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0화. 목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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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선 은월은 굽이굽이 통로를 돌다 걸음을 멈추었다.
“요영, 나와 봐! 물어볼 것이 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투명한 그림자가 나타나 점점 또렷하게 변하더니 마지막에는 검은색 장포를 입은 여인이 되었다. 늑대 머리에 청동 가면을 쓴 여인은 두 손에 검은 장갑까지 껴서 맨살을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아가씨, 분부가 있으십니까?”
“한 형과 조부님께서 대화를 나눌 때 대청 안에 있었겠지? 그때 의식 비술 외에 오간 이야기가 있었더냐. 숨김없이 말하거라.”
“오소 대인께서 계약을 아가씨에게 넘겨주었으니 저는 아가씨만의 그림자 호위입니다. 당연히 그 무엇도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오소 대인이 한 수사에게 처음 제안한 것은 의식 비술이 아니라 아가씨를 부인으로 맞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혼사를 승낙하기만 하면 대승기에 이른 경험과 심득을 전수하는 것은 물론 평생 모은 보물의 절반을 혼수로 보낼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한 수사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그 대신 의식 비술로 아가씨를 돕는 것에만 동의하였습니다.”
“과연 조부님께서 그리하셨구나. 나와 한 형의 혼사가 성사되면 심경 상의 허점을 보완할 수 있을 거라 여기셨던 게야. 하지만 이번만은 조부께서 틀리셨다. 한 형의 성격에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도 없고, 그가 그런 선택을 했다면 나도 실망했을 것이야. 거절당한 조부님의 안색은 어떻더냐?”
“한 수사도 평범한 합체 후기 수사가 아닌지라 오소 대인도 별말은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겠지. 한 형은 조부님과 막간리 선배 이후로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가장 큰 존재이자, 인요족이 영계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불편하셨더라도 그에게 불리한 일을 벌이시지는 않을 것이야. 요영, 이제 물러가도 좋다.”
“예, 아가씨!”
가면 여인은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모호하게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홀로 남은 은월은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곳을 떠났다. 곧 망정결이 발작할것이라 서둘러야 했다.
* * *
밀실 안, 한립도 오소 노조와의 대화를 회상하고 있었다. 대청에서 요족 대승기 존재는 은월의 혼사얘기를 꺼내며 그가 놀랄 만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은월의 명의상의 부군이였던 천규랑왕이 수십 년 전 마족과의 전투에서 마존들에게 기습을 당해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소 노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립을 보자마자 은월과의 혼인을 제안한 것이다.
한립은 당연히 완곡하게 거절했다. 은월에 대한 그의 마음은 4할은 벗이었고, 4할은 오누이 같았으며 남녀 간의 연모의 정은 2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소 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소 노조가 창안한 의식 비술이 마지막까지 은월의 망정결을 해결하지 못하면 따로 방법을 찾아 그녀를 도울 생각이었다.
마음을 정한 그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한립은 선박의 밀실에서 오소 노조에게 받은 의식 비술을 수련했다.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저절로 망정결을 억제하는 의식 파동이 발산된다고 했다.
물론 수련하는 자의 의식에도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전문적으로 의식을 강화하는 비술보다는 효과가 떨어졌다.
한립은 수련을 시작하고 오소 노조가 말했던 것만큼 비술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익히기가 아주 수월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나중에 차분히 생각해 보니 연신술을 수련한 덕이었다. 연신술과 같은 선계 비술도 대성했는데 평범한 의식 비술은 비교적 쉽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겨우 두 달 만에 그는 의식 비술의 앞부분을 몇 성 정도 익혀냈고, 그러는 동안 은월은 망정결의 발작 시간이 아닐 때마다 수차례 그를 찾아와 한참을 머물다 떠나곤 했다.
이렇게 선박은 무탈하게 이동해 연합군이 통제하는 목족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오소 노조의 명에 따라 선박은 멈추지 않고 연합군 본부가 있는 ‘목면성’까지 날아갔다.
가는 길에 적잖은 순찰 부대들을 마주쳤지만 다들 오소 노조의 비행 보물을 알아보고 멀리서도 예를 취했다.
