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6화. 목족 영역으로 돌아오다
*
안색이 급변한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다시 금털 거원으로 변해 두 손을 위쪽으로 내질렀다.
콰르릉!
금색 주먹 허상과 회백색 살기가 부딪쳤다가 충격에 서로 튕겨나갔다. 금빛 찬란하던 주먹 허상은 크기도 절반으로 줄고 아주 어둑해져 있었다.
옆에 서있던 해 도인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고 입을 벌려 금색 빛기둥을 분출해 해골 거대 손의 손바닥을 노렸다.
댕!
종소리 같이 그윽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빛기둥은 해골 아래에서 폭발해 태양처럼 동그란 빛덩이를 이루고 빙글빙글 회전했다.
해골 거대 손은 품고 있는 위력이 상당한지 금색 빛덩이를 받치듯 막아냈다. 주변의 공간파동이 극심해져 공간 전체가 웅웅 울렸다. 공간통로가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거대 선박 위 마족 병사들이 겁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공간통로가 무너져 내리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때 선실 안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퍽!
해골 손이 손가락을 힘껏 오므려 쥐고 있던 금색 빛덩이를 터트려 버렸다. 그것을 본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진작 체내의 법력을 마구 비차로 불어넣은 상태였다.
쉭!
비차가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백골 거대 손이 스스로 펑! 하고 붕괴되고 노쇠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저들은 신경 쓸 것 없이 일단 돌아간다!”
“예, 대인!”
웅성거리던 마족 병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였고 거대 전함에 기이한 빛이 흐르고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탄천 대인, 저들을 보내줘도 될까요? 수하들을 보내 잡아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실 안에서 어린 마족 소년이 의자에 기대앉은 백발노인을 향해 불퉁거렸다.
“됐다. 노부가 갈 길이 바쁘니 저런 하찮은 것들은 신경 쓸 것 없다. 게다가 내가 직접 나서지 않고는 저들을 잡아올 수도 없을 테고.”
백발노인이 그런 소년을 보고 담담히 답했다. 검은 장포를 입은 백발의 늙은이는 두 팔이 기이하게 길어 무릎까지 내려왔다.
“그렇게 대단하단 말입니까? 하지만 조금 전 공격은 대인의 진짜 실력에 반에 반도 안 되지 않습니까.”
얼굴에 보라색 문양이 새겨진 소년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허허, 내 공격을 막은 녀석들도 제 실력을 보인 것이 아니다. 서로 제대로 싸우게 되면 노부 역시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할 수는 없을 것이야.”
노인은 소년을 퍽 아끼는지 미소를 머금고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강한 실력자들이었다고요? 뭔가 대단한 내력이 있는 자들인가 봅니다.”
“성계에 침입했다가 이곳 통로를 뚫고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중이떠중이 일리는 없겠지. 허나 공간통로라 법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지 않았다면 노부도 쉽게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이지요! 바깥이었으면 저런 이족인들 따위가 어찌 노조님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소년이 얼른 노인을 추켜세웠다.
노인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의혹이 가득했다. 비차 위의 말쑥하게 생긴 청년의 기운이 어딘가 낯이 익었던 것이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됐다, 성계로 돌아가 조사해보면 알 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 * *
서너 시진 후, 공간통로의 반대편.
마족 병사들이 여러 부대를 이루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통로 아래 지면에는 삼각 거탑 세 개가 품(品) 자 형태를 이루고 세워져 있었다.
우웅!
돌연 공간통로에서 파동이 일고 푸른빛에 싸인 비차가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치는 비차를 보고 인근을 순찰하던 마족 부대들이 날카로운 신호를 보내고는 그 뒤를 쫓았다.
삼각 거탑에서도 적잖은 석문이 열리고 대량의 마족들이 벌 떼처럼 날아올랐다. 그러나 비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쉬쉭! 하는 파공음을 남기고 이미 하늘 끝으로 종적을 감춘 후였다.
