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화. 침입
*
“진법들이 성가시다면 내게 일시적으로 저것들을 해결할 비술이 있습니다.”
주과아가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해 도인이 고개를 돌렸다.
“해 형에게 방법이 있다고요? 도와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립이 반색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감사는 되었고 영력이 많이 소모되는 술법이라 이전에 남겨둔 몇 번의 공격 횟수가 절반이나 줄어들 겁니다. 신중히 생각하고 다시 이야기 하시죠.”
“그건 상관없습니다! 영계로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요.”
신비한 병이 있는 한립은 공물이 부족할까 걱정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패도적인 술법이라 비술을 펼치고 얼마간은 내 수행이 떨어질 겁니다. 강적을 만나면 수사를 돕기 어려울 거예요.”
“흠, 평범한 고계 마족은 제가 처리하면 되고 대승기 성조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기는 합니다.”
“심사숙고한 것이면 되었습니다.”
해 도인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시간이 지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성벽 위로 하얀 빛구슬이 걸리기 시작했다.
한립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의식으로 요새의 대략적인 상황을 염탐했다.
“출발 하시죠.”
해 도인은 소매를 펄럭이며 일어나 대량의 은빛으로 한립과 주과아를 휘감고는 번득이며 사라졌다. 잠시 후, 거대 요새 인근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은 바로 회색 비차를 꺼냈고 주과아가 얌전히 그 위에 올라탔다.
해 도인은 허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손에 금색과 은색 영패를 불러냈다. 영패들이 빙글빙글 회전해 금색과 은색의 빛덩이가 되자 그의 기운이 씻은 듯 지워지고 주변에 암녹색 문양들이 떠올랐다.
영패가 변한 금빛과 은빛 속에서 불경 소리가 들리고 금색과 은색 기운들이 새어나와 위쪽에서 금은 색 빛 구슬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에 성벽 위 마족 병사들 3, 40명이 무리를 지어 날아왔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다른 마족들보다 체구가 훨씬 큰 마족이 멀리서 외쳤다.
“웬 놈들이냐! 이곳이 출입금지 구역인 것을 모르더냐!”
“금지 구역이요? 이런, 몰랐습니다! 그저 뭐하는 곳인가 해서 와봤는데 괜히 소란을 피웠군요.”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냥 와봤다고? 뭐라는 것이……. 저 자는 또 뭐하는 것이냐! 엇, 당신들 수행이…….”
마족이 버럭 화를 내려다 한립과 해 도인의 수행을 훑고는 기함했다.
다른 마족들이 반응을 보이기 전에 해 도인이 몸을 떨고 금색과 은색 기운을 뿜어 위쪽 빛구슬로 흡수시켰다.
쿠쿵!
빛구슬이 폭발해 콩알 크기의 금은색 주술문자로 흩어졌고, 주술문자들이 비처럼 요새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에 마족 병사들과 우두머리 마족은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다. 비처럼 쏟아진 주술 문자들에 관통 당한 마족들은 푸른 연기로 피어올랐다.
요새 인근에 도착한 주술문자들이 가장 바깥의 금제에 닿는 것을 시작으로 허공이 극심하게 떨리고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었다.
금은 색 주술문자가 무슨 신통을 지니는지 금제들이 뚫려 온전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금은 색 빛구슬을 불러낸 해 도인은 그가 경고했던 대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기운도 많이 쇠약해졌다.
“이제 가야 합니다!”
한립이 낮게 소리치고 비차에 오르자 해 도인도 비차 위로 이동했다.
그가 푸른 기운을 마구 불어넣어 비차를 전속력으로 출발시켰다.
폭음을 내며 출발한 비차는 은은한 푸른 잔영을 남길 만큼 매우 빨랐다.
망가진 금제들은 푸른 빛줄기를 막지 못했고 혼란에 빠진 요새에서 무수히 많은 비차와 병사들이 떠올랐지만 대부분 한립 일행을 찾아내지 못했다.
