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3화. 진안(陣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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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노란 목재로 세워진 평평한 탑 위였고 그 끝부분에 커다란 비취색 대전이 세워져 있었다. 대전 입구에는 열댓 명의 무장한 목족 병사들이 서있었다.
“한 선배님, 대장로께서 대전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목족 청년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한립은 의식으로 대전 안을 살펴 약하지 않은 기운들을 몇 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곧장 청년을 따라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 앞 목족 병사들은 목족 청년을 알아보고 길을 내주었고, 한립에게 발산되는 엄청난 영기의 압력에 경외심을 드러냈다. 종족은 달라도 진정한 강자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지나가던 한립이 입술을 달싹여 뒤따르던 해 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에 도인이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쥔 채 대전 문 한쪽으로 걸어갔다.
목족 병사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한립은 곧 목족 청년을 따라 긴 회랑을 지난 다음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대청 안에는 세 명 밖에 없었다.
상석에 앉은 보라색 머리카락의 목족 노인은 합체 후기의 수행을 지녔고 마른 몸에 녹색 장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절반은 은이고 나머지는 금으로 이루어진 요대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목족 노인 좌우로 은색 갑옷을 입은 목족 거한과 키가 크고 마른 흑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둘 다 합체 중기 수사였다.
거한은 체구가 굉장히 우람해 다른 목족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컸는데 이마의 깊은 주름과 생기 없는 눈빛이 어딘가 힘이 없어보였다.
흑의 소녀는 머리에 검은 색 뿔이 두 개나 솟아 있었다. 얼굴은 수려한데 표정이 냉랭하고 차가웠다.
그가 들어오자 대화를 나누던 세 사람은 동시에 말을 멈추고 눈길을 보내왔다.
“한 형이시지요. 노부, 막 선배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력이 대단하시다고요? 이번 전투에 한 형의 도움을 받다니 본 족의 복입니다!”
목족 노인은 한립의 수행을 확인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일어났다.
“한 수사, 저는 초질이라 합니다!”
“한립 수사시군요. 수행 상으로 저와 초 수사보다 훨씬 강하시네요. 저는 야차족의 비소석이라 합니다.”
나머지 둘도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앉아서 말씀 나누실까요? 안 그래도 진안을 지키는 일로 상의 중이었습니다. 초 수사와 비 선자께서 한 형과 한 조를 이루어 진안 중 한 곳을 공동으로 수호하게 될 것입니다.”
목족 노인이 웃는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한립을 안내한 청년은 노인의 눈짓에 진작 대청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초 수사와 비 선자의 도움이 있으면 제가 진안을 지키기 훨씬 수월할 듯합니다.”
한립은 자연스럽게 초질과 비소석을 그를 보조할 사람처럼 일컬었다. 수행에서부터 그가 높았기에 나중을 대비해 일부러 태도를 확실히 한 것이다. 목족 거한은 눈을 번득이고 말았지만 흑의 소녀는 들릴 듯 말 듯 코웃음을 쳤다.
“하하, 세 분이 힘을 합치면 진안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진안을 지키는 것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목족 노인이 말을 멈추고 세 수사를 둘러보았다.
“또 다른 임무요? 본 족 대장로께 들은 바가 없는데요. 설마 목족에서 임으로 결정한 사항은 아니시겠죠?”
“물론 아닙니다. 사실 두 번째 임무는 때가 되면 초 수사가 맡아서 하면 되고 한 형과 비 선자는 진안을 보호해주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흑의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드러내자 목족 노인은 개의치 않고 해명했다.
“초 수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저희에게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하하, 별 건 아니고 목계절진의 일부 정교한 변화는 세 곳의 진안에서 힘을 끌어와야 해서요. 누군가 진안을 조종해 진법의 힘을 보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안의 변화 법결을 초질 수사 등 세 명에게 전수했고 그들이 진안의 힘을 발동하는 동안 다른 수사 분들이 호법을 서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목계대진은 본래 목족의 것이니 진안 조종도 당연히 귀족의 수사가 맡아서 하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목족 노인의 말에 한립과 흑의 소녀가 수긍했다.
“두 분이 힘이 되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절진 설치가 끝나는 대로 두 번째 진안의 안위는 세 분만 믿겠습니다.”
목족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세 수사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한 장로.”
“최선을 다하지요.”
한립 등 세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인사를 했다.
그 후 목족 노인이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각 수사에게 목계절진의 금제 변화가 담긴 옥간을 나눠주었다. 그들이 미리 숙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누군가 진안으로 쳐들어오면 금제의 힘을 이용해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고 명을 내려 그들을 거대 구름 위에 위치한 임시 거처로 안내하게 했다. 목면성에서 절진을 설치할 곳까지는 꽤 거리가 있어 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안배한 것이다.
쿠르릉!
반나절 후, 열댓 개의 거대 구름들이 수천 개의 비차와 전함들을 이끌고 목면성을 출발했다.
* * *
십여 일 후, 푸른 거대 구름 위.
한립이 높은 탑에 서서 무표정하게 녹음이 푸른 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쪽에 선 비소석과 초질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순찰하는 백여 개의 비차와 전함을 제외하면 다른 거대 구름이나 비행 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산맥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그 중 높다란 산봉우리 위로 둔광들이 날아다녔다. 수풀과 바위 사이로 여러 명이 모여 탑을 쌓고 있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석탑들은 은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모두 청록색의 깃발이 꽂혀 영기를 발산했다. 섬세한 사람이라면 석탑들이 산맥의 영맥을 따라 설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골짜기에서는 거목들이 미친 듯이 자라나 눈을 깜빡일 때마다 커지는 것 같았다. 이 경천거목들은 인근의 산봉우리와 비슷한 높이로 자라났다.
