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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54화 (1,011/2,000)

1254화. 이변

*

시야가 아득해 진다고 느낀 순간, 남폭 성조는 이미 아주 멀리 현천영역 밖으로 이동해 있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그녀는 보화와 한립 등이 모여 있는 곳을 냉랭히 바라보다가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육극 화신의 생사야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번엔 내가 물러나죠. 나도 바로 떠날 테니 현천영역을 열어 줘요.”

육극 화신이 불길한 예감에 얼른 입을 열었다.

“떠나겠다?”

보화의 아름다운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떠나게 해주시지요.”

이때 곁에 있던 한립이 나섰다.

“한 수사의 뜻이 정 그렇다면 알겠네. 겨우 화신 하나야 보내주어도 큰 상관은 없으니까.”

보화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웃으며 동의했다. 곧 꽃나무가 분홍빛으로 흩어지고 주변의 분홍꽃 허상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뜻밖에도 현천영역을 거둔 것이다. 육극 화신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한립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갑자기 구명해준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본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길을 열어두려는 것인가?’

어찌 됐든 그녀는 한립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회색 빛줄기로 변해 그 자리를 떠났다. 한립과 보화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한립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적대적인 마족 성조 화신을 죽일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지만 자령의 처지를 생각하니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육극 화신이 이렇게 연달아 죽어 나가면 언제 자령이 화신으로 제련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육극 화신을 놔줌으로써 후에 자령의 목숨을 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 형, 저희도 갑시다. 저들이 겁먹고 물러나기는 했지만 후회하고 뒤쫓아 올 수도 있습니다. 보화 선배님도 천혼단(天魂丹)을 또 복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한립의 말에 거대 게가 고개를 끄덕이고 은색 뇌전 속에서 신속하게 몸을 줄여 해 도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크게 한 발짝을 떼어 비차 위로 이동했다.

“천혼단을 안단 말인가?”

보화가 조금 놀란 듯 물었다.

“이전에 한두 알 제련해 보려고도 했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재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포기했지요. 그래도 천혼단의 약성에 대해서는 대충 압니다. 선배님은 간신히 현천영역을 발동해 공격들을 무효화 시켰지만 두 번째 공격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하, 그들에게 한 말은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던 것이고요.”

“본 좌도 직접 제련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딱 한 알을 구한 것일세. 그리고 두 번째 공격은 자네의 추측도 맞는 말이네.”

그의 말에 보화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갔고 곧바로 신형이 모호해져 충격적이게도 한립의 비차에 올랐다. 그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뭐야.’

한립은 화들짝 놀랐지만 티내지 않고 한 발로 지그시 비차를 밟아 출발시켰다.

* * *

하루 뒤, 비차는 울창한 수풀 위에 멈춰 섰고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해 도인과 주과아만 있었고 보화는 보이지 않았다.

“보화 선배님께서 주고 가신 자료가 진짜인가요? 그 안에 소령천 입구를 찾는 방법도 나와 있을까요?”

그의 표정을 살피던 주과아가 기다리다 못해 조용히 물었다.

“가짜는 아닐 것이다. 그녀의 신분에 이런 일로 거짓말할 리 없으니까.”

한립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살짝 웃었다.

“정말요? 그럼 저도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저, 그런데 보화 선배님을 그냥 가게 두셔도 되나요?”

“아니면 영계에 함께 돌아가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선배님께서는 그녀를 강제로 붙들어 두실 수도 있잖아요.”

“쯧, 나도 그러고 싶다만 확신이 없어 보내주었을 뿐이다. 상대는 마족 시조 중 한 명이었고, 분명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쓸 만한 방법 한두 개 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난 오래오래 살며 대도를 이루고 싶지 괜히 마족과 동귀어진 할 마음은 없다.”

주과아를 보고 한립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

주과아는 혀를 쏙 내밀었다가 더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보내준 데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육극과 남폭 성조는 일단 물러났지만 십중팔구 다시 일을 꾸밀 것이야. 보화라는 강적이 살아 있어야 그들의 일을 망친 나를 쫓기보다는 그녀를 제거하는데 급급하겠지.”

“그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저희는 영계로 돌아가면 되는군요! 과연 선배님은 대단하세요.”

한립의 설명을 듣고 주과아가 감탄했다.

해 도인은 이러나저러나 마차 구석에 꼿꼿이 서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어느 산봉우리에 선 보화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녀 뒤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흑악이 서 있었다.

허약한 기운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거한은 꼿꼿하게 서서 돌기둥처럼 버텼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반 시진 가량 산을 떠나지 않았다.

파앗!

반 시진이 더 지나자 하늘 끝에 파동이 일고 노란 바람이 몰려왔다.

보화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노란 광풍이 가시고 노란빛에 가려진 인영이 모호하게 나타났다.

“보화 대인을 뵙습니다! 속하 소식을 듣는 대로 밤낮없이 날아왔지만 그래도 하루 늦어 대인을 위험하게 만들었으니 이 죄를 어찌 씻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란 인영이 넙죽 보화를 향해 대례를 올렸다.

“자네 탓이 아닐세. 다른 일이 있어 부르려던 것인데 육극과 남폭의 함정에 빠질 줄은 몰랐으니까. 아무래도 당분간 자네의 거처에서 그들의 추적을 피해야 할 것 같네. 그동안 수행이 크게 늘어 성조의 경지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구만.”

보화가 상대를 훑고 담담히 말했다.

“당시 대인께서 저를 거둬주시지 않았으면 진작 죽었을 목숨입니다! 대인을 도울 수 있다면 저의 복일 것입니다. 육극과 남폭 성조가 교활하긴 해도 저까지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일부러 대인에게 적의를 가진 마존들과도 교류를 해왔고, 남폭 성조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으니까요.”

