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8화. 채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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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성큼 걸어가던 한립이 문 앞에 이르러서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무우 수사, 이마금의 출처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정확한 정보라면 방금 드린 마석의 3분의 1까지는 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 말에 무우가 너무 놀라 바로 답을 하지 못했지만, 대청 안 다른 마족 남녀는 탐욕스런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쉽지만 그건 곤란해서요. 한 형의 호의는 거절해야 할 듯싶습니다.”
무우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도 강요는 하지는 않겠습니다.”
한립은 마족 사내를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주저 없이 대청을 나섰다. 이에 무우는 대청 입구를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 없이 나간 한립의 눈빛이 뭔가 불길했기 때문이다.
“형님, 이마금의 출처를 알려주고 보수를 챙긴 다음 떠나면 그만 아닙니까? 엄청난 수량의 마석을 힘들이지 않고 얻을 기회였는데요.”
마족 여인이 참다못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외지인이라지만 저자의 정체를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 이곳의 여러 세력들을 우습게보지 말거라. 괜히 광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가 큰일이 생길 수도 있다. 마석을 챙겼으니 즉시 흩어져 남폭성을 빠져나간다. 성문을 나서면 계획대로 전속력으로 이곳을 떠나 사애성(獅崖城)에서 모이면 된다.”
무우는 그녀를 나무라고 모두에게 명을 내렸다.
* * *
그 시각, 한립은 마차에 앉아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대청에서와는 달리 흥분한 얼굴로 검은색과 하얀색이 교차하는 이마금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찾아냈어!”
오늘 얻은 저물탁 속에는 특수한 기운이 깃든 이마금이 스무 개나 넘게 들어있었다.
한립은 무우 일당이 이런 이마금을 더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래 장소가 남폭성 번화가만 아니었어도 당장 잡아다 추혼술로 정보를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무우 일당의 몸에 쥐도 새도 모르게 표식을 심어 놓았으니 그들이 남폭성을 떠날 때를 기다려 잡으면 그만이었다.
한립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몇 시진이 지난 뒤 요수 마차가 객잔 앞에 도착했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대문 옆에 서있는 익숙한 얼굴의 흑갑 마족을 보고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지만 그를 지나 객잔으로 먼저 들어갔다. 흑갑 마족도 무표정하게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한립이 머무는 방안에서 흑갑 마족이 공손히 푸른 돌조각을 건넸다.
이마에 돌조각을 댄 한립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용은 확인했다. 주인에게 돌아가 내가 흡족해했다 전하거라.”
“예, 대인!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한립이 돌조각을 먼지로 만들고 명령을 내리자 흑갑 마족은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하하, 몰래 광산에서 채굴한 것이었다니!”
한립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흑갑 마족은 자령이 보낸 사람이었다.
육극 시조의 제자인 자령은 남폭호에서 적잖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도 많았다. 그러니 연허기 수사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자령은 이들이 몰래 광산에서 이마금을 채굴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실 남폭호에서 몰래 광물을 채굴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무우의 수행이 낮지 않고 그의 일당이 벌인 광맥이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아 그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나설 자는 없었다.
‘저급한 품질의 광맥에서 대량의 상품 이마금을 채굴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무우 일당에게 다시 알아내야겠지.’
한립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두 눈을 감았다. 무우 일당에게 심어 놓은 의식 표식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의식 표식이 남폭성을 떠났는데 아직 남아 있는 두 개가 뜻밖에도 그의 거처와 가까운 곳에서 천천히 이동 중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방출해 서둘러 객잔 주변을 살폈다.
마차를 타고 객잔 쪽으로 다가오는 남녀 마족은 젊은 부부처럼 보였다.
한립은 그들의 의도를 대충 짐작하고는 의식을 거두고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한식경 후 두 개의 의식 표식이 그의 거처 대문 밖에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래도 망설여지는지 한참을 서성거렸다.
조용히 기다리던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 순간, 마족 남녀의 귓가에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왔으면 들어 오거라!”
남녀 마족은 화들짝 놀라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가지. 한 선배님께서 우리가 온 것을 알았으니 그냥 돌아갈 수는 없네.”
예쁘장한 얼굴의 여인이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대청 중간에 앉아 있는 한립과 마주했다. 그는 의자에 앉아 그들을 훑어보았다.
“저희 부부가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마족 사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여인을 데리고 걸어가 예를 올렸다.
“일어나게.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어서 찾아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상의 드릴 일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한립의 담담한 물음에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허나 많은 시간을 내어줄 수는 없네.”
“저, 선배님께서 일전에 하신 이야기는 아직도 유효한지요?”
“흠, 약속 장소를 떠나기 전 무우에게 했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군. 물론 아직 유효하네. 자네들이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는 것인가?”
“예, 바로 그렇습니다! 사실 그 이마금들이 어디서 난 것인지는 저희 부부가 무우 형님보다 더 잘 알고 있지요. 그것은 저희가 친히 감독하며 채굴한 것들입니다. 선배님께서 약속하신 마석만 내주시면 아주 상세하게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마족 사내는 눈을 반짝였다.
“자네들이 나를 찾은 것을 무우 수사는 모를 테지?”
