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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78화 (1,035/2,000)

1278화. 심마겁(心魔劫)

*

고공은 사각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고, 만 마리가 넘는 서금충들은 금색 곤충 구름을 이루어 서로 잔혹하게 물어뜯었다.

게다가 충왕 후보들은 주변 서금충들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몇 입 만에 삼켜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한립은 비술을 발동하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고공의 먹구름 속에서 ‘크크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검은 빛구슬 속에 악귀 머리 허상들이 떠있었는데 크기도 제각각이고 사람을 현혹시키는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천외마두(天外魔頭).”

한립은 더 이상 서금충 떼를 신경 쓰지 못하고 가라앉은 얼굴로 고공을 주시했다. 불시에 먹구름이 뒤집히고 천상의 음악과 함께 회백색 실이 튀어나왔다.

실들은 회색 거울 허상으로 응결해 한립이 있는 곳을 비추었다. 거대 거울의 회백색 기운을 쪼인 한립은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낀 순간 낯선 공간에 서있었다.

그는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다 자신의 몸을 보고 흠칫 놀랐다. 몸이 조금 여윈 것을 빼면 복장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저물탁도 영수환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일은 의식으로 훑은 자신의 얼굴이 열세네 살 때로 돌아가 까만 피부가 새하얗게 변해 있다는 것이었다.

“심마(心魔)의 겁이 시작되었군.”

손끝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머릿속에 사내 같기도 하고 여인 같기도 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만났구나! 네가 이렇게 빨리 지금의 경지에 이를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다. 허나 이번에는 본 마군의 본체가 친히 나섰으니 네가 진선의 환생이어도 이번 심마는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다!”

회색 하늘이 갈라지고 커다란 악귀 머리가 나타나 혀로 두꺼운 입술을 핥았다.

거대 악귀 머리는 예전에 그와 원한을 맺은 천외마군(天外魔君)으로 심마겁의 힘을 빌려 본체가 강림한 것이다.

“그런가요. 저도 당신이 멍청하게 내 앞에 본체를 드러낼 줄은 몰랐습니다.”

“뭐라! 감히 본 좌를 상대로 그따위 망발을 하다니 죽느니만 못한 고통이 뭔지 제대로 느끼게 해주겠다.”

천외마군이 격분하며 악귀 머리에서 검은빛을 일으켰다.

한립은 얼굴이 싸늘해지며 입을 벌려 소리 없이 금빛 세 덩어리를 방출했다.

금빛 덩어리는 모호하게 변했다가 악귀 머리 지척에서 나타났는데 각기둥 형태의 물건을 품고 있었다.

금빛 표면에 선홍색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퍼져 있는 물체는 창날을 닮았다.

“저건…….”

천외마군은 세 물건이 뭔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악귀 머리가 황급히 방향을 틀어 검은 안개로 변해 도망치려 했다.

“터져라.”

한립이 손가락을 들어 금빛을 가리켰다. 그러자 창날을 닮은 각기둥이 폭발해 금색 화염과 황금색 뇌전을 뿜어 악귀 머리가 변한 검은 안개를 뒤덮었다.

“안 돼! 이건 금강멸마뢰잖아. 어떻게 네가 이런 걸…….”

파직! 거리는 폭음 속에서 천외마군이 사라져 가며 비명을 질러댔다.

“재로 변하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십시오.”

한립이 냉소하며 또다시 네 개의 금빛을 분출했다.

“겨우 멸마뢰 몇 개로 본 좌를 죽일 생각이라면 꿈 깨거라!”

검은 기운이 검은 실로 갈라져 번득하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던 한립은 손끝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네 개의 금빛이 동서남북에서 나타나 검은 실을 가로막고 폭발했다. 달아난 검은 실 중 8, 9할은 금빛 속에 재가 되었고 몇 개의 가닥만이 간신히 포위를 뚫고 멀리서 악귀 머리로 응결했다.

거대하던 악귀 머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몸도 흐리멍덩해져 원기를 크게 상한 듯했다.

키하하학!

분노에 찬 악귀 머리가 고개를 쳐들고 음산하게 울부짖었다. 거대한 악귀 허상으로 거듭난 천외마군이 열손가락을 한립을 향해 휘둘렀다.

한립은 피식 웃으며 소매를 펄럭여 7개의 금색 빛덩이를 또 불러냈다. 악귀가 그것을 보고 노기가 싹 가셨는지 줄행랑을 쳤다.

