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45화 (1,002/2,000)
  • 1245화. 육극 문하

    *

    베옷 소녀는 기이한 시선으로 한립 손끝의 녹색 기운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의식 한 줄기가 녹색 기운에 접근해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두었고 마족 부인도 의식으로 녹색 기운을 염탐했다.

    베옷 소녀의 표정이 수차례 변했고 마족 부인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한립의 손끝이 떨리더니 녹색 기운이 쉭 하고 사라졌다.

    “죄송하지만 저도 이것을 통제하지 못해 장시간 몸 밖으로 밀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살펴보셨을 테니 알아내신 것을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진지하게 베옷 소녀의 답을 기다렸다.

    녹색 기운은 이마금의 수정구슬이 지닌 신비한 힘을 취하고 남은 물질이었다.

    수정구슬의 힘이 수행을 크게 늘려주고 아주 정순한 법력으로 전환되는 대신 그것이 남긴 녹색 기운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일단 제2원영에 봉인해 둔 채로 나중에 처리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는데 모르는 것이 없다는 광원재에 왔으니 혹시 몰라 물어본 것이다.

    “잠깐 살펴본 것만으로 정확한 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몇 가지 물건들이 떠오르는데 그 속에 답이 있을 지는 한 형께 질문을 드려 답을 들어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시지요.”

    “이것은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조금 전 보여주신 놀라운 위력 외에 다른 특이점은 없습니까? 이것을 체내에 두신지는 얼마나 되었지요?”

    “얻게 된 경로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고, 특성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체내에 지닌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백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그걸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베옷 소녀의 말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베옷 소녀가 이유를 물어보려는데 마족 부인이 앞으로 나서 허공에서 하얀 부적을 잡아챘다.

    “아가씨, 자 소저께서 찾아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합니다.”

    “언니가? 갑자기 어쩐 일로……. 설마 지난번 점괘가 틀린 것은 아닐 테지?”

    베옷 소녀가 뭔가를 떠올리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자 소저의 방문은 언제든 막지 말라 이르셔서 벌써 올라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다른 손님이 있으시면 저는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부인의 말에 한립이 눈치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 아주 친한 벗인데 간단히 몇 마디만 나눌 것이고 심각한 일도 아니니 여기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영,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점을 보았는데 효험이 없었으니 해명을 해야 할 것이야. 오늘로 네가 말한 기한이 끝나는데 내가 만나고 싶다는 분은 어디에 있지? 고의로 날 놀린 거면 점술의 대가로 지불한 귀한 영약들을 배로 보상해야 할 거야.”

    4층 계단 입구에서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전신에 두른 검은 기운 너머로 희미하게 보라색 기다란 치마와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옆에 무심하게 서있던 한립이 흑사 여인을 보고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이 동요로 흔들렸다. 자의(紫衣) 여인도 그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이었다.

    “남 선자, 이분은…….”

    “본 재의 귀빈인 한 수사에요. 주 이모보다 수행이 뛰어난 분인데……. 설마 아는 분이에요?”

    베옷 소녀가 한립과 흑사 소녀의 표정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한 수사시라고?”

    자의 여인은 바르르 몸을 떨며 한립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걸 본 한립은 마음속 의심을 접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장포를 펄럭이자 푸른 기운으로 가렸던 몸이 줄어들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령, 그간 잘 지냈는가?”

    자의(紫衣) 여인은 한립의 모습에 순간 멍해졌다. 그녀 역시 가리고 있던 검은 기운을 흩트리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안색이 창백했지만 분명 인계에서 만난 자령이었다.

    그녀는 기운이 크게 달라져 정순한 마공을 익히고 있는데다 수행이 연허 후기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가 남폭성에 도착해 보았던 뒷모습은 자령이 분명했다.

    당년 그와 그녀 사이에 봄바람이 스치고 오랜 세월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수많은 여 수사 중 남궁완을 제외하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이가 있다면 바로 자령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마계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그는 감개무량했고 이름을 부르며 이전보다 그녀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도 훨씬 편해져 있었다.

    “이번 생에 한 형을 다시 볼 날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직접 제 눈으로 보고도, 너무 그리워하다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예요.”

    드디어 입을 연 자령의 부드러운 말소리가 한립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비승한 후 자네의 소식이 들려오는지 살폈는데 이제껏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네. 그런데 마계에 있을 줄이야!”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순간 옆에서 지켜보던 베옷 소녀와 ‘주 이모’라는 부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마족 부인은 한발 앞으로 나서 남영의 앞을 막아서려했으나 베옷 소녀는 한립의 표정을 보고 사정을 짐작했는지 웃는 얼굴로 그런 부인을 말렸다.

    “자 선자께서 잊지 못하던 매정한 분이 누군가 했더니 한 수사셨습니다! 하하,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리 영준한 모습도 아닌걸요? 제가 점을 봐드리지 않았으면 언니가 오늘 이곳에 올 일도 없었고, 두 분도 다시 만나지 못했겠죠. 두 분이 얼싸안고 애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 일등 공신을 제거해 입을 막으려는 것은 아니실 테죠?”

    “얼싸안다니, 뭐라는 것이야! 지난번 점괘야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맞춘 것이고! 한 형, 남 선자는 저와 아주 가까운 벗이니 우리가 인계 출신 수사라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광원재 자체가 마계 세력이 아니라 여러 계면에 걸쳐 퍼져있는 거대 세력의 지부이고요. 그녀 같은 대리자가 각 계면에 열댓 명은 있고 심지어는 인계에서 발을 뻗치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마족의 여러 성조들 사이에서 광원재가 오랜 세월 유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자령은 베옷 소녀를 가볍게 나무란 다음 한립에게 설명해주었다. 견문이 넓은 한립도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여러 계면에 걸쳐 있는 거대 세력이라면 어째서 인계에서는 광원재란 곳을 들어보지 못한 것인가?”

