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241화 (998/2,000)
  • 1241화. 남폭호(藍瀑湖)

    *

    핏빛이 용처럼 좌우로 뻗어나가 허상을 갈랐으나 더 많은 거대 꽃 허상이 나타나 날아들었다.

    핏빛이 파죽지세로 거대 꽃을 베어냈기에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분홍꽃의 천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때 현천화계 중심에 선 보화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휘잉!

    그녀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분홍 꽃나무에서 무수히 많은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보화를 휘감았다.

    노파는 주변이 모호해진다고 느낀 순간 화계(花界)의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대, 대나이술(大挪移術)!”

    노파가 비명을 지르며 얼른 주변을 살폈다. 화계 가장자리까지 달아났던 천읍이 핏빛이 어느새 그녀와 머지않은 곳으로 옮겨져 분홍 거대 꽃 허상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노파가 머뭇거리다 힘을 합쳐야할지 말아야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허공에 파문이 일고 분홍 거대 꽃 허상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노파는 지팡이를 던져 사람만한 하얀 거위를 만들어냈다.

    쉬쉬쉭!

    거위의 날갯짓에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들이 쏘아져나갔다.

    키에엑!

    노파가 수결을 맺어 자신의 뒤통수를 때려 노란 기운을 일으켰다. 노란 기운은 스산한 비명을 지르며 악귀 얼굴로 변해갔다.

    악귀 얼굴은 요염한 자태의 미녀였지만 나머지는 아주 추악하고 징그러워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입에서 뿜은 마풍이 주변의 모래와 돌을 끌어들여 화계 안에 회색 돌풍을 일으켰다.

    이에 천읍은 단시간 내로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핏빛 둔광을 거두고 몸을 떨었다. 그러자 시뻘건 사자 허상이 나타나 핏빛 안개로 거대 꽃 허상들을 날려 보냈다.

    두 노마들은 화계 안에 그들만의 영역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 모습에 보화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볍게 손에 들고 있던 꽃나무를 흔들자 백여 송이가 넘는 거대 꽃들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가라.”

    보화의 말에 분홍 거대 꽃들이 화륵! 마염으로 변해 일대를 분홍색 불바다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리 넓지 않았던 불바다가 주변의 꽃 허상들과 융합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천읍과 학안이 그걸 보고 안색이 급변해 품에서 각자 핏빛 단약을 꺼내 복용했다. 그들은 기운이 한순간 크게 증폭되었고 강력한 마공을 발동하려 했다.

    마계에서 최상급 존재인 그들도 보화의 화계에서는 천지원기를 끌어 쓸 수 없어 단약으로 잠재력을 끌어올려 분홍 마염에 맞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고공의 분홍 마염이 내려앉아 두 노마가 자취를 감추었다. 현천화계 전체가 분홍 화염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때, 분홍 꽃나무도 듬성듬성해져 있었고 크기도 이전보다 5분의 1이 줄어 있었다. 주문을 마친 보화의 옥 같은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매 속에서 하얀 단약을 꺼내 복용했고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바닥 위 꽃나무를 품에 안았다.

    천읍과 학안, 그 노괴들의 실력은 잘 알고 있기에 천지원기의 보조가 없어도 마염으로 쉽게 죽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일단 가둬두었으니 어쩔 수 없이 장기전으로 가야했다.

    시간이 흘러 이레째 되는 날. 분홍 마염으로 가득했던 화계가 불안정하게 바르르 떨렸다.

    휙! 휙!

    화계에 가느다란 틈을 만든 검붉은 불구슬과 핏빛 덩어리가 하늘로 솟아올라 달아났다.

    “비열한 계집 대승기 수행을 회복하지도 않고 허세를 부려! 날 다시 만나는 날 네 숨통도 끊길 것이다!”

    멀리 불구슬 속 손바닥 크기의 원영이 처절하게 고함을 지르더니 순식간에 불구슬과 핏빛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보화가 한숨을 내쉬고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마염이 저절로 줄어들어 십여 송이의 분홍 거대 꽃으로 응결해 꽃나무로 돌아왔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는 듯했다.

