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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44화 (1,001/2,000)

1244화. 광원재(廣源齋)

*

한식경 후,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온 한립 앞에 5층 누각이 나타났다. 누각은 그 세월을 알 수 없을 만큼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누각 앞에 녹색 장포를 입은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댓 살 가량의 고운 소녀는 하녀 복장이었다.

“희아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저희 아가씨가 기다리시니 저를 따라가시지요.”

“아가씨? 광원재의 주인이 여인일 줄은 몰랐는데. 알았다. 먼저 가거라.”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녀를 따라 누각 대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들어선 순간 소름끼치는 한기가 느껴졌지만 법력을 일으키자 씻은 듯 사라졌다. 의식으로 주위를 훑으니 보일 듯 말 듯 금제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이곳 주인은 그조차 위험하다고 느낄만한 강력한 금제를 펼쳐 놓은 것이다.

1층은 간단한 탁자와 의자 그리고 네 벽에 걸린 고화(古畫) 몇 점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이 없었다. 한립은 고풍스런 그림들을 잠시보다 웃음기가 스쳤다.

벽에 걸린 그림에는 온전치 못한 녹슨 구리거울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다른 세 벽의 남색 장검, 금색 장창, 검은색 영패가 그려진 그림들도 생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빨리 네 고화의 현묘함을 알아보신 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안목으로는 이곳을 찾아주신 손님들 중 100분 안에 들겠어요.”

녹의 하녀가 놀랐다는 눈빛을 보냈다.

“겨우 백 명 안에 든다?”

“100분 중 만일 선배님처럼 연허기 수행을 지닌 분을 꼽으라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녀가 서둘러 해명했다.

“허허, 저 네 폭의 그림이 평범한 사상진(四象陣)이라 여긴다면 금제에 당해 순식간에 죽게 될 테지. 너희가 꽁꽁 숨겨 놓은 또 다른 진법이 있으니까. 이걸 알아본 이는 몇이나 되더냐?”

한립이 냉소하며 하녀를 바라보았다.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그것을 알아낸 분은 열 분이 넘지 않고 전부 마존 급 선배님들이셨지요. 선배님은 2층의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으실 듯하니 바로 3층 아가씨께 모시겠습니다.”

놀란 하녀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그래, 나도 남폭호 내에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광원재 주인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구나.”

한립은 희아라는 녹의 하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1층과 비슷하게 간단히 나무로 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곳곳에 이름 모를 풀과 꽃이 담긴 화분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화분 앞에 회백발의 유난히 가냘프게 생긴 마족 부인이 서있었다. 한립이 2층에 이렀을 때 그녀는 푸른 옥병을 기울여 주홍색 식물에 물을 주고 있었다.

“주 이모님, 이분께서 아가씨가 뵙고자하는 손님이십니다. 1층의 두 번째 금제를 알아채셔서 제가 바로 아가씨께 모시려 합니다.”

녹의 소녀가 부인을 향해 아주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오, 두 번째 금제를 알아내다니 대단하구나. ……이런, 수행을 숨기고 계셨군요.”

평온하게 뒤를 돌아본 마족 부인이 한립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한립도 상대가 마족 존자에다 합체 후기를 대성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한립은 상대가 자신이 수행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한 번에 알아채자 잠시 침음하다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수사처럼 수행이 높으신 분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편의를 위해 숨긴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수사나 저와 같은 수행을 지닌 이들은 쉽게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끄니까요. 수사께서 친히 본 재를 찾아주셨는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희아, 너는 물러가도 된다.”

마족 부인도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녹의 하녀에게 명을 내렸다.

“예, 주 이모님!”

녹의 소녀는 마족 부인의 말을 듣고 소리 없이 아래층으로 물러났다.

“마존 급 귀빈이 오셨으니 당연히 아가씨를 만나셔야지요.”