    “의심도 많으시네요. 자령 선자께서 본 재(本齋)가 다른 계면에서도 ‘광원재(廣源齋)’로 활동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면을 넘나드는 실력자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당연히 각 계면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르답니다.”

    베옷 소녀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대신 답했다.

    “그랬군요. 제가 실례했습니다.”

    한립은 그녀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의아하던 부분이 해소되었다.

    “남영, 한 형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은 아니잖아. 우리가 친자매처럼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모르면 당연히 신중하게 대처할 수밖에.”

    “와아, 자령 언니가 사내를 두둔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우정보다는 애정이라 이것이지요?”

    베옷 소녀가 눈을 깜빡 거리며 장난스럽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한립을 상대할 때의 모습과는 달리 평범한 소녀처럼 느껴졌다.

    “또 헛소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령이 얼굴이 붉어져 베옷 소녀를 흘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영이 정색하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셨으니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저와 주 이모는 5층으로 비켜드릴 것이니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광원재 금제가 얼마나 효과가 좋은 지는 자령 선자도 잘 아실 겁니다. 이곳의 금제 영패이니 쓰시고 돌려주시면 됩니다.”

    소녀가 말을 마치고 품에서 하얀 영패를 꺼내 던져주었다.

    “호의 고맙게 받을게.”

    “저는 물러납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베옷 소녀는 인사를 하고 부인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소녀는 5층의 고풍스런 방으로 들어가 앉았고 그 옆에는 부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주 이모는 한 수사가 어떤 것 같아요?”

    “어떠하다니요? 어떤 것을 물어보시는 것인지…….”

    “일단 실력이요. 합체기 수행을 지닌 ‘한 수사’라면 최근 마계를 시끄럽게 만든 위선뢰를 지녔다는 인족 수사가 아니겠어요?”

    “예, 한 씨 성을 지닌 인족 수사면 십중팔구 그자가 맞을 겁니다. 실력은 손속을 겨뤄보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지만 기운이 복잡한 것이 평범한 합체기 수사로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주 위험한 예감이 드는 것으로 보아 그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이 적지 않을 테고요.”

    “그렇다면 꼭 위선뢰 때문이 아니라도 회유할 가치는 있는 자겠네요.”

    눈을 빛낸 베옷 소녀가 유유히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러는 것이 좋겠지요! 자령 소저와 가까운 사이라 호의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어째서 그러십니까?”

    “저와 자령 언니가 친자매 같은 사이인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를 회유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대화를 나누며 살핀 바로는 의지가 굳은 자라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것 같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익을 주고 교분을 다지는 것이 낫지요.”

    “이전 주인님이 계실 때 아가씨의 지략을 칭찬하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십니다. 그럼 아가씨의 판단이 맞을 거예요. 하지만 현재 약해진 광원재의 세력으로 보통이 아닌 합체 후기 수사의 눈에 들 만한 물건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광원재의 본업이 무엇인지 잊으셨나요?”

    베옷 소녀가 신비로운 웃음을 흘렸다.

    * * *

    같은 시각 자령은 영패를 들고 주문을 외워 4층 전체를 다채로운 빛깔의 금제들로 가득 채웠다. 그 안에는 한립과 자령 뿐이었다.

    “자령, 인계에 있을 적에는 주 수련 공법이 마공이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어쩌다 마계로 오게 된 것인가? 게다가 단시간에 마공을 연허기 경지까지 익히다니.”

    자령이 발산하는 정순한 마기를 확인한 그가 미간을 좁혔다.

    “말하자면 사연이 깁니다. 그보다 최근 성계를 뒤집어 놓은 인족 수사가 한 형이 맞나요?”

    “또 다른 마계로 침입한 인족 수사가 없다면 내가 맞을 것이네.”

    “역시 그랬군요! 소문에는 한 형이 합체 후기의 수행에 강력한 신통은 물론 성조급 거대 게 꼭두각시를 지니고 있다던데요?”

    “하하, 과장된 면이 있지만 대부분 사실일세. 게 꼭두각시는 곁에 머물 뿐 나를 주인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고 말이야.”

    “영계로 비승한 후에 어찌 지냈는지 모르지만 단시간에 대승기를 한걸음 앞둔 경지까지 오르느라 그간 적잖이 고생을 했겠어요.”

    “곡절이 없다고 할 수는 없네. 하지만 이미 지난 일들이고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헛고생은 아니었네. 자네도 정순한 마기를 지닌 것이 합체기에 이를 날이 머지않았군.”

    “빠르면 십 수 년 넉넉잡아도 백 년 내로는 합체기 경지에 도전해볼 생각이에요. 마계로 온 이후 누군가 넉넉하게 지원을 해줘서 필요한 단약도 확보되어 있고요. 제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연허기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령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원? 그냥 지원할 리는 없고 목적이 있겠지?”

    “휴우, 한 형도 육극 성조에 대해서 아시겠죠?”

    “육극 성조라면 알고 있네. 마계에서 3대 시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은 자라지! 직접 만나보지는 않았네만 그녀가 자네를 지원한단 말인가?”

    “예, 제가 육극 성조 문하의 일곱 제자 중 막내입니다. 말이 좋아 제자이고 예비 화신(化身)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요.”

    자령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한립이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내뱉었다.

    “예비 화신? 그자가 자네에게 금제를 심어 놓은 것인가!”

    한립은 바로 그 의미를 알아듣고 노기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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