    동시에 현천영역도 펑 하고 터져 빛의 점으로 흩어졌다. 점점 줄어들던 꽃나무는 작은 빛구슬로 변해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공들인 계획이 허사가 되었구나! 육신이 재가 되었어도 저들은 몇 백 년 후면 실력을 되찾을 테지.”

    보화가 몸을 일으키다 비정상적인 열기에 잠시 휘청거렸다. 의식으로 자신의 몸을 살핀 보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휴우, 저들을 죽이려 들지만 않았으면 부상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을. 영약을 손에 넣고도 본래의 신통을 회복하는데 2, 3백 년은 걸리게 생겼구나. 현천영역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들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상관없다. 영계로 돌아가 한동안 정양(靜養)하면 그만이니까.”

    분홍 기운이 진하게 번진 뒤 보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 *

    회백색 언덕 위에 선 한립이 뒷짐을 쥐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는데 하얀 물고기들이 노니는 짙푸른 호수는 생기가 넘쳤다.

    “남폭호라는 이름답게 마계의 다른 호수와는 다르구나.”

    한립이 시선을 거두고 그의 뒤에 있던 해맑은 얼굴은 청년과 큰 눈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해 도인과 주과아였다.

    소령천에서 온 어린 계집은 한립이 고계 마족들을 무찌르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그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녀는 이전보다 더 활기찬 얼굴로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한 선배님, 남폭호에는 마족 성조가 있다는데 이렇게 가도 될까요?”

    “남폭성조? 남폭호를 오랜 세월 독점했으면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거겠지. 허나 내겐 혈아미가 꼭 필요해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 또한 남폭성조는 오래 전 은거에 들어가 지금도 호수에 있는지 알 수 없고, 표면적으로 그곳을 지키는 것은 그의 화신과 두 명의 제자라고 하더구나.”

    그녀의 물음에 한립이 작게 미소 지었다.

    “선배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신데 제가 괜히 입을 놀렸나 봅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내 우리가 마계에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니 남폭호에는 따로 움직여야겠다. 과아, 너는 내가 용모를 바꾸고 상황을 알아보는 동안 해 수사와 함께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나는 대승기 수사와 직접 맞닥뜨리지 않는 한 들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주과아는 해 도인과 단둘이 머물라는 소리에 내심 기뻐하며 답했다. 아직 해 도인이 괴뢰라는 것을 모르는 소녀는 그에게 정체모를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해 도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성이 있기는 해도 한립과 계약을 맺었고 그동안 적잖은 위조화로를 보수로 받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괴뢰술에 정통한 한립은 해 도인과 지내며 그의 상황을 일정 부분 이해하게 되었다.

    해 도인은 겉모습은 보통 사람과 똑같았지만 원주인이 펼쳐 놓은 여러 금제의 제한을 받아 그것들을 위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또 상당 부분 자유로워 한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해 도인이 곁에 있다고 마계에서 아예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시조 급들은 각자 시급한 일이 있어 그에게만 신경 쓸 수 없었고, 다른 성조들은 서로의 입장 때문에 서로 힘을 합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대담하게 마계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드득!

    한립은 주과아와 해 도인에게 몇 마디 당부를 하고는 골격을 이리저리 움직여 키가 크고 우아한 인상의 중년 사내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가 땅을 박차고 검은 빛으로 하늘을 가르는 것을 지며보던 해 도인이 장포에서 금색 기운을 날려 주과아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 * *

    한립은 전속력을 내지 않아도 매우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곧 푸른 수면 위의 작은 섬들과 그 위에 지어진 작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마인들이 건물들을 드나들었고 섬 주위로는 검은 나무 선박들이 마인들을 태우고 다녔다. 한립은 남폭호에 오기 전 관련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남폭성조는 다른 성조들의 도움을 구해 남폭호에 초대형 금공금제를 설치해 두었다. 수행이 마존 급을 넘어서지 못하는 마인은 호수 깊은 곳에 들어서면 비행 능력을 잃어 배를 타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금제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고계 마족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인근을 배회하다 섬 하나에 내려섰다.