간신히 비차의 존재를 알아챈 화신기와 연허기 수사들이 어찌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비차 앞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때 요새 내에서 강력한 기운들이 떠올랐다. 청록색 화염과 검은 돌풍 그리고 두 줄기의 핏빛 빛줄기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요새에 주둔하는 마존들이 나섰구나.’
한립은 그들을 모른 척하고 순식간에 요새 위 새까만 마운까지 올라가 두 손을 교차해 펼쳤다.
콰르릉 콰쾅!
수많은 금색 뇌전 구슬들이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마운 속으로 쇄도했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연달아 울리고 검은 마운 속에서 금색 뇌전 뱀들이 번득였다.
두꺼운 마운이 금색 뇌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분분히 물러나 커다란 허공을 드러냈다.
* * *
한립 일행이 탄 비차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직진해 마운 안 통로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양편의 검은 안개 속에 각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못 지나간다!”
“감히 어딜!”
천둥소리와 함께 검은 뇌전이 튀어나와 교룡의 모습으로 비차에 내리 꽂히고 다른 쪽에서는 녹색 거검 허상이 검기를 방출했다.
비차에 선 한립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그들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지만 첫 공격부터 기운이 상당한 것이 평범한 마족 존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에 한립은 한쪽 소매를 털고 다른 손으로 녹색 검 허상을 가리켰다. 소매 속에서는 굵은 금색 뇌전이 뿜어져 나가고 손끝에서는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검기가 쏘아져나갔다.
쿵! 쿵!
뇌전과 뇌전 그리고 검기 대 검기의 대결이었다. 밝은 빛이 터져 나오고 네 개의 기운이 동시에 사라졌다. 그것을 본 한립은 움찔했고 마운 양쪽의 마족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고계 마족의 공격은 평범해 보여도 실질적으로 대단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검은 뇌전은 마계의 4대 신뢰(神雷) 중 하나로 강력한 부식 작용을 해 평범한 보물이 벼락을 맞으면 구멍이 숭숭 뚫렸고, 푸른 검기는 또 다른 마족이 만년 가까이 수련한 본명 신통으로 수많은 비검과 비도들이 그 예리함에 잘려나갔다.
그런 공격을 동시에 받고도 한립이 같은 속성의 공격으로 대응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립은 적들이 놀라는 사이 비차의 방향을 미세하게 틀어 빠르게 통로 입구로 이동하려 했다.
“달아날 셈이냐!”
“안 된다!”
그걸 본 고계 마족들은 의심스런 마음을 지우고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미친 듯이 천둥소리가 울리며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뇌전들이 튀어나왔고, 다른 쪽에서는 이전보다 더 두꺼운 녹색 검기가 허공을 가르는 중이었다.
그 둘은 거의 동시에 그에게 다가왔지만 목표는 비차가 아니라 통로 입구 쪽이었다. 비차가 입구로 들어가려면 두 공격을 뚫고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비차에 선 한립은 피식 웃으며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금빛을 방출했다. 몸집이 몇 배로 불어 금털 원숭이가 된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팔을 붕붕 돌려 뇌전과 검기들을 향해 연속으로 공격을 날렸다.
휘휘휘휙!
산악거원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을 발휘했고 공간을 왜곡하며 나타난 금색 주먹 허상들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공격을 전부 깨부수었다.
콰르르르릉!
금빛 주먹 허상들이 뇌전과 검기를 부수며 비차를 위해 길을 열었다. 모호하게 변한 비차가 번득이며 공간통로 속으로 뛰어들었고 통로 속에서 오색 기운이 반짝인 후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때 양쪽 마운에서 급히 두 명의 마존이 나타났다. 재빨리 공간통로 입구로 다가간 그들은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청수한 얼굴에 보라색 장포를 입은 마족은 머리에 뿔이 솟아 있었고, 새까만 피부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마족은 하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저들을 놓쳤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다. 설마 대인과 마주치는 것은 아니겠지요?”
까만 피부 마족이 다급히 물었다.
“그렇게까지 운이 없을까요. 대인께서 오늘 영계에서 돌아오신다고 했지만 정확히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모릅니다.”
