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79화 (1,036/2,000)
  • 1279화. 두 요왕

    *

    바깥 세계 분지 중심.

    한립의 육신과 원영 주위에 마기가 더욱 짙어지고 이전보다 강력한 마물들이 빈번하게 다가왔다. 금빛 뇌전이 마물들을 격퇴시켰지만 공격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한 선배님께서 괜찮으실까요? 벌써 한참을 저러고 계셨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에서 주과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말거라. 한 형은 의식도 강대하고 심지가 굳은 분이라 심마겁은 큰 문제없이 이겨낼 수 있을 것이야. 도겁할 때 이렇게 많은 천외마두들이 나타난 것은 의외지만 우리가 끼어들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마 알아서 대비를 해두셨을 것이다.”

    은월은 근심어린 눈빛을 하고서도 소녀를 달랬다. 이에 주과아가 안심하고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른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해 선배님께서 어디 가셨지?”

    “강력한 존재가 두 명이나 접근해서 해 수사께서 나서서 막는다 하셨다. 나도 다른 불청객 무리를 처리하러 가봐야겠다. 앞으로 더 많은 수사들이 몰려들 테니 한동안 나와 해 수사는 돌아올 수 없겠구나. 이곳은 네게 맡길 터이니 이변이 생기면 바로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야 한다.”

    놀란 소녀의 혼잣말에 은월에 대답을 해주고 진법 원반을 꺼내 들었다. 허천우 무리가 보낸 신호가 은색 문자로 변해 떠올랐다.

    “안심하세요, 선배님. 제가 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주과아가 다부지게 답했다. 은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 * *

    어느 고공 위. 해 도인이 뒷짐을 지고 맞은편의 합체기 수사 두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은 금색 장포를 입고 두 개의 상투를 튼 거한이었다. 곱슬곱슬한 수염이 얼굴 대부분을 가렸고 진한 노란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면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른 한 명은 까만 눈썹에 눈꼬리가 긴 봉목(鳳目)과 오뚝한 코를 지닌 여인이었다. 치마를 입은 여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들 모두 요기를 발산해 합체기 요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특히 흑의 부인은 합체 후기를 대성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해 도인의 압도적인 기운에 눌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해 도인은 그들이 만나본 오소 노조보다 더욱 강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청년이 대승기 노괴라니 공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선배님을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저희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흑의 부인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자신들의 앞길을 막아선 해 도인의 존재에 놀랐지만 마기가 느껴지지 않아 그나마 안심했다.

    상대가 마족 성조였다면 두말할 것 없이 달아났을 것이다.

    “내게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너희는 지금부터 반드시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며 한 걸음이라도 이동하려 한다면 내 당장 너희를 죽일 것이다.”

    해 도인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여기에 머물라는 말씀이십니까? 앞쪽의 천기현상과 선배님이 연관이 있는 것인지요.”

    곱슬 수염 거한이 놀라 입을 열었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선배님의 분부시니 당연히 따라야지요. 천기현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꼼짝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흑의 부인이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해 도인은 말없이 시선을 거한에게 옮겼다.

    “선배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도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곱슬 수염 거한도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에 해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흑의 부인과 곱슬 수염 거한이 시선을 마주치고 각각 비행 법기를 꺼내 그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묵묵히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보기 드문 의식 비술로 몰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흑봉 수사, 저 노괴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인족 수사 같지도 않고 요족 수사 같지도 않은데 대승기 이족인이 언제부터 아무렇게나 인요족 접경지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그걸’ 노리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곱슬 수염 거한의 의식이 목소리로 바뀌어 흑의 부인의 머릿속에 울렸다.

    “동천 수사, 마족들의 침략으로 양족을 비호해주던 초대형 진법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이종족 대승기 수사가 마음만 먹으면 몰래 잠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대승기 수사에게 그것은 별 쓸모도 없어요. 아마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데 노괴가 우리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니 다행입니다.”

    흑이 부인도 똑같은 비술을 사용해 답했다.

    그들은 요족 칠요왕(七妖王) 중 흑봉왕과 동천서왕이었다. 그들은 한가롭게 천기현상을 보고 찾아든 것이 아니라 따로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내심 울적했지만 대승기 노괴 앞이라 잔머리를 굴릴 수도 없어 상대가 빨리 용건을 마치고 떠나게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멀리서 일어난 천기현상이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대승기 수사가 버티고 있으니 사사로이 끼어들 수도 없었다.

    “그건 모를 일이지요. 저 노괴에게는 별 쓸모가 없어도 합체기 후배나 자손에게 주려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빼앗기면 우리는 대승기에 이를 실낱같은 기회를 놓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동천서왕이 변한 거한이 어두운 눈빛으로 답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의 운이 나빴다 쳐야지요. 설마 대승기 노괴와 싸워서 그걸 빼앗기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노괴가 그걸 위해 이곳에 나타났다면 우리도 손을 떼야겠지요. 천기현상이 끝나면 곧 알게 될 테니 기다려 보십시다!”

    그들은 대화를 마치고 얌전히 명상에 잠겼다. 해 도인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에 떠있었다.

    산맥의 다른 쪽, 은월이 거대 늑대 법상을 불러내 새로 출현한 마족 무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거대 늑대 법상이 지나는 곳마다 마족들은 사지가 잘려나가고 피를 뿜었다.

    콰릉!