* * *
보름 후, 거대한 열댓 개의 거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륙천 장의 높이에 너비만 삼사십 장되는 청록색 경천거목(擎天巨木)은 보물처럼 은은한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거목들을 받침대 삼아 십여 개의 층으로 나뉘는 거대 성이 건설되어 있었다. 목재를 겹겹이 쌓아 만든 성은 돌이나 기와 등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각층의 높은 목재 성벽 위에는 다양한 생김새의 병사들이 서있었다. 이곳이 연합군이 주둔하는 목면성 군영이자 이전에는 목족이 두 번째로 중시하던 거대성이었다.
은색 선박을 발견한 성벽 위 병사들이 갑자기 부산스럽게 날아올라 다가왔다.
“노조께서 성으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다양한 색깔의 갑옷을 걸친 결단기 수사들이 멀리서 황급히 대례를 올렸다.
“노부는 동부로 먼저 갈 것이니 너희는 하던 일을 계속하거라.”
선박 안에서 오소 노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존명!”
수만 년간 위세를 떨친 오소 노조는 요족 수사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수사들이 좌우로 갈라져 길을 트고 은색 전함이 그사이를 지나갔다.
허공의 다양한 색깔의 금제들도 분분히 통로를 만들어 선박은 멈추지 않고 거대 성의 최상층에 위치한 광장에 이를 수 있었다.
우웅!
경비가 삼엄한 광장 한쪽에서 전송진이 빛을 발하고 백발노인이 전송되었다. 인자한 얼굴에 기다란 귀를 가진 노인은 걸음을 뗄 때마다 공간을 뛰어넘어 선박으로 다가왔다.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뒤늦게 노인을 알아보고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흐허허, 오소 수사 이제야 돌아오십니까! 더 늦어졌으면 수사가 마족 땅에서 뼈를 묻은 줄 알았을 것입니다.”
걸음을 멈춘 백발노인이 시원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족 놈들이 본 좌를 어쩔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더 늦게 돌아왔으면 걱정은커녕 막 수사에게 욕이나 먹었겠지요.”
오소 노조의 카랑카랑한 대답이 들려오고 선박이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선박이 은빛 속에 사라지자 여러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노인은 여러 수사들의 등장에 내심 움찔했으나 겉으로는 밝게 웃어 보였다.
“오소 형, 인요족이 진퇴(進退)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정말 요족 노조인 수사에게 문제가 생기면 저 혼자 어찌 버티겠습니까.”
“그 말은 진심이라 믿겠습니다.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당장 죽어나가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최소한 이번 마겁은 지난 후에 걱정할 일입니다. 아, 한 수사 막 노괴에게 인사하게. 인족의 선배인데 모르지는 않겠지.”
노인과 몇 마디를 주고받은 오소 노조가 한립을 불렀다.
“막간리 선배님의 위명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한립이 막간리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립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오소 노조가 백발노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인족에서 대승기 수행을 지닌 것은 막간리 하나였다.
“한립! 우리 인족에서 천년 만에 합체기에 이렀다는 수사가 아닌가. 농 가 녀석과 마계에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돌아온 모양이군.”
막간리도 한립의 이름을 듣고 희색을 드러냈다. 그 역시 한립의 행적을 꿰고 있었다.
“막 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막 마계에서 돌아와 목족 지역에서 우연히 오소 선배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한립은 뜨끔하면서도 얼른 대답했다.
“허허, 마계에서 그리 오래 머물다 무사히 돌아오다니 만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인족의 기재 답구만!”
“막 노괴, 벌써 그리 좋아할 것 없습니다. 저쪽의 수사가 누군지 알아보겠습니까?”
막간리가 한립을 칭찬하는데 오소 노조가 끼어들어 해 도인 쪽을 눈짓했다.
“수사는……. 엇, 기운이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보았는지 모르겠군요.”
막간리가 해 도인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하하, 자세히 좀 봐보세요.”
오소 노조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오소 형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뭔가 있다는 것인데요. 피와 살을 지닌 육체가 아닌……. 아, 마계의 그 성해!”