보라색 장포의 마족은 걱정스런 마음과 달리 평온히 답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저들을 놓친 일로 질책을 받을 겁니다. 그런데 대체 뭐하는 것들이기에 공간통로에 침입한 걸까요? 성조 대인의 화가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우리 둘의 공격을 막아낸 것으로 보아 평범한 마존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성조 대인 같지도 않고요.”
“에이, 그 자가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성조 대인들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게다가 성조 대인께서 강림하고자 하시면 우리가 나서서 배웅을 해드릴 텐데 달아나듯 급히 떠날 이유가 없지요.”
까만 마족이 고개를 저었다.
“대승기 이하의 마존 중 저런 실력을 지닌 자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요새의 다른 존자들에게 아는 바가 있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수사와 내가 모르는데 저것들이라고 알겠습니까?”
보라색 장포 마족의 말에 까만 마족이 이제야 날아드는 몇 개의 둔광들을 보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했다.
“물어보지 않고 어찌 알겠습니까. 어떻게든 단서라도 모아봐야지요.”
그들의 대화가 끝나자 공간통로 근처에 마족 존자들이 도착해 공손히 예를 취했다.
파앗.
까만 마족은 뜸들이지 않고 한 손으로 허공을 그어 파문을 일으켰다. 푸른 기운 속에서 한립과 해 도인 그리고 주과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들에 대해 아는 분이 있습니까?”
까만 마족의 냉랭한 물음에 다른 마존들이 자세히 살피다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마른 사내가 앞으로 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들의 실력으로 판단하건데 그들은 영계에서 온 인족의 강자일 겁니다.”
“인족 강자?”
까만 마족은 의아한 얼굴이었고 보라색 장포 마족도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예, 두 분은 이곳을 지키며 오랫동안 폐관수련을 하셔서 모르시겠지요. 성계를 돌아다니는 인족들에 대해 멸선령이 떨어진지 오래고 성조대인 한 분께서 그들에게 공격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마족 부인이 서둘러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몇 년 전…….”
마른 마존은 한립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고 듣고 있는 두 명의 마족은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 * *
공간통로 안, 주술문자와 보호막으로 겹겹이 싸인 비차가 공간파동을 뚫고 앞으로 질주했다.
뱃머리에 선 한립은 진작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일단 통로에 들어서면 몇 시진 후에는 저절로 영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비록 통로의 반대편은 목족 영역이나 오랜만에 영계로 돌아가는 것이라 마음이 들뜨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절반 정도 지났을 때 전방에 또 다른 새까만 거대 전함이 나타났다. 거대 전함 위에는 마족 병사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이런!’
한립은 법력을 끌어올리고 상대편의 반응을 살폈다.
공간통로에서는 공간 폭풍을 일으킬지 몰라 보통은 싸움을 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공격을 해오면 반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대 전함은 보통 보물이 아니었고 그곳에 타고 있을 고계 마족도 평범한 마존이 아닐 것이다. 거대 선박과 비차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서 거의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검은 선박 위 병사들은 전부 은색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새빨간 전포(戰袍)를 걸친 화신기 이상의 수사들이었다.
뱃머리에 서있는 이들만 해도 백 명이 넘었고 그 중에 합체기 마족 존자들도 여럿 보였다.
마족 병사들도 한립 일행을 보고 놀라 이게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했다. 계획에 따르면 오늘 공간통로는 오직 그들만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막 전함과 비차가 비켜 지나가는 순간 선실 안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계의 이족인이로구나! 여기까지 왔으면 급히 돌아갈 것 없이 노부와 성계로 돌아가자 꾸나.”
선박 안에서 실체를 지닌 듯한 진득한 살의가 느껴졌고 비차 위로 하얀 공간균열이 생겼다.
키에엑!
귀곡성과 함께 커다란 백골 거대 손이 공간균열을 빠져나와 비차를 잡아채려 들었다.
하얀 뼈다귀 손가락들이 닿기 전에 다섯 줄기의 회백색 살기(煞氣)가 먼저 흘러나와 비차의 바깥쪽 방어막을 바스러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