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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47화 (1,004/2,000)
  • 1247화. 명충(螟蟲)

    *

    “상관없습니다. 선자가 연락만 취해주신다면 대가는 중요치 않으니까요. 쓸데없는 구결 때문에 막대한 이익을 버릴 자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립은 걱정 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연락을 취해 수사께 만족할 만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가신 문제를 해결해 드렸으니 제게도 보수는 주겠지요?”

    “얼마든 원하는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음, 다른 분이었으면 정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 선자의 오랜 벗이시니 이번에는 보수를 받지 않겠습니다.”

    “남 선자의 뜻대로 하시지요.”

    한립은 약간 의외였지만 잠시 생각해 보고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래도 한두 번은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호의로 한 제안을 거절해 무엇 하겠습니까. 남 선자께서 따로 원하는 바가 있어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요.”

    “흥, 고맙다는 말도 없이 다 받아 드시네요.”

    그의 의미심장한 답에 베옷 소녀가 입을 비죽였다. 이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자령이 입을 열었다.

    “됐어요. 둘 다 속이 빤히 보이는데 돌려 말하지 말고요. 한 형, 남영은 저와 정말 가까운 벗입니다. 이후 어려운 일이 아니면 한 번은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렵지 않네. 하지만 내가 돕는 것은 남 수사이지 광원재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게!”

    “그럼요!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베옷 소녀가 원하던 대답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런데 마계를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 것인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그런 베옷 소녀를 응시했다.

    “저희 광원재가 여러 대륙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잊으셨나요? 합체기 수사가 공간을 찢고 마계로 넘어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광원재라면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남영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성계반(星界盤)이나 파계주(破界珠) 같은 법기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계반으로는 부족합니다. 노괴에게 연락을 취해보고 한 형이 다시 찾아주시면 준비해 놓지요. 광원재에서도 아주 진귀한 물건이고 회수와 사용에 제약이 있으니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신중히 사용하셔야 합니다.”

    “소모성 물품이라면 당연히 신중히 사용할 것입니다.”

    영계와 마계를 오갈 수 있는 보물이 있다는 말에 한립은 고민 없이 답했다.

    “그런데 줄곧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머뭇거리던 한립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와 서먹서먹하게 왜 그러세요? 어떤 질문이든 물어보세요.”

    베옷 소녀는 움찔하다 아무렇지 않게 살가운 태도를 취했다.

    “이번 마계의 영계 침략이 어째서 이전과 다른지 알고 싶습니다. 장기간 영계를 점령하고 떠나지 않을 것처럼 보여서요. 그런데 마계에 와보니 일반 마족들은 그런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고, 영계에 침략한 자들도 전부 성조의 직속 세력이거나 그들에게 부림을 받는 중, 저계 마수뿐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에 베옷 소녀와 주 이모는 물론 자령의 표정도 급변했다.

    “저는 그 답을 알고 있지만 광원재의 ‘계면 간 쟁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남영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남 선자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이라면 듣지 못한 것으로 하십시오.”

    “한 형, 그것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저도 육극 문하에 있어 아는 바가 있습니다.”

    고민하던 자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 불편하면 굳이 그럴 것 없네. 어차피 시간이 더 걸릴 뿐 조사해 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원래는 성조급들만 알던 내용이지만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다른 이들의 이목을 오래 속일 수 없을 겁니다. 육극 성조의 제자인 제가 알 정도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계 고위층들도 마계의 대겁에 대해 알게 될 테죠.”

    “마계 대겁?”

    불길한 내용에 한립이 귀를 기울였다.

    “남영 동생과 주 이모님도 알고 계셨다니 그냥 이 자리에서 말할게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알려줘.”

    자령은 베옷 소녀를 바라보았다.

    “본 재도 이번 일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에요. 그저 자칫 잘못하면 마계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죠. 3대 시조들을 중심으로 성조들은 대부분 마계 대겁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고, 이번 영계 침략도 그들이 준비한 대비책이 아닌가 해요.”

    “남영 수사는 말하기 불편할 테니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일의 원인을 따지자면 마계가 생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은 멸종되고 없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 진선(眞仙)과 진마(眞魔) 등 상계의 존재도 가끔 하계의 본 족과 연락을 취했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계면의 상고 충족(蟲族) 지파에서 진선급 존재보다 무서운 명충모(螟蟲母)가 탄생했지요. 흑암원소체(黑暗元素體)를 타고난 데다 천지의 각종 역량을 갉아먹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더욱 무서운 것은 엄청난 번식력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다른 계면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서금충을 비롯한 흉충들은 이 명충모의 피를 이어받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령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겨우 천년 만에 명충모 한 마리가 수억 마리의 자손을 데리고 그 계면의 다른 종족과 생령들을 학살했습니다. 다시 만년 뒤에는 천지역량과 만물을 모조리 갉아먹어 계면이 붕괴하기 시작했고요.

    명충모는 계면이 멸망하기 직전에 놀랍게도 막대한 신통을 이용해 자손들과 함께 다른 계면으로 이동했습니다! 몇 만 년 후에 그들이 새로 이주한 계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지요.

    십만 년 동안 명충모와 그 자손들이 여러 계면을 훼손하고 나서야 상계가 나섰고 두 명의 진선 본체가 친히 강림해 그것들을 마계로 유인해 학살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만한 엄청난 전투에 마계의 험악한 여러 지형도 그때 형성이 된 것이라더군요.

    자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명충모도 중상을 입어 두 명의 진선이 선계의 술법으로 봉인해 지금까지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왕 명충모를 제압했으면 목숨을 취할 일이지 어째서 봉인을 한 것인가? 이번 마계 대겁에 그 명충모가 다시 깨어나기라도 하는 것인가?”

