 터지고 불경 소리가 뚝 그쳤다. 주변에서 나풀거리던 금색 주술문자들도 광풍에 휩쓸려 사라졌다.

    고치가 있던 자리에 자금색 인영이 떠올랐고 자금색 인영이 발산하던 향기와 빛이 옅어지면서 드디어 한립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키가 몇 촌 가량 자란 것 말고는 얼굴이나 체격 그리고 복색이 이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몸을 살펴보고는 환호성을 터트렸다.

    대승기 수사들이 합체기 수사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재탄생한 후의 육신이 강해지는 것은 물론 법력이 몇 배로 증가하고 체내의 원영도 진정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단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원영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아직도 크기는 작았지만 성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푸르스름한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었다.

    한립은 의식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쁨에 겨워 포효했다. 포효의 울림이 파도처럼 퍼져 인근의 수목이 휘청이고 산봉우리에서는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길게 포효를 내지른 한립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멀리서 은월과 해 도인 등이 다른 이들을 데리고 분지로 날아들었다.

    “한 수사, 대승기에 이른 것을 축하합니다. 이제 수사는 제 주인이 될 기본 조건을 갖췄습니다. 몇 가지 요구들을 받아들이면 수사는 제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해 도인이 은빛을 번득이며 한립이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다.

    “해 형의 주인이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수행이 대승기에 이르렀다고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마족 성조가 진작 수사의 주인이 되었겠지요.”

    “그 조건에는 대승기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제가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도 있습니다. 마족 성조들은 충족하지 못했던 조건이고요. 지금 제 다른 요구를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랬군요. 허나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니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알겠습니다. 한 수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한립의 신중한 대답에 해 도인도 동의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대승기에 이르고 나서 눈앞의 위선뢰가 더욱 영성을 띠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은월 등이 분분히 분지로 내려왔다.

    은월은 그를 보자마자 아래위로 훑고는 활짝 웃으며 예를 취했다.

    “한 형의 대승기 진계를 경하드립니다! 이제부터 인요족은 세 분의 대승기 노조를 모시게 되었네요. 저도 앞으로는 선배님으로 대해야겠습니다.”

    “은월, 나랑 농을 하는 것이냐. 우리의 교분에 내가 대승기에 이렀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하면 될 것이야.”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고민 없이 말했다. 그 이야기에 은월이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하, 한 선배님? 선배님께서 정말 대승기에 이르신 것입니까!”

    은월 뒤에 있던 허천우가 조심스레 대승기에 이르렀다는 수사를 살피다 소리쳤다. 한립이 그제야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흑의 부인과 곱슬 수염 거한도 놀란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동천서왕 보다는 흑봉왕이 훨씬 더 경악했다. 예전에 막 합체 초기에 이른 한립을 만나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대승기에 이른 날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니 좋구만. 허 수사, 빙백 수사의 혈혼은 아직까지 잘 지내는가?”

    “정말로 한 선배님이셨습니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혈혼 선조께서는 오래전 가문을 떠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십니다.”

    허천우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고 공손하게 답했다.

    “또 실종이 되었다! 의외이긴 하지만 혈혼 분신이라도 합체기 수사의 견문을 지니고 있으니 무탈할 것이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말씀대로 무사하셔야 할 텐데요. 혈혼 선조님은 허 씨 가문이 빙백 선조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니까요.”

    허천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흑의 여인을 보고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 수사께서도 이곳에 계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자의 얼굴은 그대로입니다.”

    “흑봉 수사, 아는 선배님이십니까?”

    옆에서 거한이 의아한 얼굴로 흑의 부인에게 속삭였다.

    “한 수사……. 아니, 이제 한 선배님이 맞겠지요. 지난번 만남 이후 선배님께서 대승기 수사가 되어계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인요 양족의 큰 행운입니다! 동천 수사도 한 선배님에 대해서 들어본 일이 있을 겁니다. 인족에서 가장 빠른 수련 속도를 지닌 수사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흑의 부인이 길게 숨을 내쉬고 옆의 거한에게 귀띔해 주었다.

    “뭐라고요? 저 자가 인족의 한립!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라……. 저분이 말로만 듣던 한 선배님이란 말입니까!”

    “동천? 자네가 동천서왕인가.”

    한립은 거한이 흑봉왕보다 경지는 한 단계 낮지만 음산하고 난해한 기운을 품고 있어 모종의 강력한 공법을 익히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예, 선배님 말씀대로 저는 경서족(璟鼠族)을 맡아 관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직접 한 선배님께서 대승기에 이른 것을 지켜보다니 삼생(三生)의 복입니다!”

    안색이 수시로 변하던 동천서왕이 재빨리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우리가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수사의 몸에서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닙니다, 저는 선배님을 처음 뵙는걸요! 예전에 만보대회에서 제 화신과 접촉하신 것이 아닐지요. 제 화신은 변신술에 뛰어나 마주치고도 기억하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곱슬 수염 거한이 서둘러 변명했다.

    “그럴지도. 그런데 자네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테지? 내가 대승기에 이를 것을 알고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닐 테니 말이야.”

    한립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저와 동천 수사가 이곳에 온 것은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되었네. 자네들의 일에 큰 관심이 없으니. 그저 막 대승기에 올라 이곳에서 경지를 안정시키려 하는데 그동안 내 소식이 퍼져나가기를 원치 않을 뿐이네. 자네들은 내 동부로 가 잠시 머물도록 하지.”

    한립은 흑의 부인의 말을 막고 손을 저었다.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한 말투였다.

    “선배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흑봉왕은 입맛이 썼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동천서왕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허천우와 그녀가 데려온 허 가 수사들은 더더욱 반대할 리가 없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고공으로 손을 뻗었다.

    쉭!

    세 덩이의 커다란 꽃잎이 하강하더니 그의 머리를 맴돌았다. 놀란 수사들은 자세히 꽃잎을 살펴보고 나서야 세 마리의 거대한 금색 딱정벌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라색 무늬가 가득한 영충은 외형이 아주 흉악했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했다.

    한립은 푸른 기운으로 딱정벌레들을 회수하고는 임시 동부로 날아갔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날아올라 그 뒤를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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