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1화. 암류(暗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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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화신들을 불러들여 문하의 제자들에게 수색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곳이 이 꼴이 된 것도 보화의 짓일까요?”
“아닐 겁니다. 전투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남아있는 기운과 아래쪽의 구멍으로 보아 지하에 숨어 살던 마수와 누군가가 싸운 듯합니다. 둘 다 합체급 존재인데 어찌 이리 빨리 마수를 처리했는지 모르겠군요. 남폭 수사께서 먼저 도착하셨으니 뭔가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육극 화신은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자광수의 수정 조각을 끌어왔다.
“제가 왔을 땐 이미 싸움이 끝난 뒤였습니다. 합체 후기의 실력자가 마수를 발견하고 전투가 벌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마침 혈아미의 수확 철이라 강력한 마존급 존재들이 모여 들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그렇겠군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겉으로는 혈아미를 제한적으로 판매하고 암암리에 문하의 수사들로 하여금 각종 세력에 천문학적인 가격을 받고 물건을 넘기다니 수완이 참으로 고명하십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혈아미 수확량이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니 어떤 세력에게도 밉보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해야만 남폭호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남포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현명한 판단이세요. 대놓고 혈아미를 누군가에게 몰아주면 다른 성조들도 불만이 클 것 아닙니까. 아, 제 문하의 두 제자도 마침 육신을 단단히 하기 위해 혈아미가 필요한데 저도 온 김에 구할 수 있을까요?”
묘령의 여인이 눈을 굴리며 웃었다.
“수사께서 원하시면 약간은 그냥 내드리겠습니다.”
남포 부인이 장포 소매를 펄럭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행동에 들어갈까요? 저도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저는 남폭성으로 돌아가야겠군요.”
육극의 말에 남포 부인이 반대하지 않고 남색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이제 그곳에는 묘령의 여인만 남았다. 육극 화신은 남색빛이 하늘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웃음을 거두었다.
그녀는 수정을 내려다보며 고민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음양대오행진광이 세상에 나타났구나! 시급한 일이 없었으면 진광을 얻은 놈을 끝까지 추적했을 텐데. 허나 지금은 괜한 일을 벌일 때가 아니야.”
잠시 후 황금 선박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 시각, 한립은 남폭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녹색 돌을 얻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는 왔던 길과 달리 일부러 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한참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다 저물탁에 넣어두고 이번에는 이마금을 꺼냈다. 이마금을 본 그는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푸른 원숭이 꼭두각시들이 채굴한 이마금의 양은 무우 일당과 거래한 양에 못지않았고 놀랍게도 절반 넘게 신비 구슬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마금이 신비한 구슬을 품고 있다니. 지살음기만 해결하면 합체 후기 최고봉으로 수행을 끌어올리는 데 얼마 걸리지 않겠어!’
물론 그 전에 지살음기를 연화할 방법을 구하고 혈아미도 빠른 시일 내로 손에 넣어야 했다. 광원재를 통해 연락할 방법을 알아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 * *
며칠 후, 한립은 남폭성으로 돌아와 객잔에서 자령과 마주했다.
“무슨 일이 생겼기에 직접 찾아 온 것인가?”
예상치 못한 일에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들의 관계가 외부에 알려지면 자령이 곤란하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직접 만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심복을 통해 연락하자던 자령이 그가 머무는 객잔에 찾아왔을 때는 보통 일은 아니었다.
“육극 사부가 남폭호에 도착해 얼마 전 수하들을 이끌고 인사를 하러 다녀왔습니다.”
“육극이 왔다고? 본체가 말인가?”
“그건 아니고 화신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신통이나 지니고 있는 보물들을 생각하면 평범한 성조에 뒤지지 않는 전력이지요.”
“본체가 나타난 것이 아니면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어째서 육극이 여기까지 온 것이지? 나를 찾아내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육극에게 원한을 산일도 없을뿐더러 정말 나를 노렸다면 화신 하나를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구체적인 대상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저와 수하들에게 인근을 수색해 누군가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 생각에도 한 형을 노린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령은 관심어린 태도로 당부했다.
“알겠네! 마계 시조인 육극은 그만큼 경계심도 강하겠지. 자령, 자네도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내게 연락을 취하지 말게. 난 서둘러 남폭호를 떠나 영계로 돌아갈 계획일세.”
한립의 눈길이 자령의 아름다운 얼굴로 향했다. 뜨거워지는 마음과 달리 그의 말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알아두겠습니다. ……한 형과 다시 볼 날이 수백 년 후가 될지 아니면 천년 후가 될지 모르겠네요. 남영에게 파계 보물을 받아도 아무 때나 마계로 돌아오지는 못할 테니까요.”
자령의 눈빛이 흔들렸고 그녀의 시선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최근에 여러 기연을 얻어 대승기 고비에 도전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성공만 한다면 반드시 마계로 돌아와 육극 문하에서 자네를 구해낼 것이야!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육극이 자네를 화신으로 만들려 하면 바로 광원재를 통해 내게 소식을 전하게. 늦지 않게 자네를 도울 수 있게 말이야.”
한립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도울 것을 약속했다. 자령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한 형의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이시니 분명 대승기에 이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여기서 한 형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여인이 인사를 하며 그를 향해 예를 취하고 돌아섰다.
한립은 아름다운 자령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동안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은 말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 * *
이틀 후, 한립은 남폭성 밖 호수 인근의 작은 산에서 바위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이 점점 밝아오며 해가 뜨기 시작했고 호수에는 물안개가 껴서 무척 서늘하면서도 습했다. 한립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오셨으면 기척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현지 수사께서 제가 매복이라도 해놓았을까 걱정하시는 겝니까?”
“허허, 큰 금액이 오가는 거래이니만큼 신중을 기해야지요.”
