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6화. 진뇌겁(眞雷劫)
*
법상금신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서있었지만 두 발이 허공에서 열댓 장 정도 가라앉아 있었고 팔뚝 절반이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물 구슬들과 동귀어진 한 것이다.
한립은 깜짝 놀랐다. 범성법상의 위력에 이런 꼴이 되다니 천하중수의 위력이 정말 대단했다.
그가 수결을 맺어 범성법상의 몸에 금빛 기운을 흘려보내고 팔을 복원하자 고공에서 거대 빛덩이가 새롭게 응결했다.
까악까악! 까악!
부리에서 불씨를 내뿜는 새하얀 까마귀 떼가 빛덩이 속에서 마구 날아올라 불구슬로 변해 추락했다. 불구슬이 떨어지기도 전에 열기가 먼저 도달해 온도를 높였다.
이에 한립은 범성법상의 입을 벌려 똑같이 은색 불바다를 분출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차갑기 짝이 없는 한염(寒焰)이었다.
상반된 속성의 하얀색과 은색 화염이 충돌해 폭음을 터트렸다. 하늘에 일직선이 그어진 것처럼 얼음과 불이 고공을 뒤덮고 대치했다.
돌연 한립이 휘파람을 불고 한 손을 뻗어 검빛들을 불러냈다. 검빛들이 하나로 합쳐져 푸른 거검이 되었다. 그가 주문을 외고 수결을 맺자 푸른 거검의 크기가 순식간에 열 배로 불어났다.
범성법상은 두 손으로 거검을 잡고 고공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푸른 거검은 괴이하게 한염과 화염이 맞닿은 부분을 지나 거대 빛덩이를 갈랐다.
적홍색 빛덩이가 반짝거리다 반으로 갈라지고 그 안에서 용암처럼 새빨간 불길이 흘러나와 흩어졌다. 불바다가 사라지자 범성법상은 푸른 거검을 회수했다.
그런데 고공에서는 다시 화염들이 뭉쳐져 노란 먼지구름으로 변해 도처로 퍼져나갔다. 누렇게 하늘을 뒤덮은 먼지구름 속에서 섬뜩한 병장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립은 저절로 미간을 좁혔다. 그는 범성법상이 들고 있던 푸른 거검을 노란 운해를 향해 휘둘렀다. 눈부신 푸른빛이 운해를 갈랐지만 노란 먼지가 밀려들어 갈라진 부분을 채웠다.
72자루의 청죽봉운검이 합쳐진 거대한 칼날과 범성금신의 무서운 괴력이 안개에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운해 속에서 징과 북소리가 들리고 흙으로 빚어진 병사들이 조류와 짐승을 타고 무기를 든 채 나타났다. 용맹한 백만 병사들이 그 안에 들어있는 듯했다.
‘이런!’
헛바람을 들이킨 한립이 대책을 마련하기 전에 운해 속에서 병사들이 마구 떨어져 내렸다.
이에 범성법상은 다시 거검을 휘둘렀고 푸른빛이 병사들을 재로 만들었지만 노란 먼지가 밀려들어 다시 병사들을 만들어냈다.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수결을 바꾸었다. 범성법상이 들고 있던 푸른 거검을 던져 버리고 금빛을 일으켜 금신을 실체화했다.
수많은 금색 주술문자가 금신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세 머리가 입을 벌려 기척도 없이 하얀 파동을 발사했다. 하얀 파동이 안개 속으로 파고들며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음파가 운해 전체로 퍼져나갔고 음파가 닿는 곳마다 회색 병사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 속에서 수십만 대군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병장기를 휘둘렀다.
쇄애액!
수많은 노란빛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범성금신을 가리켰다. 삼두육비 금신이 입에서 뿜어내던 하얀 파동을 멈추고 앞으로 나와 여섯 개의 손바닥에서 기이할 정도로 굵은 빛기둥을 방출했다.
운해 아래에서 하나로 융합한 빛기둥들은 돌풍을 이루었다. 커다란 돌풍 안에서 금색 주술문자들이 미친 듯이 튀어나와 강력한 흡인력을 발생시켰다.
노란빛들이 그 힘에 이끌려 돌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허공의 노란 먼지들과 백만 병사들도 불나방처럼 돌풍 속으로 날아들었다.
