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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59화 (1,016/2,000)

1259화. 대화

*

은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립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오소가 그런 둘의 표정을 씁쓸하게 살피다 은월이 보이지 않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수사, 영롱의 출신과 자네를 만나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영계로 돌아온 후에는 줄곧 선배님 곁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고요.”

“그렇다네. 저 아이는 인계에서 돌아와 본족으로 돌아가지 않고 노부가 폐관 수련하는 곳에서 칠일 밤낮을 꿇어 앉아 있었지! 하아,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네. 되돌려 보내려다 어쩔 수없이 금제를 열어 들어오게 했는데, 그 수척한 모습이…….”

오소 노조는 탄식하듯 낮은 목소리로 그간의 일을 들려주었다.

시간은 흘러가는 데도 그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가끔은 은월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일상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는데 한립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듣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위태로운 시기는 넘겼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마계로 임무를 수행하러 오면서도 데려온 것일세. 그런데 마계에서 생환하는 자네를 우연히 만날 줄이야! 정말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인가 싶네.”

거의 한 시진을 이야기한 오소 노조가 드디어 말을 마쳤다. 한립이 그제야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영롱 수사가 저를 대하는 태도는 망정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공법에 의지해 합체기에 이른 후에야 오소 선배님께서는 영롱 수사의 체질이 공법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셨고요. 망정결을 극성으로 익히면 오히려 법력의 반서를 당해 수행과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데, 이대로 수련을 멈추면 수행이 높아지기는커녕 점점 실력이 퇴보하게 되고요. 계속 수련하든 수련을 멈추든 후환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게 다가 아닐세. 체질 때문인지, 망정결의 앞부분을 몇 성만 익혔을 뿐인데도 부작용이 생겼다네. 하루의 3분의 1정도만 간신히 본성을 유지하고 나머지 시간은 망정결의 영향을 받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 공법을 심도 있게 익힐수록 본성을 유지하는 시간이 짧아지다 결국에는 철저히 변하고 말걸세.”

“그렇다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어쩐지 원살과 대치할 때 만난 사람과 지금은 또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수사가 볼 때 사람의 심경이 매일 극심한 변화를 겪는 것이 좋은 일 같은가? 심지가 굳지 않은 자였으면 벌써 오래 전에 의식이 분열되어 광증이 찾아왔을 것일세. 며칠에 한번 내 직접 마음을 안정시키는 술법으로 영롱의 의식이 입은 손상을 보충해 왔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야.”

희색을 드러낸 한립을 보고 오소 노조가 고개를 저었다.

“선배님께서 영롱 선자를 위해 준비하신 공법인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셨는지요? 대승기 수사이신 선배님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합니까?”

안색이 달라진 한립이 서둘러 물었다.

“영롱은 내 직계 혈통일세.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무엇이든 해주었을 것이야! 아이가 칠성월체를 각성하지만 않았어도 방법이 있었을 텐데 하필 그 체질이 망정결과 상극이라 손쓸 도리가 없었네.”

오소 노조는 고민하다 오랫동안 비밀로 해왔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칠성월체.”

한립이 그 말에 한동안 말이 없는데 해 도인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해 수사, 이 체질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오소 노조가 물었다.

“이전 주인께서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특수한 체질이라 진선계에서도 찾기 어렵다고 하였지요.”

“위선뢰를 제련할 수 있는 해 수사의 전 주인께서도 선계에서 실력자였을 겁니다. 칠성월체에 대해 아실만 하지요. 영계에서도 이런 체질을 지닌 자는 극히 드뭅니다. 노부가 영롱을 중시하는 까닭도 칠성월체를 지녀 충분히 대승기에 이를 자질이 있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칠성월체를 지녔다면 다른 수사들보다는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해 도인은 입을 다물었다.

“……오소 선배님께서는 영롱 선자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하셨지만 듣자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그제야 침묵을 깬 한립이 오소 노조를 향해 물었다.