    한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두 진선이 어째서 명충모를 죽이지 않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건 한 형의 추측대로 명충모가 만 년 전부터 점점 깨어날 기미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자손들이 엄청나게 번식해서 그것들이 끊임없이 봉인을 공격하고 있고요. 3대 시조가 다급히 다양한 수법을 사용해 봉인을 강화하고 수하들을 보내 봉인 틈새로 빠져나오는 중, 저계 명충들을 제거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고 있지 않지요.

    일단 명충모가 깨어나 봉인을 빠져나오면 마계가 어찌 될지는 모두 다 알 것입니다. 명충모는 정복한 종족을 붙잡아 부려먹지도 않고 그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삼켜대니 이것이 마계 대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말을 마친 자령의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자령 자네의 말대로라면 명충모가 마계를 없애면 다음 차례는 영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립도 난색을 표했다.

    “마계와 근접한 계면이 영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계가 멸망하면 다음으로 영계가 화를 입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요행히 명충모가 다른 계면으로 이동한다 해도 결국에는 영계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테고요.”

    베옷 소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말은 명충모를 해결하면 마계도 병사를 거둘 것이고 영계도 재난을 방지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명충모를 해결한다고요?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전쟁을 멈추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마계에서 영계를 상대로 한 성제 자체를 없앨 수도 있을걸요. 하지만 천상의 진선이 강림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한립의 말을 듣고 자령이 고개를 저었다.

    “흠, 당장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이후에 이야기해도 될 테지.”

    한립은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보았지만 일단은 복잡한 생각을 지우기로 했다. 계면의 운명이 달린 대사는 영계의 대승기 수사들이나 고민할 일이지 겨우 합체기 수사인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대로 막간리라 불리는 대승기 수사에게 이 일을 알리면 그가 할 도리는 모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정하고 남영, 자령과 마계에서 보고 들은 바에 대해 한담을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령이 한립을 배웅해 누각 아래로 내려가자 갑옷을 입은 마족 시위 8명이 호화로운 마수 마차를 지키고 서있었다.

    “한 형, 제가 성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는 동안 할 이야기도 있고요.”

    “그러지. 나도 상의할 것이 있던 차였네.”

    자령의 말에 한립도 거절하지 않았다.

    한립과 자령은 마족 시위들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함께 마차에 올랐다.

    “성으로 돌아간다.”

    자령이 맑은 목소리로 분부를 내리자 마부는 새까만 마수를 부려 마차를 몰았다. 이때 마차에는 은은하게 붉은 빛이 어리며 금제가 발동되었다.

    “자령, 내 남영에게는 알아보기 불편한 일이 있어 따로 이야기를 하겠네. 남폭호에 자네의 세력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무우’라는 마족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겠나. 그자가 달아날지 모르니 빠르면 빠를수록…….”

    마차 안에서 한립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 * *

    몇 시진 후 한립은 홀로 거처로 돌아갔다.

    남폭성에서 대량으로 이마금을 사들인 까닭에 많은 이들이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수행이 연허 후기에 이르렀기에 그를 감시하는 세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를 뒤쫓게 하려면 감시자의 수행 역시 만만치 않아야 하는데 연허기 경지에 이른 마족이 다른 이의 뒤나 캐고 다니는 일을 원할 리 없었다.

    * * *

    다음 날 한립은 원기 왕성한 모습으로 객잔을 나섰다.

    당연히 무우와 약속한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안 그래도 이마금 속 수정 구슬을 중시하고 있었는데 음약대오행진광과도 연관이 있다니 더욱더 손에 넣어야 했다.

    무우의 이마금에 수정 구슬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수량이 많을수록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어제 찾아갔던 대청 앞에 익숙한 얼굴의 남녀 수사가 그를 맞이했다.

    “한 선배님, 안으로 드시지요. 무우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포를 휘날리며 힘차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문밖에서 남녀 마족이 대문을 닫고 주위를 경계했다.

    대청 안에는 무우가 남녀 마족들과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한 형, 이제야 오셨습니다!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무우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다.

    “제가 늦은 게 아니라 무 수사께서 너무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시간을 끌 일이 아니니 바로 거래를 시작할까요? 만족스런 물건을 준비하셨을 거라 기대하겠습니다.”

    한립은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대가 다른 수사였다면 무례하다 여겼을 언사였다.

    “성격이 아주 호방하십니다! 저도 바라던 바이니 거래를 시작하시지요.”

    무우는 불쾌한 기색 없이 소매 속에서 여러 개의 영패 허상을 날려 주위에 금제를 발동했다. 이어 그의 손에는 남색의 저물탁이 들려 있었다.

    “수사께서 원하시던 이마금을 담아두었습니다. 수량과 품질이 만족스러운지 확인해 주십시오.”

    무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물탁을 던져주었다. 이에 한립은 상대의 대담함에 감탄했다.

    “그럼 물건을 확인해보겠습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색 저물탁을 받아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의식을 주입했다.

    그는 족히 일다경이 지나서야 눈을 떴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무우가 몸을 굳혔다가 한립의 말에 긴장을 풀었다.

    “괜찮군요. 전부 상품의 이마금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약속한 가격대로 마석을 지불하겠습니다.”

    한립은 소매 속에서 검은 저물탁을 꺼내 던졌다.

    무우는 그것을 의식으로 훑고는 희색을 드러냈다. 한립과 달리 순식간에 확인을 마치고 저물탁을 회수했다.

    “과연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분이십니다!”

    “거래를 마쳤으니 저는 바로 가보겠습니다.”

    한립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셔야죠! 금제를 거두어 드리겠습니다.”

    무우는 예의상이라도 말리는 기색 없이 따라 일어났다. 그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주변의 빛의 장막이 퍽 하고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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