    굉음이 귀청을 때리고 갑자기 쌍두사비(雙頭四臂) 고마(古魔)가 나타나 새까만 방패로 늑대를 막아섰다. 추악한 생김새의 고마는 네 손에 묵직한 방패, 곤봉, 망치, 지팡이 마기를 들고 있었다.

    커다란 방패가 늑대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고마가 흉흉한 눈빛으로 세 팔을 휘둘렀다. 은색 늑대 회상은 낑낑거리며 나머지 마기들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다.

    법상과 의식이 연계되어 있던 은월은 순간적으로 안색이 창백해져 피를 뿜었다. 그녀의 은색 치마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합체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수많은 전투 경험을 지닌 동급의 고마와 실력차이가 났다.

    고계 마족은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틀어 검은 기운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은월 머리 위로 파동이 일고 고마가 나타나 네 보물을 동시에 휘둘렀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터라 은월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쉬익!

    바로 그때, 회색 칼날이 소리 없이 고마 뒤에서 목을 노렸다. 커다란 머리통이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핏물이 솟아올랐다. 머리를 잃은 고마는 보물들을 놓치며 쓰러졌다.

    허공에서 잿빛이 반짝이고 검은 치마를 입은 호리호리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늑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에 새까만 장갑을 껴 피부를 전혀 노출하지 않았다

    “요영, 네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가면 여인을 보고 마음이 놓인 은월이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아가씨의 호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지금부터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저와 같이 마족들을 제거하시지요.”

    “좋지. 요영이 나서준다면 남은 마족들은 한 명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은월의 말에 요영이 바로 마족 무리로 뛰어들었다. 회색빛이 번득일 때마다 마족들의 허리가 잘려 너부러졌다.

    은월도 수결을 맺어 은색 늑대 법상을 다시 응결했다. 이전 법상보다 흐릿해졌지만 평범한 마족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일다경 만에 마족 정예병 수십이 은월과 요영의 손에 몰살당했다. 멀리 산봉우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허천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합체기 수사의 실력은 그녀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 * *

    심마 속, 높은 산 정상에 위에 건립된 대전 안.

    수천 명에 달하는 경장 차림의 거한들이 열댓 개의 기다란 탁자에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면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산해진미와 향기가 그윽한 술동이가 가득했다. 가장 안쪽에 마련된 동그란 탁자에는 두 명이 따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단 장포를 입은 영준한 청년이 대청 안의 다른 수사들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한립이 앉아 있었다.

    한쪽 어깨에 노란 새를 얹은 한립은 연거푸 술을 마시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고 뒤쪽에는 녹색 장포 사내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한 사제, 우리 둘이 칠현문을 이끌며 경주에 본 문의 명성을 날리지 않았는가! 이제 다른 지역으로 세를 넓혀도 될 것 같네.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 칠현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야. 본 문이 이렇게 성장한데는 사제의 공이 가장 크니 내 한 잔 올리겠네.”

    영준한 청년이 한립을 향해 빙긋 웃고 술동이를 들어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한립이 잔을 받아들고 찰랑이는 비취색 액체를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려 사형, 정말 이걸 마시라는 소립니까?”

    “왜 그러는가. 사형이 술 한 잔 따라주는 게 문제가 되는가?”

    영준한 청년은 미소를 유지하고 반문했다. 그러나 한립은 술을 전부 바닥에 따라 버렸다.

    쪼륵!

    술이 바닥에 닿아 활활 타오르는 녹색 화염으로 변했다. 영준한 청년이 난색을 표하고 즉시 허리춤에 찬 단도를 뽑으려 했다.

    “사형의 행동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제와 숨겨 무얼 하겠나! 같은 산 아래 호랑이가 두 마리일 수는 없는 법. 칠현문은 이제 진정한 문주를 필요로 하네. 오늘 우리 둘 중 한 명만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야!”

    “넌 과연 진정한 ‘그’를 따라하지 못하는구나. 진짜 려비우가 어찌 내 포부를 모르겠으며 고작 칠현문을 놓고 이권다툼을 하겠느냐.”

    한립의 말에 영준한 청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립은 청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푸른 장검을 날려 보냈다.

    쉭!

    푸른빛이 번득이고 뒤쪽에 서있던 녹포 거한이 잘려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조각난 시체가 검은 기운으로 변해 떠올랐다.

    이를 시작으로 영준한 거한과 연회를 즐기던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명씩 연기처럼 사라졌고 마지막에는 대전 자체가 거품으로 변해 흩날렸다.

    주변 풍경이 다시 또렷해졌을 때 한립은 넓은 골목 위에 나타났다. 연기기와 축기기 수준의 인족 수사들이 그를 지나쳐 걸어가고 있었다.

    인계에서 가본 적이 있던 시장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꿈결처럼 다양한 세계를 윤회했다. 수십 년부터 수백 년까지 그는 기억을 봉인 당한 채 의심 없이 살아가곤 했다.

    그러나 윤회 속에서 언젠가는 기억을 되찾았고, 심마가 변신한 인물을 찾아내 격살한 후 그 세계를 빠져나왔다.

    바깥에서는 심마겁을 시작하고 1, 2시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립은 심마 공간 내부에서 열댓 번을 다시 살고 있었다.

    윤회가 거듭될수록 한립은 심마 세계에서 기억을 빨리 찾아갔고 더욱 빠르게 다음 세계로 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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