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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40화 (997/2,000)
  • 1240화. 현천성수(玄天聖樹)

    *

    황량한 산봉우리의 동굴 안에 노인과 거한이 마주 앉아있었다.

    눈썹이 기이하게 기다란 노인은 노란 나무 비녀로 머리를 틀어말아 올렸고 장포에는 삼두육비의 흉악한 마물 형상이 수놓아져 있어 기괴한 인상을 주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거한은 구레나룻과 수염 가득해 굉장히 엄해 보였다. 그들이 발산하는 기운은 평범한 마족 존자를 상회했지만 아직 대승기 경지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노인과 거한은 무언가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팔뚝 크기의 새빨간 솥은 특이하게도 네모나게 각이 있었고 귀퉁이마다 무시무시한 악귀 얼굴이 하나씩 떠 다녔다.

    솥이 부르르 떨릴 때마다 악귀들이 처절하게 울부짖어 그 안에 갇힌 마물이 받는 고통을 대변하는 듯했다.

    “혈광 수사, 어서 비밀 동부에 대해 말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그래야 수사도 마화 속에서 고통 받는 나날을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저와 차 수사는 수사 덕에 진마쇄에 오랜 세월 갇혀 있느라 인내심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대로 천년 넘게 수사를 괴롭힐 수도 있어요. 어차피 우리는 같은 원신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니 우리에게 비밀을 털어 놓는다고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구레나룻 거한이 솥 속의 비명을 듣다 탄식했다. 상대를 어르고 달래려는 속셈이 뚜렷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솥 안에 갇혀 있는 것은 ‘혈광성조’인 듯했다.

    “우리에게 빼앗아갔던 것들을 두 배로 갚는다면 노부도 인정을 베풀어 수사를 고통 없이 죽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내세에 다시 태어날 길이 열리겠지요. 노부 차기공은 지금까지 자신에 한 말에 책임을 져왔고 풍사 수사도 신용이 없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바로 진마쇄에 갇혀 있던 차기공과 풍사였다!

    진마쇄를 탈출한 그들은 마계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혈광성조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쫓아가 육신을 멸하고 원영을 잡아왔다.

    그들과 혈광 사이에는 은원(恩怨)이 첩첩이 싸여있어 잘잘못을 가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키킥…… 늙은이들이 헛꿈을 꾸는구나. 본 좌가…… 너희 수중에 떨어졌는데 살 길이…… 있을 거라 여기는 줄 아느냐. 비밀 동부 속 보물이 영원히 빛을 못 보는 것이…… 네 놈들에게 넘겨주는 것보다 낫다. 이전의 신통을 회복하려면 최소한…… 수 천 년은 걸릴 테지? 성계의 대겁이 임박…… 했는데 어디 살아남을 수 있나 보자. 유일한…… 복수의 기회를, 내 어찌…… 놓치겠느냐!”

    비명이 잠시 멈추고 사내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차기공과 풍사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꼭 벌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지! 아직 이 연혼정(煉魂鼎)의 위력을 100분의 1도 보여주지 않았다. 노부가 네 혼백이 백배의 고통을 당하게 해줄 테니 죽느니만 못한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느껴 보거라!”

    차기공이 회유하려는 것을 집어 치우고 수결을 맺어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사각 솥에서 핏빛이 크게 일어나며 모서리마다 악귀 얼굴이 떠다니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솥 안에서 모골이 송연해 지는 비명이 연달아 들려왔지만 차기공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곁에서 풍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감았다.

    * * *

    그 시각,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위. 백 마리가 넘는 쌍뿔 마족들이 피범벅을 하고 사내와 여인을 포위하고 있었다.

    모래에는 선혈이 낭자하고 잘려나간 시체들이 수북해 모래를 빨갛게 물들이는 중이었다. 절색의 미모를 지닌 백의 여인과 낭아봉을 든 흑갑 거한은 보화와 흑악이었다.

    주위의 고계 마족들을 둘러보는 보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마족들은 같은 종족 출신 같았는데 무표정한 얼굴이나 서늘한 기운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죽는 게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이렇게 죽어나가고도 아직도 달려들 셈이냐!”

    흑악이 씨익 웃더니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핥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상대편 마족의 담담한 외마디 뿐.