그제야 삼각 거탑 속에서 몇몇 마존들이 분노한 얼굴로 날아올랐다.
* * *
“목족 영역이 맞다. 예전에 보았던 독특한 수목과 지형이 그대로야.”
질주하는 비차 위에서 한립이 울창한 삼림을 내려다보며 감회에 젖었다.
“이곳이 영계로군요! 영기가 제가 살던 소령천보다 훨씬 짙어요.”
주과아가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신이나 외쳤다. 소령천에도 영계에서 흘러든 수사들이 있었는데 제자나 후인들에게 영계를 언급하곤 했었다.
“영계가 아무리 좋아도 인족이 그다지 강한 세력을 이루지 못했고 위험한 곳도 많다.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기만 한 곳은 아닐 것이야.”
“호호, 그래도 소령천보다는 인족 수사들이 수련하기에 좋은 곳 같아요. 맞다, 선배님! 소령천으로 돌아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웃음 짓던 주과아가 간절히 부탁했다.
“그건 걱정 말거라. 네가 말하지 않아도 데려갈 생각이었으니. 소령천처럼 낯선 곳에 가는데 안내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립의 말에 소녀가 얼른 고개 숙여 인사했다.
비차는 전속력으로 나아갔고 반나절 후 바깥 풍경을 살피던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숲이 울창한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일부가 암녹색으로 물들어 있어 녹음이 푸르던 옛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런 수풀 속에는 옅게 흑자색의 괴이한 기운이 어려 있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견문이 넓지 않은 주과아 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저 나무들은 마계에서 보았던 식물들과 비슷합니다. 내뿜는 안개에도 마기가 섞여있고요. 어찌된 일일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마족들 짓이 아니겠느냐. 이동하는 동안 목족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것도 그렇고 말이다. 목족 세력이 인족보다는 못해도 그리 만만한 자들은 아닐 터인데.”
“모, 목족인들이 마족에게 전부 몰살이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까 한 명도 보이지 않죠.”
“……전부 몰살당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목족 인구가 많은 것은 둘째 치고 합체급 강자들도 적지 않은데 어찌 마족들이 그들을 남김없이 죽일 수 있단 말이냐. 또한 목족과 맹약을 맺은 인족을 비롯한 인근 종족들이 그들이 당하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것이야. 아무래도 마족에게 밀려 이곳에서 생활하던 목족들이 퇴각한 것 같구나.”
겁먹은 주과아의 물음에 침음하던 한립이 천천히 대답했다.
“일 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공간통로에서 더 멀리 가다보면 목족인들을 만날 수 있겠네요!”
주과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3일 후, 끝없이 펼쳐진 원시 삼림 위에 비차가 멈춰 섰고 그 앞을 여덟 명의 마족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전부 등에 녹색 날개가 자라고 깃털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족들 뒤에는 머리가 둘 달린 마조(魔鳥)들이 잔뜩 날고 있었는데 오색 반점을 지니고 머리에 새까만 뿔이 달린 새들이 못해도 5백 마리는 넘어 보였다.
“이게 몇 번째지?”
“일곱 번째입니다.”
뱃머리에 선 한립의 물음에 주과아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직 인근 고계 마족들이 정신을 못 차렸구나. 좋다, 전부 죽여 한동안 조용히 가보자꾸나.”
한립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소매를 털어 손바닥만 한 푸름 비검들을 72개나 불러냈다. 그가 수결을 맺자 검들이 용울음 소리를 터트리고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다시 넷에서 여덟 개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일순간 하늘 전체가 천 개가 넘는 푸른 검으로 뒤덮였다.
상대편 마족들은 대경실색했으나 엄명을 받은 처지라 감히 달아나지 못하고 각양각색의 무기를 발동해 몰려들었다. 마족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마풍을 몰고 달려들었다.
구구구구!
수백 마리 마조들도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병사들의 뒤를 쫓았다.
“가라.”
한립의 입에서 서늘한 명령이 떨어졌다. 푸른 검들이 동시에 웅! 떨고 기다란 검기로 변해 고계 마족들과 수백 마리 마수들을 파묻었다.