고공에 파동이 일고 삿갓을 쓴 회색 장포인이 웃으며 나타났다. 고음에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진 자였다.
“그건 그렇고 제가 원하는 수량은 맞춰 갖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져왔습니다! 수사가 원하는 수량이 너무 많아 저도 구하느라 힘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격은 일전에 말한 것에 2할을 더 쳐주셔야겠습니다.”
삿갓에 가려진 회색 장포인의 눈이 번득였다.
“2할을 더요? 거래 직전에 가격을 올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원래 가격대로도 거래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수량은 말씀하신 것에 삼분에 일밖에 못 드리지요. 저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장 못 믿을 소리가 장사꾼이 손해 보는 거래를 한다는 말이라더군요! 흥, 급한 일이 있어 가격을 흥정할 시간이 없으니 당신 말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혈아미의 수량과 품질은 확실해야 합니다.”
상대의 여유로운 태도를 보고 한립이 코웃음을 치며 서둘러 결정을 내렸다.
“허허허,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최상급 품종의 혈아미를 수사가 원하는 수량만큼 준비해 왔으니까요.”
“이제 거래를 합시다.”
한립은 조용히 검은 고리를 던졌다.
“마석을 먼저 지불하시고 근심걱정이 없는 성격인가 봅니다.”
회색 장포인이 한립의 행동을 보고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재빨리 고리를 끌어와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렇게 많은 마석을 단번에 내주시고, 상당한 내력이 있는 분 같습니다. 수사께서 약속을 지키셨으니 저도 그래야겠지요? 방 형, 이제 나와서 혈아미를 넘겨주셔도 됩니다!”
회색 장포인이 검은 고리를 품에 넣고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공에서 녹색 인영이 귀신처럼 나타나 팔을 뻗었다.
휘익!
청록색 저물탁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한립은 미미하게 안색이 달라져 팔찌를 끌어와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그는 회색 장포인과 달리 한식경 가량 꼼꼼하게 물건의 품질을 확인했다.
“가격은 비싸도 품질은 좋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수사에게 좋은 품질의 혈아미를 대량으로 거래하기 위해 다른 세력과의 거래도 미루었습니다. 그러니 가격을 조금 더 받을 수밖에 없지요.”
한립의 칭찬에 회색 장포인이 능청스레 말했다.
“물건도 받았고 대가도 지불했으면 이제 떠나도 되겠지요?”
한립은 바로 청록색 저물탁을 챙겨 푸른 둔광을 일으켜 하늘 끝으로 날아갔다.
“흠, 미리 펼쳐놓은 금공금제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날아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저 자의 실력이 상상 이상입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회색 장포인이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저음으로 변해 있었다.
“건들만한 자가 아니라면 거래를 마친 것으로 되었습니다. 요즘 혈아미를 구매하는 자들이 다들 수행이 상당해서 우리가 손을 쓸 일이 별로 없군요.”
고공의 녹색 인영이 냉랭히 답했다.
“거대 세력을 등에 업은 자들은 성조 대인께서도 쉽게 건들지 않으시니 우리도 세력 없이 홀로 지내는 별 볼일 없는 자들에게만 손을 쓸 수밖에요. 저 자는 본연의 수행도 높아 보이고 성에 들어오자마자 대량으로 이마금을 구매한 정황으로 보아 뒷배가 상당한 인물 같습니다. 하하, 가격을 부풀려 받은 것만으로도 거래한 보람이 있었어요.”
“어느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괜한 일 만들지 말고 어서 갑시다. 성조 대인의 소환령이 떨어져 즉각 성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녹색 인영이 무표정하게 말하고 번득이며 사라졌다.
“흐흐, 일을 만들라고 해도 안만들 겁니다. 사실 저 자와 싸우면 우리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 같다는 이상이 예감이 들지 뭡니까.”
회색 장포인은 한립이 사라진 쪽을 힐끗 쳐다보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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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한립은 마차를 타고 광원재로 달려갔다.
수풀 속의 누각에서 그는 다시 남영을 만나 몇 시진을 머물다 미소를 머금고 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그는 객잔에 들어가 며칠간 두문분출 했다. 그러나 첫날에 한 달 치 객잔 이용료를 지불한 터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달이 될 동안 한립이 머무는 방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주인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 일찍 일꾼을 보내 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가 보고서야 그곳이 텅 빈지 오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한립은 회색 비차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맑은 인상의 청년과 예쁜 소녀가 비차의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한 명은 목석 같이 움직임이 없었고 한 명은 수시로 이쪽 저쪽을 보며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바로 해 도인과 주과아였다.
한립은 몰래 섬을 떠나 약속한 장소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출발했다.
며칠 후 그들은 남폭호를 벗어났고 한립은 그제야 안심을 했다.
농 가 노조 등 인계의 일행 등과 세운 계획은 영계로 돌아갈 때는 원래 왔던 곳이 아닌 또 다른 통로를 이용하기로 계획했었다.
마계에서 한적한 곳이라 고계 마족도 얼마 없었고 연결된 영계의 통로도 인요족 영토가 아닌 목족 영토 근처라고 들었다.
농 가 노조 등 일행들은 죽었지만 한립은 원래 계획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다른 통로가 어디 있는지 영계 어느 곳으로 통하는지 몰랐기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대륙에라도 떨어지면 인족 영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1, 2백년을 허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령…….’
한립은 문득 자령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가슴이 아파왔다.
오랜 세월이 흘러 겨우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자령이 육극에게 붙들린 신세만 아니라면 그녀를 영계로 데려가 마기를 해결하고 인족의 영체(靈體)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 주었을 것이다.
그는 옛 기억을 떠올리다 또 다른 절색의 여인이 머릿속을 채우자 마음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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