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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42화 (999/2,000)

1242화. 흑사(黑紗) 여인

*

두 시진 후, 멀리 검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은 점이 커져 거대한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은 남색 빛을 일렁이는 눈으로 섬 외곽을 따라 세워진 성벽을 살폈다.

옆의 남색 바위를 깎아 만든 성벽은 다른 성들과 큰 차이가 없었고 그 위에 무장한 마족 병사들이 서있었다.

배가 향하는 정면에는 반달 형태의 성문이 있었고, 그 앞을 또 다른 마족 병사들이 지키고 서있었다.

관앙은 성문 가까운 물가에 나무배를 대고 직접 한립을 성문 밖까지 안내했다.

창을 든 마족 병사들과도 안면이 있는지 그가 몇 마디 하자 한립을 검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립은 성 안에 들어서서 양쪽으로 늘어선 건물들을 훑고는 관앙을 향해 중계 마석 몇 개를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후한 뱃삯에 마족 사내가 밝은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고계 마족을 남폭성으로 모시고 와도 중계 마석 1, 2개를 받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 서너 배에 상당하는 마석을 받은 것이다.

한립은 손을 저어 이제 그만 가 봐도 좋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떠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선배님, 원하는 결과를 얻으시려면 광원재(廣源齋)에 한 번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립이 더 묻기도 전에 관앙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성문 쪽으로 뛰어갔다.

‘광원재? 한 번 가봐야겠는 걸.’

한립이 놀란 기색을 지우고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남폭성 안에도 금공금제가 걸려 있어 그는 마차를 세워 ‘가장 큰 점포’로 가자고 말했다.

남폭성은 평범한 성들보다는 훨씬 시끌벅적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연기, 축기기의 저계 마족이 주를 이루었지만 화신, 연허기 고계 마족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마차를 타고 지나며 마존 급도 두 명이나 발견했다.

마차가 막 어느 길에 접어들자 눈을 감고 있던 한립이 눈을 크게 떴다.

“엇, 저 여인은…….”

그는 표정이 확 달라지며 깜짝 놀라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아니, 기운이 완전히 다른데 그녀일리가!’

점포 안으로 들어서는 가느다란 여인의 뒷모습을 보던 한립이 실망한 기색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계에서 비승을 했다면 영계에 있겠지 어찌 마계에 있겠는가. 뒷모습이 너무 흡사해 착각한 것이겠지. 요즘 수행이 급격히 늘어나 마음의 평정을 잃은 것인가?”

그는 잠시 고민하다 급히 연신결(煉神決)을 일으켜 마음을 가라앉혔다.

* * *

그때 고계 마족 몇 명과 점포로 들어선 여인은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검은 면사는 마기가 응결해 얇은 천의 형태를 띤 것이었다.

강력한 의식을 지닌 한립은 강제로 마기를 뚫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성 안에 있는 마존 수사를 경계해 시도하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오자 장궤 복장을 한 노인이 얼른 점원들을 데리고 와 여인을 뒤쪽의 비밀스런 방으로 안내했다.

“사자 대인을 뵙습니다! 늙은이가 대인의 명을 받아 물건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잘했네. 어제 말한 것을 오늘 벌써 준비해 두었다니 료 장궤의 수완이 보통이 아닐세. 겨우 이곳만 경영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의자에 앉은 흑사(黑紗) 여인은 꾀꼬리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인을 칭찬했다.

“아닙니다. 저야 그저 대인의 명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 수완이랄 것도 없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띤 료 장궤가 겸손히 답했다.

“석화, 물건을 옮기게.”

흑사 여인은 머리에 외뿔이 솟은 거한에게 명을 내렸다.

“예, 아가씨!”

마족 거한이 가게의 일꾼을 따라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인은 의자에 앉아 더는 입을 열지 않았고 노인과 다른 고계 마족도 조용히 서서 입을 열지 않았다.

일다경 후, 마족 거한이 일꾼과 같이 돌아와 여인에게 고했다.