참혹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기의 폭우가 핏물로 바뀌어 지면을 적시고 잘려나간 마조들과 마족의 잔해가 후두득 떨어져 내렸다.
한립이 다시 소매를 펄럭여 검빛들을 회수 했을 때는 하늘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뿐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뒤로는 그의 예상대로 어떤 마족이나 마물도 비차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이렇게 멀리 날아왔는데도 아직까지 목족인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고 숲 곳곳에 수시로 암녹색 거목들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 * *
한 달 후, 비차가 산맥지대의 어느 골짜기 위를 지날 때 한립은 천여 명의 마족이 목족의 작은 부락을 포위해 공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립이 기뻐하며 마족들을 격살하고 목족인들을 구해냈다. 목족인들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인족과 목족이 맹우(盟友)가 된지 오래라 목족 부락의 장로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몇 번의 대규모 전투를 치룬 인근 종족의 연합군과 마족 대군은 대치 국면에 진입했다. 그런데 오륙년 전 마족들이 주력 부대의 절반을 인요족 영역의 전장에서 빼돌려 몰래 목족을 급습했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마족 대군에게 목족 병사들은 칠전칠패(七戰七敗) 했고 병사들 중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주변의 연맹 종족들도 제때 도움을 주지 못했고 목족의 금지에 머물던 대장로가 직접 나서 적과 맞서야 했다.
그때 또 다른 변고가 일어났다.
목족 대장로가 두 종족의 전투에 개입한 순간 미리 매복해 있던 세 명의 마족 성조들이 그를 에워싸고 공격한 것이다.
원염, 육극처럼 시조 급은 아니었지만 화신이 아닌 성조 본체가 강림 한 터라 목족 대장로는 엄청난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한다.
다행히 절체절명의 순간 목족 대장로는 오랜 세월동안 모시던 통령성수(通靈聖樹)를 소환해 그 힘으로 세 마족 성조의 손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법력의 9할을 잃고 더는 대승기 경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대장로 마저 변고를 당하자 목족 병사들의 사기는 돌이킬 수 없게 떨어져 겨우 1년 만에 목족 영토의 7, 8할에 상당하는 지역을 마족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제야 다른 종족들이 보낸 구원군이 목족 영역에 도착했지만 세 성조가 버티고 있는 마족들은 목족 영역을 차지하고 절대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족 부락은 벌써 퇴각해 다른 종족의 비호를 받고 있지만 몇몇 외진 구역은 소식을 늦게 접한 탓에 마족 대군에게 막혀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락들은 꽁꽁 숨어 마족들이 물러날 날만을 기다렸다. 이들도 그런 부락 중 하나였는데 마족들이 몇 년 간의 끈질긴 수색으로 그들을 찾아냈고 몰살당하기 직전에 한립에게 구출된 것이다.
“선배님, 제가 드린 말씀은 결단코 전부 사실입니다! 인족과 목족이 맹약을 맺은 것을 생각하시어 부디 저희가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연허기 목족 노인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는 절박하게 사정해왔다. 한립은 숨어 있던 목족 무리가 대부분 여인과 노인 혹은 아이들인 것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를 데려가 줄 수는 있다. 허나 내가 이동하며 여러 마족 부대를 죽여 고계 마족들이 들이닥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말해두마. 그러니 숨어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전투를 하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그렇다면 선배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제발 이후 동맹을 맺은 다른 선배님들에게 저희의 사정을 잘 설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숨어 있다가 또 언제 전부 죽임을 당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족 노인은 크게 실망했지만 한립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알겠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대로 너희의 사정을 알리겠다. 그런데 마족 병사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아는 바가 있더냐?”
“이리저리 숨어 다니려면 당연히 마족 병사들의 동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겠지요.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다.”
목족 장로의 대답에 한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목족 노인에게서 관련 자료와 지도를 받고 떠나갔고 목족인들도 서둘러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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