안개와 인영들이 빼곡하던 하늘에 먹구름과 금색 돌풍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제야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연달아 다양한 색깔의 법결을 돌풍 속으로 날려 보냈다.
이에 쿵 소리를 내며 돌풍이 멈추고 머리통만한 황토색 구슬이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끌어와 손바닥에 올렸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무게에 깜짝 놀랐다. 하늘을 뒤덮었던 노란 먼지구름을 막대한 법력으로 압축한 물건이었으니 특수한 보물을 제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천지원기가 요동치고 고공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분지 상공의 먹구름이 좌우로 갈라져 거대한 구멍을 드러냈고 그 안에서 은색 뇌전들이 요란하게 빛을 반짝였다. 마치 뇌전으로 이뤄진 세계가 강림하는 것 같았다.
“진뇌겁(眞雷劫)!”
한립이 진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구슬을 회수하고 열손가락에서 법결들을 뿜어 남은 진법에 흡수시켰다.
웅! 우웅! 웅!
사방에서 진법이 빛을 뿌리고 두꺼운 보호막들을 만들어냈다. 눈에 띄는 것은 세 극산이 드디어 소리 없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극산들은 삼각 구도를 이루고 한립을 보호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한립은 검결을 맺었다. 72자루의 푸른 비검들은 극산 아래에서 거대한 연꽃을 피워냈다.
그는 무척 긴장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승기 천겁은 십중팔구 이전의 오행의 겁이 아니라 그 뒤에 나타나는 진뇌겁을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비를 넘다 사망하는 수사들 대부분 진뇌겁에 당해 목숨을 잃었다.
심겁(心劫)도 무섭지만 이겨내는데 실패해도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진뇌겁은 요행히 관문을 통과하거나 천뢰의 위력에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두 갈래 길밖에 없었다.
* * *
멀리 산봉우리 위에 은월, 주과아, 해 도인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월의 얼굴은 맑은 물처럼 평온해 어떤 염려도 느껴지지 않았고 주과아는 한립이 오행의 겁을 이겨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해 도인은 뒷짐을 지고 담담히 분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주시했다. 그가 언뜻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은월도 뭔가를 감지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황량한 곳에도 수사들이 있었다니, 일단 저들을 쫓아 보내야겠다.”
은월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주과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머뭇거리다 결국 산봉우리에 남았다.
만 리 밖 저공에서 두 무리의 둔광이 앞 다투어 한립이 도겁 중인 분지로 날아들고 있었다.
앞쪽 무리는 대략 십여 명으로 공법과 기운이 인족 수사들 같았고 대부분 원영기 수사에 가장 앞에서 날아가는 여수사만이 화신 후기였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반짝이는 눈을 지닌 여인은 남색 궁장 차림을 하고 수시로 뒤쪽을 살피고 있었다.
뒤에서 추격 중인 또 다른 무리는 둔광이 검은색 또는 회백색으로 수행이 그리 낮지 않은 마인들이었다.
마족 정예병들은 화신기 이상이 절반이 넘었고 부대를 이끄는 우두머리급은 뱀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연허기 거한이었다.
수행의 차이로 인족의 무리와 추격병들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궁장 여인은 추격병 무리가 접근해오자 이를 악물고 하얗고 투명한 솥을 불러냈다.
솥을 때리자 솥뚜껑이 날아가 그 안에서 수정실들이 솟아올랐다. 가느다란 하얀 실들은 기이한 한기를 머금고 마족들을 뒤덮었다. 이에 마족 병사들 중 원영급 수사 둘이 가슴이 뚫려 얼음덩어리로 변해 추락하고 말았다.
우두머리인 뱀 머리 마족이 분노해 입에서 암녹색 안개를 분출했다. 하얀 실들이 암녹색 안개에 닿자 부식되듯 녹색으로 물들었다. 실들은 더 이상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뱀 머리 마족은 열댓 개의 검은색 갈퀴를 날려 하얀 실들을 쳐냈다. 놀란 궁장 여인이 작은 솥을 거두고 몸을 피하려 했으나 늦고 말았다.
뒤쪽의 마족 두 명이 마공을 발동해 인족 수사들 앞을 막아선 것이다.