멀리서 천외마군의 괴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본 좌가 네 놈에게 또 당했지만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다음번 비승 도겁을 할 때는 계면의 모든 마군들을 불러와 너를 방해할 것이다. 금강멸마신뢰를 지녔어도 절대 선계에는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할 것이야!”

말소리가 그치고 더는 악귀 머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립은 안색이 미세하게 달라졌지만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손짓을 해 일곱 빛덩이들을 불러들였는데 금강멸마신뢰가 아닌 뇌전 구슬이었다.

금색 구슬들은 완전히 가짜는 아니고 금강멸마신뢰의 미완성품이라 할 수 있었다. 합체 후기를 대성한 후 틈틈이 멸마뢰를 제련해 보았는데 제련법과 보조 재료 모으기가 너무 어려워서 금뢰죽 이파리가 충분함에도 성공률이 극히 낮았다.

그의 능력으로도 오랜 세월동안 고작 일곱 개를 완성했고 나머지 일곱 개는 만들다 만 것이었다.

그는 진작부터 대승기 고비에 어떻게 천외마군을 상대해야 할지 고민해왔다. 심마겁은 원래도 난이도가 높은데 천외마군까지 난동을 부리면 도겁할 가능성이 떨어졌다.

고심 끝에 일단 진짜 멸마신뢰로 중상을 입히고 나중에 가짜들을 잔뜩 꺼내 상대를 위협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마두를 억제하는 금강멸마뢰의 놀라운 신통에는 천외마군도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승기 고비 전에 진짜와 가짜 멸마뢰를 원신에 융합해 의식 공간에서도 꺼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모든 일이 그의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곱 개의 진짜 멸마뢰에 중상을 입은 천외마군이 또 다른 멸마뢰 일곱 개를 보고 기겁해 달아난 것은 당연했다. 아직 미완성품이지만 비슷한 기운을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외마군만 물리치면 한립은 강대한 의식으로 이후의 심마겁은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비록 천외마군이 달아나면서 협박했지만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지 모르기에 그다지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지금은 눈앞의 심마겁을 지나 대승기에 이르는 것이 먼저였다. 한립은 마음을 다잡고 남색빛을 일렁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회색 공간이 요동치고 도처에서 그를 노려보는 회색 눈들이 나타나 오색 기운을 뿜었다.

파앗!

한립은 오색 기운을 본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고 천지가 뒤집히며 푸른 산에 맑은 물이 흐르는 풍경으로 바뀌었다.

흙 내음이 가득한 시골 마을에서 그는 예닐곱 살 먹은 사내아이로 변해 낡은 무명옷을 입고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멍돌이, 검둥이, 철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라 한 눈에도 다른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먹먹한 감정이 생기려는 찰나 신비한 힘이 그의 원신에 작용해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그때 멀리서 왜소한 누군가가 익숙한 모습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데 어린 한립이 ‘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분지 중심에 한립의 육신이 누워 있었고, 정수리 위에는 금색 원영이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회색 마기에 수시로 하얗고 새까만 각종 해골과 귀신 허상들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마물들이 한립의 육신과 원영에 접근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금빛 뇌전이 튀어나가 길을 막았다. 놀란 마물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기회를 엿보았다.

* * *

멀리 산봉우리에서 은월과 주과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또 다른 산 위에는 해 도인이 눈을 감고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고공의 회색 거울은 그대로였다. 오색 기운을 반짝이는 거울에 몽롱하게 여러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울을 자세히 보아도 모든 것이 흐릿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한립의 육체와 원영을 둘러싼 마기 위로 서금충들이 아직도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이제 수백 마리밖에 남지 않았고 충왕 후보들도 상처가 가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허공에는 상처투성이인 충왕 후보들만 남았다. 마지막 서금충을 깨끗이 뜯어먹은 충왕 후보들은 멀찍이 떨어져 휴식을 취하면서 서로를 경계했다.

웽웽! 하는 소리가 울리고 이제 충왕 후보들이 날개를 펄럭여 두마리씩 붙기 시작했다. 싸움은 이전보다 훨씬 격렬하고 혹독해졌다. 수시로 딱정벌레의 다리와 날개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서금충들은 상대를 갉아대거나 금빛 실을 분출해 필사적으로 다른 서금충들을 집어삼키려 노력했다. 충왕 후보들 간의 실력 차가 비슷해 진정으로 생사가 갈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같은 시각, 한립은 촌락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붉은 천으로 장식된 방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른 아들을 낳으라는 둥 백년해로하라는 둥 덕담을 건네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문이 닫히고 목제 침상이 놓인 신방(新房)에는 한립과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가녀린 여인만 남았다.