그리고 거목들 주변에 녹색 진법이 그려져 있었는데 백여 명의 원영기 수행을 지닌 목족인들이 진법 속에서 수결을 맺고 앉아 있었다.
이에 산골짜기의 거목과 산봉우리의 거탑들이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산맥 주변의 천지영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였고, 그 덕에 허공에 거대한 무지개가 뜬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더욱 높은 곳에서 일대를 조망했다면 이런 진법이 무려 36개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미묘한 배열과 기운 때문에 지켜보는 이들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초대형 진법 범위 내의 천지원기가 몰려들수록 맹렬하고 사나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진안은 며칠 내로 완공될 겁니다. 때가 되면 이 청광도(靑光島)를 타고 하강한 후, 모든 방어 금제를 발동해 만전을 기하도록 해야 합니다.”
푸른 구름 위에서 한립이 입을 열었다.
“그래야지요! 그런데 목계절진의 설치가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듣기론 다른 두 곳의 진안은 여기보다도 진행 속도가 느리다고 하던데요. 시간을 지체하다 대사를 그르칠 일은 없겠지요?”
비소석이 그런 한립을 힐끗 보고 냉랭히 말했다.
“어제 전달받은 소식에 따르면 마족 대군과의 전투가 막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계획대로 마족 대군을 목계절진으로 유인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십여 일은 걸릴 것이고요. 저는 오히려 목계절진의 위력이 마족 대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지가 걱정입니다.”
“그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목계삼십육천절진은 예비용 성수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는데, 성수를 36그루나 심어놓았으니 그 위력이 몇 배로 증폭될 겁니다. 대승기 수사라도 홀로 이 안에 갇히면 쉽게 벗어날 수 없으니 평범한 마족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초질이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목족이 예비용 성수까지 희생해가며 설치한 진법이니 그 위력이 대단하겠지만, 마족도 얕볼 상대는 아닙니다. 특히 마족 성조들은 하나하나가 마공에 정통하고 많은 화신들을 데리고 있어 상대하기 쉽지 않고요.”
침음하던 한립은 우려를 드러냈다.
“성조들이야 본족 대장로와 귀 족의 막 선배님께서 계신데 저희가 걱정할 필요 있나요?”
“하하, 상 선배님께서 마족 성조의 본체는 막아주셔도 그들의 화신들까지 붙들어 주시겠습니까? 마족에서 진안의 존재를 눈치 챈다면 파훼하기 위해 성조 화신들을 보낼 겁니다.”
비소석의 냉소에 한립이 미소로 답했다.
“성조 화신이요?”
초질과 비소석 둘 다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성조 화신과 겨뤄보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립이 미세한 표정변화를 알아차리고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마족들이 떼거지로 몰려왔을 때 엇비슷한 수행의 족인과 성조 화신을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동료는 죽고 저는 중상을 입고 죽다 살았지요!”
목족 사내의 표정이 드물게 사나워졌다.
“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많은 벗들이 그들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언젠가 그 놈들을 마주친다면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비소석의 얼굴 역시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다.
“비 선자, 홀로 성조 화신들과 마주치면 당장 달아나는 것이 최선입니다! 괜히 아까운 목숨 잃기 전에요.”
그 말에 목족 거한이 씁쓸하게 충고 했지만 비소석은 언제나처럼 작게 코웃음을 치고 대답하지 않았다.
“초 수사께서는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목계절진이 수사의 말처럼 현묘한 위력을 지녔으면 금제의 힘을 빌려 충분히 성조화신과 싸워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일대일의 상황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너무 많이 몰려오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지요.”
한립이 담담하게 말했다.
“준비해 두신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초질이 눈을 빛냈고 비소석도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두 번째 진안을 지키기 위해 파견을 나왔으니 당연히 이런저런 준비를 해왔습니다. 예상 밖의 강적을 만나면 통할지 모르겠지만요.”
한립이 턱을 긁적이며 대충 대답했다.
“미리 다른 방법을 강구해 두셨군요! 그렇다면 훨씬 안심이 됩니다.”
목족 거한이 한결 편한 안색으로 말했다.
“마족 성조 화신들에게 대해 잘 알고 계신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한 수사께서도 그들과 싸워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습니다.”
비소석의 돌발 질문에 한립이 평온하게 대꾸했다.
“결과는요? 성조 화신들은 평범한 합체 후기 수사들보다 훨씬 강하다던데요?”
눈을 반짝인 비소석이 거침없이 캐물었다.
“두셋을 죽여 보기도 했고, 어떤 화신에게는 오랫동안 쫓기기도 했습니다.”
한립이 내놓은 답에 야차족 소녀와 목족 거한이 입을 벌렸다.
“한 형께서 성조 화신을 죽여 보셨다고요? 아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인족 대군을 통솔해 성조 화신을 포위해 사살한 것이로군요!”
초질은 자신의 질문에 답을 찾아내곤 만족스러워 했다. 비소석도 똑같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합체 후기 수행을 지닌 한립이 대군을 이용해 상대를 몰아넣으면 성조 화신 한명 쯤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하, 모두 지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에 하나 성조 화신이 여럿 나타나면 두 분은 진법의 힘을 빌려 한 명만 맡아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수사께서 생각이 있으시다니 저는 한 형만 믿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초질은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주 정중하게 답했다. 이번 진안 보호 임무의 책임자로 한립을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상대가 홀로 성조 화신을 격살했든 병사들의 힘을 빌렸든 그들 앞에서 성조화신을 죽여 보았다고 했으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 틀림없었다.
“수사께서 다른 성조 화신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면 저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네요.”
비소석도 고민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이 저를 믿어주신 만큼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한립이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그는 두 번째 진안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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