“료 장궤가 이곳을 맡은 지 몇 년이나 되었지?”

“소인 2백 년 전부터 줄곧 상점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료 장궤는 깜짝 놀랐지만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하아, 2백 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일세. 그동안 두둑하게 챙겼겠어?”

“사자 대인, 오해십니다! 소인 이곳을 맡은 이후 한 번도 꾀를 부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감찰 대인이라 하셔도 무고한 사람을 벌하실 수는 없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스스로 알 것이다. 모석, 물건을 꺼내 보여주게.”

학사는 냉소하며 노인 뒤에 있는 상점 일꾼 한 명을 바라보았다.

“예, 아가씨! 최근 십수 년 간 상점에 들고나는 물건의 수량과 가격 그리고 거래 대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어려보이는 청수한 소년이 여인의 부름에 품에서 검은 장부를 꺼내 놓았다. 소년의 명랑한 목소리에 료 장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휙!

흑사 여인이 검은 장부를 끌어와 조사하기 시작했다.

“장궤가 보여준 장부의 내용과는 확연히 다르군. 겨우 십수 년 간 이렇게 많은 자금을 빼돌리다니, 할 말이 있으면 해보게!”

“모석, 네 놈이 감히 내 등에 칼을 꽂아? 아가씨, 저 녀석이 노부에게 원한이 있어 거짓을 꾸민 것입니다. 그 장부는 결단코 가짜입니다!”

“장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내 자네에게 추혼술을 써서 알아낼 일이네. 사실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고, 거짓이면 내가 자네를 대신해 복수해주지.”

흑사 여인의 말에 료 장궤가 혼비백산했다.

“아, 안 돼!”

노인이 돌연 소매를 펄럭여 검은 안개를 뿌리고 다른 손으로 노란 부적을 꺼내들었다. 료 장궤의 신형이 모호하게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겨우 결단기 주제에 내 앞에서 수를 쓰는 게냐?”

흑사 여인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고 대신 석화라 불리는 마족 거한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광풍이 불어 검은 안개를 쓸어버렸고 동시에 료 장궤는 몸이 절반만 바닥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가씨, 살려주십시오! 제가 가진 건 뭐든 다…….”

료 장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자 흑사 여인이 한숨을 쉬며 곧바로 손을 튕겨 검은 빛으로 노인의 미간을 관통했다.

털썩

석화가 손을 거두자 노인의 시체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쉽게도 난 지닌 것이 많아 네가 가진 것은 눈에 차지 않는구나. 모석, 오늘부터 이곳의 장궤는 너다. 석화는 시체를 정리하고 따르게. 아직 들려야할 곳이 많으니까.”

흑사 여인은 빠르게 명령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모석이라 불린 마족 소년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뤂을 끓고 감사를 표했다.

마족 거한은 입에서 검은 불덩이를 뿜어 노인의 시체를 재로 만든 다음 흉흉한 웃음을 짓고 여인을 따라 나갔다.

* * *

“이곳이 가장 큰 점포라고?”

한립은 마차에서 내려 낡은 누각을 보고 마부를 향해 물었다. 그곳에는 ‘채헌각(彩軒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선배님, 채헌각이 겉보기는 이래도 본 성에서 유서 깊은 상점입니다.”

마부는 확신에 차있었다.

“알겠네.”

의심을 거둔 한립은 마석을 지불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그가 막 누각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미약한 공간 파동이 일고 거대한 대청이 눈앞에 나타났다.

“과연 공간 마기를 이용해 작은 수미공간을 만들어 두었어. 이곳이 남폭성에서 규모가 있는 상점은 분명하구나.”

대청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절반은 평범한 상점처럼 진열대에 각종 재료와 보물이 놓여 있었고 진열대마다 그곳을 담당하는 아리따운 젊은 시녀들이 서있었다. 진열대 옆 열댓 명의 남녀들이 원하는 물건을 고르면 시녀들은 살갑게 다가가 설명을 해주었다.