부인이 한립에게 담담히 설명하고 3층 계단 입구에 섰다. 노란빛이 날아올라 금제를 제거했고, 부인의 소매 속에서 회색 주술문자가 날아올라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은 아무 말 없이 부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누각 3층은 황실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대청 중앙에는 백옥으로 만든 탁자와 팔괘와 같이 점을 치는데 쓰는 기구들과 작은 화로가 놓여 있었다. 화로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대청 안을 향기롭게 채우고 있었다.

옥 탁자 뒤로 아름다운 황포 소녀가 손바닥만 한 옥 부채를 만지작거리고 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무척 여유로웠다.

그리고 대청 양쪽으로 각각 여인 넷, 사내 넷이 하인의 복장을 하고 서있었다. 젊은 마족들은 남녀를 따질 것 없이 얼굴이 곱고 영준하게 생겼다. 화신의 경지에 이른 그들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자리를 지켰다.

마족 부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한립을 데리고 4층 계단으로 향했다.

황포 소녀와 3층의 마족들은 부인과 한립의 출현에 멀리서 예를 취했다. 부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을 저어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용모나 분위기 그리고 소녀를 떠받드는 하인들의 존재로 누구나 황포 소녀를 광원재의 ‘아가씨’로 믿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진짜 ‘아가씨’의 정체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났다.

마침내 4층으로 올라간 한립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곳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마치 어느 농가의 시골집처럼 꾸며져 있었다.

계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초가집에는 간단히 나무 의자와 낡은 나무 침상이 전부였고 침상의 이불마저 결이 거친 광목천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베옷을 입은 가냘픈 여인이 나무토막에 앉아 자연스럽게 물레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삼베가 천천히 짜여 지면에 쌓여갔다.

의식으로 소녀를 살피던 한립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수행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의식으로 자세히 살피려 하자 무형의 힘에 밀려났다.

의식을 배척하는데 효과를 지닌 강력한 보물로 보호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마족 부인이 조용히 베옷 소녀 옆으로 가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섰고 한립은 계단 근처에 서서 담담한 눈길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소녀의 얼굴은 너무 평범했다. 굳이 특별한 것을 찾으라면 이마가 넓고 무언가에 집중해 있는 모습이 절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소녀는 숙련된 동작으로 일다경 만에 물레를 다 돌렸다. 소녀가 바닥에 쌓인 삼베의 양을 눈짐작으로 헤아리고 활짝 웃음 지었다.

“주 이모, 죄송해요. 또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네요.”

주위를 둘러본 소녀가 미안한 기색으로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듣기 좋은 목소리도 아닌데 자성(磁性)이 있는 것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가씨의 동의도 없이 손님을 모시고 온 것을 사죄드려야지요.”

부인은 베옷 소녀의 수행을 훨씬 넘어서는데도 자신을 낮추었다. 그걸 본 한립이 화들짝 놀라 베옷 소녀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마족 성조 화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주 이모께서 모시고 온 분이면 귀빈이실 겁니다. 저는 남영이라 합니다. 수사를 어찌 불러드려야 할지요.”

베옷 소녀가 미소를 짓고 한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수사라 부르시면 됩니다. 선자께서 광원재의 주인이라니 예상 밖이군요.”

“한 형께서는 제가 광원재 주인이 되기에 모자람이 있다 여기시나요?”

“수행이나 용모로 보나 아래층의 대리인이 더 광원재의 ‘아가씨’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대리인은 대리인일 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인정할 수 없겠는걸요. 3층의 시녀는 겉만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손님을 맞이해 일처리도 곧 잘 한답니다. 물론 한 형 같은 분은 도와드릴 수 없겠지만요.”

“허허, 그랬군요. 귀 재의 명성은 대부분 아가씨의 시녀가 쌓은 것인가 봅니다.”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직접 맞이할 만한 귀빈은 사실 얼마 되지 않거든요. 한 수사께서는 올해에 제가 만난 세 번째 손님이고요. 자, 그럼 앉아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실까요? 충분한 가격만 치르신다면 본 재는 분명 수사를 만족시켜드릴 것입니다.”