궁장 여인이 난색을 표하며 어쩔 수 없이 명을 내려 둥글게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인족 수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마족 병사들 중 뱀 머리 마족의 입에서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열댓 개의 검은색 갈퀴가 날아들며 마족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궁장 여인은 절망스러웠지만 억지로 의지를 북돋았다. 얼굴에 기이한 붉은 기가 떠오른 그녀는 가문의 비술을 사용해 마족 우두머리와 동귀어진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수결을 맺기 직전, 고공에 파동이 일고 은색의 호리호리한 인영이 나타났다. 이에 인족 수사들과 그들을 포위한 마족 병사들이 모두 움찔했다.
“마족들이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은빛이 번지자 여인의 몸에서 은빛 수정실들이 뻗어 나갔다. 마족 병사들은 당황해 마공으로 보호막을 만들거나 급히 방어 보물을 발동했으나 수정실은 개의치 않고 마족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족들은 픽픽 쓰러지며 추락했고 그 속에는 우두머리 뱀 머리 거한도 있었다. 그는 추락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족 수사들을 추격할 때만해도 손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는데 목숨을 잃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궁장 여인과 다른 인족 수사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궁장 여인이 무리를 이끌고 고공의 인영을 향해 예를 취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선배님이 나서주시지 않았으면 저와 허 가 자제들은 마인들의 악독한 수에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허 가? 빙백 선자가 있는 그 허 씨 가문 말이냐?”
“저희 가조를 아십니까? 저희가 바로 빙백 선조님의 후인들입니다!”
허공의 인영이 의외라는 듯 반문하자 궁장 여인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빙백 선자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분이 너희 가문 선조와 인연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쩌다 마족 병사들의 추격을 받게 된 것이냐?”
은빛을 거둔 인영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분지 근처에서 공간을 넘어 날아온 은월이었다.
그녀는 한립과의 대화를 통해 빙백선자와 허 씨 가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낯선 인족 화신기 수사였다면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와 인연이 있는 분을 알고 계신다고요? 그분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분일지 몰라서 말입니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궁장 여인의 공손한 물음에 은월이 대답대신 질문을 던졌다.
“저는 허천우라고 합니다.”
궁장 여인은 한립이 천연성에서 알게 된 ‘허 선자’였다. 세월이 흘러 화신 후기에 이른 그녀가 어쩌다 족인들을 이끌고 이런 황량한 곳까지 쫓겨 왔는지 알 수 없었다.
“허천우! 외모도 그러하고 과연 그 허 가 자제가 맞구나. 그렇다면 너희는 잠시 내 분부에 따라야겠다. 주변에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순찰을 돌도록 하거라.”
“선배님을 도울 수 있다면 저희의 영광입니다만, 수행이 미천하여 선배님의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됩니다.”
“괜찮다! 부적을 나눠줄 테니 감당하지 못할 적을 만나면 억지로 상대하지 말고 부적을 발동하거라. 내가 바로 올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은월의 말에 허천우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에 은월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장 여인에게 몇 마디 더 하려다 뒤쪽에서 들려온 굉음에 서둘렀다.
“부적을 잘 챙기거라. 난 일이 있어 바로 가봐야겠다.”
은월은 소매를 털어 여러 장의 은색 부적을 날리고 둔광을 일으켜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천우는 부적들을 받아들고 둔광이 사라진 곳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허 가 자제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선배님의 분부는 너희도 들었을 것이다. 즉시 다섯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순찰을 돌기 시작하되 절대 깊은 곳까지는 진입하지 않는다.”
“예!”
허 가 수사들이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천우야, 조금 전 선배님의 표정과 행동이 이상하지 않더냐? 게다가 멀리서 들려온 소리와 진동은 또 무엇이고. 괜한 일에 휘말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리 속에서 노인이 앞으로 나서 말했다.
“당형(堂兄),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제 와서 선배님의 명을 거부하고 떠나려 한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마족 병사들에게 쫓기는 우리를 구해주셨는데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요. 또한 이번 여정은 제가 이끌기로 했으니 모든 결정도 제가 내리겠습니다. 당형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허천우가 얼굴을 굳히며 노인을 나무랐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모두 당매의 말에 따를 테니 염려 말게.”
그녀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결국에는 예를 갖추어 답했다.
그걸 지켜보는 다른 허 가 수사들의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아무도 허천우의 명을 어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세 조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네 명의 허 가 제자들을 데리고 차분히 비행하던 허천우는 멀리서 눈을 찌를 듯한 빛이 번득이다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잠시 지켜보다 고개를 돌리고 순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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