“역시 수사가 옛정을 생각해 도와줄 줄 알았네! 망정결이 아이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오랜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는데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일세.”

오소 노조가 돕고 싶다는 그의 뜻을 읽고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한립은 인계에서 은월과 함께한 나날들을 떠올리며 길게 숨을 내쉬며 약속했다.

“해 형, 잠시 한 수사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오소 노조는 바로 방법을 밝히지 않고 해 도인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청했다. 해 도인은 자연히 한립을 쳐다보았다.

일거수일투족을 한립의 명대로 따를 필요는 없었지만 정기적으로 그에게 녹색 액체를 지급받다보니 무의식중에 상대의 의견을 반영해 움직이고 있었다.

“해 형, 바깥에서 잠시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한립도 생각 끝에 해 도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 노조가 하려는 말에 은월의 사적인 비밀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도 아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 나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 도인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을 나섰고 그가 나가자마자 문이 닫히고 하얀 금제가 펼쳐졌다.

해 도인은 꼭두각시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바깥에서 기다리던 주과아 곁으로 다가갔고, 주과아는 그를 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몇 시진 후 대청 문이 열렸다. 묵묵히 걸어 나오는 한립은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가시지요. 오소 선배님께서 조용한 선실을 안배해 주셨습니다.”

그는 해 도인과 주과아에게 걸어가 평온히 말하고 먼저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말에 주과아는 큰 눈을 깜빡이며 대청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까 궁금해 그 뒤를 쫓았고 해 도인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 * *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금빛을 발산하며 운공을 하다 눈을 떴다. 천천히 기운을 거둬들인 그가 바깥을 향해 말했다.

“영롱 수사, 오셨으면 들어오시지요.”

“와아, 천 년 간 못 봤다고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 거예요? 누이라 여기시고 원래대로 은월이라고 불러주세요, 한 형.”

문 밖에서 아주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월, 네가 원한다면 그러마.”

한립이 이채를 띠고 문 쪽으로 손을 저었다. 선실 문에 펼쳐져 있던 금제가 사라지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바깥에 서있는 은월은 대청에서와 달리 눈에 생기가 넘치고 얼굴에는 홍조가 어려 한립도 멍하니 쳐다봐야 했다.

은월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와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세심하게 그를 관찰하고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공법상의 이유로 어색하게 군것이니 탓하지 말아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주변의 방석을 끌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공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을 어찌 탓하겠느냐. 그보다 망정결의 영향에서 벗어나자마자 급히 나를 찾아왔으니 일단은 앉아 기운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겠다.”

“괜찮아요! 일정 시간만 버텨내면 망정결의 효과가 미미해 지거든요. 시간을 지체하다 한 형과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또 목석같이 변하면 서로 낭패잖아요.”

은월이 빙긋 웃고는 솔직히 답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성격은 이전과 그대로구나. 어디 무슨 생각인지 말해 보거라.”

조금 머뭇거리던 한립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한 형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성격은 다 ‘전 주인’ 밑에서 힘들게 노역하면서 형성된 거라고요. 거기다 괜히 주인의 의심이라도 사면 저 같은 가녀린 영수가 어찌 되었겠어요?”

“큼……. 그건 다 옛일이 아니더냐. 그때는 네가 정말 여우 요수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은월이 입을 비죽이자 한립이 헛기침을 하며 민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정말 그럴까요? 처음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한 형도 제 신분을 의심하셨잖아요. 그래도 잘만 부려 먹던데요?”

은월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장난스럽게 그를 몰아붙였다.

“하아, 견문이 짧고 경험도 미천해 은월 네 도움이 없었다면 몇 번의 위기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영계로 비승하지도 못했겠지.”

한립은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하하, 옛일을 추궁하려 찾아온 것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 형이 제 벗을 통해 소식을 전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영기가 그렇게 희박한 인계에서 화신기에 이른 것도 놀라운 일인데 영계 비승이라니요.”