대청의 나머지 절반은 푸른빛의 장막으로 모호하게 가려져 있었고 입구로 보이는 곳을 푸른 의식을 입은 시종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빛의 장막 너머로 흐릿하게 진열대와 그 위에 놓인 물건들이 보였다. 뭔지는 몰라도 바깥의 물건보다는 귀한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억눌렀던 수행을 조금 풀어 놓아 연허 후기의 기운을 드러냈다. 그러자 다들 그를 향해 경외감 어린 시선을 보냈고 빛 장막 속에서 수행이 바깥 시녀들을 월등히 초월하는 마족 여인이 걸어 나왔다.

스물서너 살로 보이는 외양에 비단 장포를 입은 점잖은 여인이었다.

“채헌각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본 각의 장궤 대리를 맡고 있는 효안이라 합니다.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여인은 화신기 고계 마족이었다.

“이곳이 남폭성에서 가장 큰 상점이라 들었네, 사실인가?”

“가장 크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어도 보유한 물건의 종류나 품질로는 으뜸이라 자부합니다.”

한립의 물음에 효안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내가 잘 찾아왔나 보군. 이곳에서 대량으로 구매하고 싶은 물건이 있네.”

“선배님께서 거래를 해주시면 본 각의 영광이지요. 저를 따라 2층의 귀빈실로 가시지요?”

효안은 희색을 드러내며 자리를 옮기기를 권했다. 한립의 수행에 대량이라는 말이 나왔으면 엄청난 액수가 오갈 거란 뜻이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그는 우아하게 장식된 방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것은 의식을 배양하는데 효과가 있는 마우차(魔芋茶)로 남폭호 특산물입니다. 본 각에서도 매 년 수십 근 밖에 구하지 못하는 진귀한 물건입니다.”

옆에 선 금포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설명했다.

“허나 내 수행에는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차를 맛 본 한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선배님의 눈에 드는 차는 아니겠지요. 어떤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하시려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마금과 혈아미일세.”

한립은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마금’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효안은 ‘혈아미’란 소리에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문제라도 있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마금은 진귀하기는 해도 본각의 창고에 비축해둔 것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혈아미는,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남폭성이 혈아미를 엄히 관리 한다 듣기는 했네. 아무리 수행이 높아도 1년에 몇 개밖에는 구할 수 없다지? 귀 각에서 나를 위해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해 줄 수는 없겠나?”

“선배님께서는 혈아미 생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시는군요.”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현지 사정에 어둡다네. 수사가 설명을 해줄 수 있겠나?”

쓴웃음을 짓는 금포 여인을 보고 한립이 조용히 물었다.

“비밀도 아닌데 당연히 설명해 드릴 수 있지요. 저희 채헌각이 다른 재료나 보물은 여러 경로를 통해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유일하게 혈아미는 본 성의 특산품인데다 성주부(城主府)에서 직접 관리해 그러기 어렵습니다.

매년 성주부로 가서 약간씩 받아오는데 저희가 성 안에서 가장 큰 점포 중 하나인데도 지니고 있는 수량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주부의 규칙에 의해 혈아미 거래는 반드시 기록해두어야 하고 매년 꼼꼼하게 검사를 받습니다.”

금포 여인이 솔직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아예 구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너무 죄송하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겠습니다. 선배님께서 두세 개를 구하는 것이면 질책을 감수하고 판매를 하겠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허허, 그럴 것이었으면 일부러 채헌각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네. 혈아미는 되었으니 이마금 이야기나 하세. 얼마나 보유하고 있고 가격은 어떻게 되지?”

한립은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이마금이라면 수량이 상당합니다! 막 물건이 들어와 백 개가 넘으니까요.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수량을 말씀하시면 제가 가격은 잘 쳐드리겠습니다.”

“백여 개라, 전부 가져와 보게.”

“저, 전부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요?”

놀란 금포 여인이 작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가 말장난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제가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사람을 시켜 물건을 죄다 내오게 하겠습니다!”

금포 여인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주 싹싹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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