베옷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레 한립에게 자리를 권했다. 한립이 손을 뻗어 주변의 낡은 의자를 불러들여 베옷 소녀 앞으로 이동해 앉았다.

“찾아주시기 전에 어느 정도 알아보셨겠지만 관례에 따라 규칙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개의치 않으시겠지요?”

“저는 남폭호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남 선자께 직접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는 정보를 거래하는 곳이지 손님의 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성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지는 못해도 중대사는 파악하고 있고 광원재의 역대 주인은 점술에 능해 저희가 모르는 정보에 대해서는 손님을 대신해 점을 봐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술은 수명을 대가로 하기에 그 가격이 높은 것은 당연하겠지요? 저희도 보통 점술을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밖에 정보를 듣고 만족하셨다면 외부에 누설하시면 안 됩니다. 이를 어기면 불청객 명단에 올라 이후로 본 재와는 거래가 불가합니다. 나머지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 한 수사께서 어길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내용입니다만 이전에 이곳을 방문한 손님들은 얼마나 만족해서 돌아갔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전 상황은 모르지만 제가 광원재를 맡고는 실망해서 돌아간 분은 한 분도 없었답니다.”

“한 명도 실망해 돌아가지 않았다니 안심입니다.”

한립은 속으로 베옷 소녀의 답변에 움찔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저희에 대한 의심과 우려를 거두셨으면 이제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보의 희소성과 중요도를 따져 비용을 결정할 것입니다.”

“남폭성에서 충분한 수량의 상품 혈아미를 구할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베옷 소녀의 진지한 물음에 한립이 또박또박 원하는 바를 말했다.

“혈아미! 한 수사께서 얻으려는 소식이 그것일 줄은 몰랐네요.”

베옷 소녀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빙긋 웃어 보였다.

“그게 이상한 일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광원재를 찾는 손님 열에 두셋은 비슷한 정보를 물어보신답니다. 본 재는 관련 정보를 지니고 있지만 가격이 낮지 않다는 것은 말씀드려야겠군요.”

“정확한 정보라면 가격이 높아도 상관없습니다. 구매하지요.”

한립은 일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자 희색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옥간 속에 간단한 정보와 가격이 적혀 있으니 확인해 보시지요.”

베옷 소녀가 검은 돌조각 형태의 물건을 던져주었다.

한립은 돌조각을 받아 곧바로 의식을 불어넣었고 베옷 소녀는 단정히 앉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성주부 내에 혈아미를 대량으로 판매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누구든 성주부 안에서 지위가 상당하겠군요. 원하시는 가격을 지불할 테니 연락할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다른 돌조각을 날려 보냈다. 이번에도 한립은 의식을 불어 넣어 연락방법을 확인했다.

퍼석!

그는 두 손을 교차해 돌조각을 가루로 만들고 하얀 옥함을 꺼내 들었다.

“이거라면 정보를 주신 값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남 선자께서 보시고 문제가 없다 여기시면 다른 일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오, 다른 일도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지요. 말씀해 보세요.”

베옷 소녀는 뚜껑이 닫혀 있는 옥함을 불러들여 슬쩍 훑고 밝게 미소 지었다.

“이것의 내력을 아십니까?”

한립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끝에서 녹색 실을 내뿜었다.

녹색 실은 물레를 빙글 돌아 그의 손끝으로 돌아와 작은 녹색 덩어리로 변했다.

다음 순간 물레가 펑 하고 먼지처럼 변해 흩어졌다. 그러자 베옷 소녀와 마족 부인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평범해 보이는 물레는 사실 보조형 마기로 현묘한 몇 가지 신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지 않다면 베옷 소녀도 종일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소녀가 표정이 달라진 이유는 물레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마계에서 초마목(焦魔木)이라 불리는 재료로 아주 단단한 마기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물레가 녹색 기운의 일격에 먼지처럼 변했으니 놀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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