한립이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다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침상에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옆 마을에서 온 신부였는데 아직까지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둘째 숙모가 중매를 서서 솜씨 좋고 아이를 잘 낳을 것처럼 생긴 데다 부모에게도 순종적이라 하여 돼지 한 마리와 어린 양 세 마리를 예물로 보내주고 상대의 사주팔자를 받아와 겨우 보름 만에 혼사가 성사되었다.

‘그런데 내 처의 이름이 뭐였지……. 청매? 청완? 아니 소운이었…….’

분명 아까까지 기억하고 있던 여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립은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여인이 그의 처가 될 사람이었고 앞으로 부모님처럼 자식들을 낳고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자신을 다독이며 침상 옆으로 가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마을 사람들과 웃고 떠들던 그의 머리에 온갖 이상한 생각이 들어찼기 때문이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용기를 내 여인의 얼굴을 가린 붉은 천에 손을 가져가 댔다.

고개를 숙인 여린 몸이 불안한 듯 몸을 떨었다.

한립도 어쩔 줄 몰랐지만 붉은 천을 천천히 거두었다.

시골 처자라 하얗고 고운 피부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꽤 준수한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한립은 바보처럼 미소 지으며 붉은 천을 집어 던지고 뭐라 말하려는데 돌연 단전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샘솟아 머리로 향했다.

펑!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한립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순간 굳었다. 이상하게 여긴 여인이 그를 바라보며 나긋나긋하게 불렀다.

“부군, 괜찮으세요?”

정신이 맑아진 한립은 미소를 거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인을 훑었다.

“잘 만든 환영이지만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나를 속이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야.”

그의 소매에서 푸른빛이 쏘아져 나가 여인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두 동강이 난 시체에서 선혈이 흘러나와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여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냉소했다.

“아직도 포기를 못한 것이냐? 그런 눈속임으로 나를 속이려 하다니. 나를 한참 잘못 보았구나.”

말을 마친 그가 손을 튕겼다.

콰릉!

금색 뇌전이 바닥에 쓰러진 시체 잔해로 튀어나갔다.

쾅!

여인의 시체가 검은 기운으로 변해 솟구쳤지만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금색 뇌전이 방향을 틀어 검은 기운을 정확히 맞추었다.

참혹한 비명과 함께 검은 기운 일부가 소멸되고 악에 받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기양양해 말거라! 이번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네가 심겁 안에 있는 한 난 너를 10번이고 100번이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할 수 있다. 언제고 허점을 보이면 넌 끝장나겠지!”

“난 연신술을 대성해 의식이 대승기 수사와 비견될 정도이고 심경도 안정되어 혼백과 의식이 합일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네가 내 심마(心魔)라 하나 날 동요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한립이 검은 기운을 노려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자신이 있단 말이지? 어떤 의미에서 내가 곧 너고 네가 곧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네가 지닌 감정과 기억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단 말이다! 어떤 것들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지 나보다 너를 더 잘 알 수는 없다. 으하하, 아무리 심지가 굳다고 해도 백 번 천 번 윤회를 하면서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검은 기운 속 사내가 광소를 터트렸다. 검은 기운은 한립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터져 괴이한 힘이 천지에 가득 차올랐다.

그 순간 방의 풍경이 거울처럼 쨍! 하고 깨지고 우윳빛 속에서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화조들이 자라난 뜰에 구불구불하게 돌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위치한 아치형 문에서 꽃처럼 아름다운 녹의(綠衣) 소녀가 걸어와 배시시 웃었다.

“사형! 처음으로 사매를 만난 건데 뭔가 선물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녀는 새하얀 손을 펼쳤다.

‘문부! 문채환!’

한립은 바로 그가 있는 장소와 눈앞의 소녀를 알아보았다. 그의 입이 저절로 답을 하고 있었다.

“사매는 선물로 무얼 받고 싶지?”

“음, 장신구도 좋고, 장난감이나 흥미로운 물건도 좋아요! 난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거든요. 정 안 되겠으면 은자 칠, 팔천 냥 정도만 줘도 그럭저럭 넘어가 줄게요.”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첫 만남에도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한립은 익숙한 답변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곧바로 신비한 힘이 들어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집을 떠나 칠현문(七玄門)에서 문 대인을 사부로 모시고 려비우와 이별하는 등 옛 기억들만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내게 그렇게 많은 은자가 어디 있겠어. 사매에게 다른 걸 줄게.”

한립은 무의식중에 대답을 했고,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선물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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