노란 인영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 있다니 다행일세. 자네를 부른 것은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군. 자, 바로 거처로 가지. 육극과 남폭은 쉽게 수색을 포기하지 않을 게야.”

보화가 미소를 머금고 명을 내렸다.

“예, 대인! 제가 선박을 준비해 왔으니 편하게 쉬면서 가십시오. 이동하는 동안 생기는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노란 인영이 얼른 중형 선박을 불러냈다. 새하얀 옥을 세공해 만든 선박에 마족의 문양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어 신분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화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흑악을 데리고 선박에 올라 선실로 들어갔다. 보화와 흑악 모두 원기를 크게 상해 한시라도 빨리 요양을 해야 했다.

노란 인영이 마지막으로 오르고 선박이 하얀 빛줄기로 변해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 * *

반나절 후, 산봉우리 상공에 다섯 사람이 도착했다. 남폭 성조와 육극 화신인 묘령의 여인도 그 안에 있었다.

남포 부인 옆에는 노란 장포와 붉은 장포를 걸친 젊은 부인이 서있었는데 생김새가 남폭 성조와 엇비슷했다.

그리고 육극 화신 뒤에 선 난쟁이 사내는 도사의 복장을 하고 등에 대춧빛 목검을 메고 있었다.

남폭 성조가 소매 속에서 새하얀 담비를 풀어놓았다. 작은 담비는 재빨리 산봉우리 위를 몇 바퀴 돌며 코를 킁킁 거리다 돌아와 괴상하게 울어댔다.

“보화가 이곳에 머물렀답니다. 흑악 외에 제3의 인물도 있었다는군요.”

담비를 거둬들인 남폭 성조가 얼굴을 굳혔다.

“인족 녀석이 아직도 보화와 같이 다닌다고요?”

육극 화신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뇨, 그 녀석의 기운은 섭령초(攝靈貂)가 압니다. 새로운 인물이라고 했어요. 비술을 펼쳐 기운을 대부분 숨겼지만 섭령초가 그 속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답니다. 내가 만나본 자일 거예요.”

“남 선배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면 마계에 남아 있는 보화의 패거리일까요?”

질문한 이는 육극 화신 뒤의 난쟁이 도인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수염만 길게 길러 어찌 보면 우스운 꼴이었는데 누구도 그를 경시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 수사, 안심하게. 보화는 연달아 현천영역을 발동하느라 부상이 더 심해졌을 것이야. 당장 성계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숨어 있어도 법력을 단시간에 회복할 방법은 없네. 이렇게 빨리 숨은 것을 보면 그녀와 접촉한 인물은 인근의 고계 마족 중 하나일 것이야. 하나하나 조사하다보면 자연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일세.”

남폭 성조 역시 그의 물음에 성의껏 답해주었다.

“남폭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부 수사는 제 수하지만 제 화신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고 수사의 두 화신도 불러들였으니 보화를 놓치겠습니까? 이번에야 말로 보화를 이 세상에서 확실히 지워버리고 말겠어요. 무고한 이들이 죽더라도 그녀를 숨겨준 범인을 색출해야지요.”

육극 화신의 눈에 적의가 가득했다.

“보화와 인연이 있던 녀석들부터 손을 쓰면 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가장 의심스러우니까요.”

“번거롭겠지만 수사께서 인근 성에 있는 전송진을 잠시 봉인하도록 요청해주시겠습니까? 그래야 보화가 달아날 길이 막힐 거예요.”

“즉시 명을 내리도록 하지요. 주변의 성 책임자들과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 요청을 들어줄 겁니다. 물론 수사가 시조의 신분으로 압력을 가해주면 더 고분고분 명을 들을 것이고요.”

“문제없습니다! 저도 여러 성주들에게 보낼 서신을 쓰지요.”

바라던 바였기에 육극 화신도 응했다.

“시간도 없으니 바로 움직입시다. 이곳에서 머지않은 동라산(銅鑼山) 근처에도 의심스런 마존이 거주하고 있어요. 그 자부터 조사해보죠.”

남폭 부인은 곧바로 소매를 펄럭여 남색 기운 속에서 괴이하게 사라졌다.

* * *

순식간에 반년이 지나갔다.

마계의 황무지,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는 작은 성 같았다.

성벽 위를 무장한 병사들이 순찰했고 성벽 곳곳에 다양한 빛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금제 진법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요새 위 고공은 마운들이 가득했는데 그 안에서 수시로 놀라운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한 선배님, 여기가 이전에 말씀하셨던 경계가 심하지 않고 마족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다는 통로가 맞습니까?”

주과아가 멀리서 요새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 물었다. 거울 속에 비친 거대 요새는 듣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이상하구나! 농 가 노조와 영족 수사들은 분명 이곳의 통로는 마족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거나 마족들이 갑자기 이곳을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조용히 거울 속 모습을 바라보던 한립이 대답했다.

“어째서요?”

“이유는 간단하다. 성벽을 높게 쌓아두긴 했으나 지은 지 십 수 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구나.”

“그랬군요! 저는 덜렁이라 그런 것까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이렇게 되었으니 다른 통로를 찾아야 할까요?”

주과아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럴 것 없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공간통로가 몇 개월 거리다. 이동하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마존 몇 명이 지키고 있더라도 여길 공략하는 게 나을 게야. 문제는 주변의 진법인데…….”

한립은 반짝이는 진법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꺼려졌다. 마계로 진입할 때는 합체기 수사들이 무더기로 공격해 각종 금제를 단시간에 뚫고 통로로 진입했지만 지금은 혼자라서 길을 트려다 시간을 지체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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