“운이 좋았다. 그 일은 네게도 감사를 해야 하고. 당시 네가 공간접점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영계에 이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막 두 혼백이 합일했고 바로 영계로 돌아가야 해서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걸요. 한 형에게 목숨을 빚졌는데 약소하죠. 맞다! 당시 곤오산에서 탈출한 후에도 강적들의 추격을 받았을 텐데 어떻게 화신기에 이를 수 있었던 거예요?”

“하하, 말하자면 길다. 네 도움으로 성반의 힘을 빌려 벗어난 후 대진의 북명도(北冥島)라 불리는 곳으로…….”

한립은 미소 지으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곤오산을 떠나 인계에서 겪은 일 외에도 영계에 와서 있었던 일도 함께 이야기 하느라 반 시진이 훌쩍 흘렀다.

평범한 수사들에 비해 그의 일생은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했고 은월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립이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은월이 인계에 갇히기 전과 영계로 돌아온 후의 생활에 대해 들려주었다.

은월은 이전에 천규랑왕에게 시집을 갔던 일이나 이후 심마에 걸려 어쩔 수없이 망정결을 익히게 된 사정까지 숨김없이 말해 한립을 놀라게 했다.

그 앞에서 자연스레 웃고 떠드는 은월을 보는 한립의 눈길이 아득해져갔다.

“조부님이 한 형에게 망정결의 효과를 약화시킬 방법이 있다고 한동안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정말인가요?”

은월은 웃음을 거두고 진중하게 물었다.

“오소 선배님께서 말해주셨다고? 그래, 선배님께서 망정결을 억제할 의식 비술을 고안해 내셨는데, 내가 수련해야 네게 효과가 있을 거라 하시더구나. 그래서 한 동안은 나를 따라 다녀야겠다.”

한립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 비술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데요. 게다가 어째서 꼭 한 형이 익혀야 제게 효과가 있죠?”

“그 이유는 너도 대충 짐작할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나 때문에 심마가 생겼으니 내가 수련해서 공법의 부작용을 억제하는 것이 순리겠지! 이 의식 공법은 선배님께서 만일을 대비해 네가 망정결을 익히기 전에 백여 년을 공들여 창안한 것이다.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네가 내 곁에 머물기만 해도 비술이 은연중에 영향을 미칠 거라 하셨다.”

“정말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고요? 망정결을 익히면 익힐수록 영향도 강렬해 질 텐데 임시로 창안한 의식 비술로 억제가 될까요?”

은월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나도 수련해 보지 않고선 장담할 수 없다만 오소 선배님께서 고생스럽게 창안한 비술이니 소용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이 비술도 망정결과 마찬가지로 수련을 해나갈수록 억제 효과가 커지겠지.”

“알겠어요. 그런데 의식 비술이 통한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한 형 곁에 머물 수는 없을 텐데요.”

“오소 선배님 말씀으로는 네가 대승기에 이르면 자연히 망정결의 제한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하셨다.”

“대승기……. 아직 너무 먼 일 같은데요. 아무래도 앞으로 아주 오래오래 한 형 곁에 붙어 있어야겠어요!”

한립의 말에 은월이 눈을 빛내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칠성월체를 지녔으니 다른 수사들보다는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고, 그전에 나와 오소 선배님이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니 낙심할 것 없다.”

“그래도 적어도 수백 년은 한 형과 같이 다니는 걸로 알아둘게요.”

은월은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이어 그들은 여러 가지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고 나중에는 수련상의 심득까지 교류하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

“망정결이 언제 발작할지 몰라 저는 돌아가 봐야겠어요. 제가 망정결 때문에 실례해도 양해 부탁드릴게요.”

은월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하늘을 살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테니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한립이 미소로 그녀를 배웅했다. 방문이 닫히고 하얀 금제가 다시 발동되자 그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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