    그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키가 작고 피부가 새까만 마족 사내가 서둘러 뛰어왔다.

    “소인 관앙이라 합니다! 남폭성으로 가려시면 소인의 배는 어떠십니까? 크기는 작아도 속도로는 인근에서 알아주는 배입니다.”

    저계 마족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허풍은 아니겠지?”

    한립이 눈앞의 축기기 마인과 섬 옆의 열댓 척의 크고 작은 선박을 번갈아 보았다.

    “그건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제 말이 사실이 아니면 뱃삯의 두 배로 보상하겠습니다!”

    관앙은 한립의 수행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기색이나 분위기가 평범해 보이지 않아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네 선박을 이용하겠다. 마석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남폭성까지 최대한 빨리 가야할 것이야.”

    한립이 상대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 저를 따라 배로 가시지요!”

    호객에 성공해 기분이 좋아진 관앙은 물가에 대놓은 작은 배를 가리켰다. 한식경 후 작은 섬을 떠난 검은 나무배는 화살처럼 물을 가르고 나아갔다.

    한립은 뱃머리에 앉아 무쇠로 만든 두 개의 노를 열심히 젓는 마족 사내를 지켜보았다. 노는 푸른빛으로 반짝였고 움직일 때마다 대량의 물을 갈라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적합한 마기를 지녔으니 자신이 있을 만도 했구나.”

    한립이 흥미롭게 지켜보다 미소를 띠었다.

    “예, 이것들은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라 집안 어른들도 이걸로 먹고 살았습니다. 더 좋은 마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보물을 지닌 대인들이 이런 허드렛일을 하려 하겠습니까. 그 덕에 제가 입에 풀칠하며 먹고 삽니다.”

    힘차게 노를 젓던 관앙은 순박하게 답했다.

    “그 말은 자네가 현지인이란 소린데, 남폭성 사정도 훤하겠구만?”

    “이곳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식이라면 저 역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허나 진짜 중요한 정보는 높으신 분들만 아시지 저 같은 자가 알겠습니까?”

    “하하, 안심하게. 나도 중요한 정보를 자네에게 물을 생각은 없었으니.”

    “그럼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는 대로 답해드리겠습니다.”

    “흠, 남폭성 어딜 가야 혈아미를 구할 수 있지? 아무 상점에서나 판매하지는 않을 텐데.”

    “아, 선배님께서도 혈아미 때문에 이곳에 오셨군요! 저 일단, 한두 개를 사려는 것인지 아니면 대량으로 매입하려는 것인지 여쭈어도 될 지요?”

    한립의 말에 관앙이 활기차게 물었다.

    “한두 개를 사는 것과 대량 구입이 차이가 있는가?”

    “적은 수량은 성 안의 전문 상점으로 가셔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상점마다 하루 판매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화신기 이상의 선배님들에게만 1인당 2개씩 판매하지요.

    같은 사람이 다음에 혈아미를 더 구매하려면 반드시 남폭성에 1년 이상 거주해야 하고요! 그런데 이것은 규칙이 그렇다는 것이고 암암리에 특수한 방법으로 한 번에 여러 개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혈아미의 품질이 높지 않을수록 구하기는 쉽습니다.”

    “내가 최상품의 혈아미를 대량으로 원한다면?”

    “아……. 그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상품 이상의 혈아미는 워낙 엄격하게 관리되어서 외부로 많은 수량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바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면 직접 남폭호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허나 세상에 불가능한 거래란 없지. 필요한 대가가 클 뿐.”

    한립이 난색을 표하는 마족 사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저로서는 도와드릴 수 없는 일이라 아무래도 선배님께서 성 안에서 따로 방법을 알아보셔야겠습니다.”

    주저하던 관앙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고 검은 배는 빠르게 남폭호 중심으로 향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