“영민하십니다! 저희는 스스로 선배님을 찾아오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동료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저희를 속였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광산 감독을 맡아 실무를 처리하던 저희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몰래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끝까지 속았을 일이지요.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적은 마석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마족 사내는 당당하게 답했다.
“자네들과 무우 사이의 은원에는 관심 없네. 제공하는 정보가 만족스러우면 약속한 대로 마석을 지불하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거래하신 이마금들은 저희가 몰래 채굴 중인 광산에서 난 것으로 첫 번째 이마금도 저희 둘이 발견한 것입니다. 백 년 가까이 몰래몰래 채굴하다 겨우 발견한 것이라 광산 아주 깊은 곳에 있어 누군가 위치를 말해 주지 않으면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잘 들었네. 내 궁금증을 덜어주었으니 약속한 마석을 주지. 미리 말해두지만 지금 한 말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마석을 얻었다 해도 쓸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야.”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마석이 가득 들어있는 저물탁을 꺼내 던져주고는 경고 또한 잊지 않았다.
“제가 어찌 선배님에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사실이며 절대 거짓은 없었습니다.”
저물탁을 본 사내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하하, 그러기를 바라지. 자네들은 이만 가 봐도 좋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선배님을 귀찮게 해드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내는 한립이 던져준 저물탁을 확인하고는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리고 여인과 함께 서둘러 대청을 빠져나갔다.
마족 남녀는 객잔을 떠나 인근의 구석진 골목에 이르러서야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한 선배님이 말씀하신 수량대로예요?”
“대충 살피느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엇비슷하네! 상대의 대범한 씀씀이에 마석으로 장난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그런데 한 선배라는 자가 이렇게 쉽게 마석을 내줄 줄은 몰랐어. 우리가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것들은 쓸 필요도 없었고.”
여인의 물음에 사내가 들뜬 얼굴로 답했다.
“그럼 이제 어쩌죠? 무우가 알려준 경로대로 남폭호를 벗어날 건가요?”
“남폭호는 반드시 떠나야 하지만 결코 무우의 뜻대로 움직여서는 안 될 것이야. 이곳만 안전하게 벗어나면 다른 이들과 만날 필요도 없으니까. 이 정도 마석이면 우리 둘이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뭐 하러 남의 밑에서 수하를 하나.”
“좋아요, 당신 뜻에 따를게요!”
그들은 마차를 잡아타고 가까운 성문으로 질주했다.
한립은 여전히 대청 의자에 앉아 방금 입수한 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마족 사내가 설명할 때 아무로 모르게 현묘한 비술을 사용했다. 추혼술처럼 강력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머릿속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는 가려낼 수 있었다.
다행히 마족 사내의 정보는 거짓이 아니었고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성 안의 객잔에 머물고 있어 추혼술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인근의 고계 마족이 눈치채거나 객잔에 설치된 금제가 반응을 보이면 괜히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됐다. 시간도 촉박한데 일단 무우 일당은 놔두고 움직이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 * *
한립은 객잔을 나와 마차를 타고 성문으로 향했다.
몰래 채굴하는 광산은 섬 바깥에 있어 그의 속도로도 며칠은 걸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3일 후 푸른 둔광이 고공을 가로질렀다. 아래쪽은 이미 호수가 아니라 암녹색의 산맥이었다.
‘드디어 찾았군!’
그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발견하고는 정상의 바위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방대한 의식으로 지하를 탐색한 후 수결을 맺어 몸에서 노란 주술문자를 일으켜 바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 땅속에서 노란빛이 반짝이고 한립의 신형이 모호하게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하얀 빛구슬을 꺼내 띄웠다. 그러자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한립은 지금, 버려진 광맥 통로 속에 들어와 있었다. 네 벽이 울퉁불퉁하고 값싼 광물의 잔해가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앞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통로는 아래쪽의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립은 벽에 박힌 광석을 쳐다보았다.
쉭-!
그는 손을 뻗어 무형의 힘으로 반생광(半生礦)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자 안에 광석이 깨지며 깜빡깜빡 거리는 검은 부적이 나왔다.
“잔머리를 굴렸구나.”
그는 의식으로 부적을 훑고는 소매 속에 넣고 다시 통로를 걸어갔다. 협소한 길이 수없이 많이 교차해 거미줄처럼 복잡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하다 십(十) 자 형의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펑!
손끝을 튕겨 구석 벽을 부수니 그 안에서 또 다른 검은 부적이 튀어나왔다. 한립은 푸른 기운으로 부적을 챙겨 넣고 통로 중 하나를 골라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얻은 검은 부적이 그를 광산 깊은 곳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깊이 내려갈수록 교차로는 적어지고 통로 양쪽의 울퉁불퉁한 흔적도 줄어들었다.
한참을 걸으며 한두 번 채굴한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곳에 드러난 광물 잔해는 훨씬 값비싼 것들이었다.
원래 광맥에서 멀리 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광산 노예들이 계속 파나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립은 주변을 살펴보며 걷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 길이 바위와 흙더미로 꽉 막혀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통로를 허물어 길을 막아둔 듯했다.
파앗!
한립의 몸이 노란빛으로 물들고 형체가 없는 사람처럼 돌 더미로 스며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