호기심이 생긴 막간리가 눈동자에서 금빛을 반짝이고는 놀라 소리쳤다.
“저도 당신을 알아보겠습니다. 수만 년 전 영계의 다른 수사들과 마원해에 와서 고령도에 진입하려다 뇌해 금제를 통과하지 못하고 중상을 입고 되돌아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해 도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정말 해 형이셨습니다! 어쩌다 사람의 모습으로 마원해를 떠나 영계까지 온 것입니까? 게다가 수행은 어쩌다 합체기로 떨어져 있고요.”
그 말에 계면쩍어하던 막간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막 노괴는 모르겠지만, 해 형은 한 수사와 인연이 닿아 계약을 맺고 한동안 한 수사 곁에 머물기로 했답니다.”
눈을 빛낸 오소 노조가 먼저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런 일이! 한 수사 사실인가?”
막간리가 놀라 한 수사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졌다.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계약을 맺은 것은 사실입니다. 해 형의 수행이 떨어진 것은 일전에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느라 그런 것이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 수행을 회복할 것입니다.”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주 잘 되었군! 해 도인이 마계에 머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계의 강자들이 그를 얻고 싶어 했는지 모르네. 대승기 노괴들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한 수사가 해내다니 우리 인요족의 미래가 밝다고 볼 수 있겠어.”
그가 인정하자 막간리가 무척 기뻐했다.
“또 다른 소식을 들으면 기뻐서 날뛰겠습니다.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수사의 거처로 가서 마저 이야기합시다.”
그걸 본 오소 노조가 눈을 흘겼다.
“더 좋은 소식이 있단 말입니까? 가십시다, 노부의 임시 동부에 목족인들이 보내준 선엽주(仙葉酒)가 두 병 있으니 맛이나 보면서 이야기하시지요.”
두 눈을 번쩍 뜬 막간리는 흥겹게 답했다. 한립도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고 다 같이 광장의 전송진에 올랐다.
* * *
반 시진 후, 보라색 목제로 만들어진 대청 안.
막간리가 주인 자리에 앉고 오소 노조와 한립, 해 도인이 측면에 앉았다. 은월과 주과아는 그들 뒤에 손을 모으고 서있었는데 한 명은 담담한 얼굴이었고 한 명은 들뜬 기색이 가득했다.
이때 한립은 호박 색깔의 진득한 영액을 마시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자 정순한 힘이 온몸으로 퍼져 따뜻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좋은 술입니다.”
“선엽주는 목족 성수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받아 빚는 술이라 목족 전체를 통틀어 100병 밖에 없다네. 이번에 한 수사와 해 형이 아니었으면 아까워 내놓지도 못했을 것이야.”
한립의 칭찬에 막간리도 술잔을 털어 넣으며 웃음 지었다.
“목족의 성수는 원래 목족 금지안에 있었는데 마족들의 침입으로 어쩔 수 없이 목면성에 옮겨 심어야 했네. 원기가 적잖이 상하고 말았지.”
오소 노조가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 그뿐입니까. 목족 대장로도 대승기 경지를 되찾으려 성수 안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노부의 생각에는 쉬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대승기 경지를 되찾는다고 해도 이번 마족과의 전쟁에는 힘을 보태지 못할 것이고요.”
목족 대장로 이야기에 막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목족의 최상급 전력은 마족들에게 거의 제거를 당한 상태가 아닙니까. 다른 종족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큰 기대는 마십시오.”
“목족이 앞으로 영계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것도 마족들을 물리친 다음에 생각할 문제지요. 우리와 크게 상관도 없고요. 오소 수사, 또 다른 소식이란 것이 무엇인지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하, 수사의 동부에서 누가 엿들을까 걱정할 것도 없으니 말해 주겠습니다. 막 노괴, 한 수사가 마계에서 세령지에 들어가 정령련을 복용했다 합니다! 이는 수사와 나도 못해낸 일이에요.”
“뭐라고요?”
오소 노조의 말에 편안히 의자에 앉아 있던 백발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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