    “공격!”

    동시에 쌍뿔 마족 전체가 새까만 영패를 꺼내 사방팔방에서 보화와 흑악을 검은 빛으로 비추었다.

    흑악이 낭아봉을 맹렬이 휘둘러 열 배로 크기를 키우자 쇠못이 꽂힌 몽둥이 허상들이 검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콰르릉!

    검은 바람 속에서 마족 시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쌍뿔 마족들의 수행도 낮지 않았건만 흑악의 적수는 되지 않았다.

    문제는 쌍뿔 고계 마족들이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고 달아날 기미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흑악이 아무리 신통이 뛰어나도 연달아 격전을 치르며 법력이 얼마 남지 않아 전력으로 마공을 사용하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낭아봉을 휘두르는 흑악의 추한 얼굴에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쌍뿔 마족의 3분의 1을 죽인 흑악은 점점 낭아봉을 휘두르는 속도가 느려졌고 방심한 틈을 타 빛구슬에 맞았다.

    검은 빛구슬은 특수한 능력을 지녔는지 흑악의 검은 갑옷을 녹이고 들어왔다.

    퍼퍼펑!

    흑갑 거한이 폭발에 휩싸였다.

    흑악은 낮게 괴성을 지르면서도 보화의 앞을 막고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사룡족의 단단한 육신은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상처를 낼 수 없었는데 검은 빛구슬은 그의 피부를 뚫고 기어이 피를 보았다.

    그것을 본 보화가 얼굴을 굳혔지만 이상하게도 흑악의 뒤에 서서 방관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후의 쌍뿔 마족이 흑악의 낭아봉에 맞아죽었다. 흑악도 법력과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들고 있던 낭아봉도 놔버리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에 보화가 한숨을 쉬며 분홍색 기운으로 떨어지려는 거한의 몸을 지탱했다. 분홍색 기운 속에서 은색 주술문자가 빠르게 흑악의 몸을 줄여 손가락 크기의 초소형 악어로 만들었다.

    상처 가득한 악어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보화는 악어를 소매 속에 넣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구경이 끝나셨으면 직접 나설 때도 되었을 텐데요.”

    “흥, 네 년을 속일 수가 없구나! 알았다. 내 오늘 병사 오백 명을 잃었지만 네가 홀로 남았으니 아깝지 않구나.”

    고공에서 파문이 일고 노파와 용맹스럽게 생긴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화를 바라보는 노파의 눈빛은 표독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마계에서 아주 유명한 ‘학안’과 ‘천읍’이라는 마족 성조들이었다. 마공이 대단한데다 합격술에 능하고 잔인한 손속으로 삼대 시조에 못지않게 두려움을 사는 인물들이었다.

    보화는 어쩌다 행적이 노출되어 그들에게 협공당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흑악 홀로 쌍뿔 마족들을 상대하게 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흑악이 마족 병사들을 제거했지만 벌써 쓰러졌기에 그녀는 이제 혼자였다.

    “보화 수사,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사의 자색은 예전 그대로군요.”

    용맹한 인상의 거한 천읍이 보화를 보고 눈을 빛냈다.

    “천읍 수사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 보이십니다. 불같은 성정을 고친 것으로 보아 수행에서 큰 진보를 이루셨군요.”

    보화가 그를 훑으며 이상하다는 듯 답했다. 그리고 노파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노파 학안이 화가 치밀어 공연히 지팡이로 허공을 내리쳤다.

    쾅!

    “허세 부리지 마라, 보화! 수행을 회복하지 못한 너는 사형과 내 적수가 될 수 없어. 얌전히 머리를 조아리면 시체는 온전히 남겨주겠다.”

    “학 수사께서 과거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해 복수를 하러 오셨나 봅니다. 천읍 수사도 같은 의견이신지요?”

    노파의 외침에도 보화는 얼굴색 하나 달라지지 않고 차분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는 천겁이 얼마 남지 않아 수사에게 보물을 빌리러 찾아온 것입니다.”

    천읍이 숨기 없이 자신의 의도를 밝혔다.

    “어뢰첨을 원하신다고요?”

    총명한 보화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습니다! 어뢰첨이 있으면 이번 천겁도 무사히 지날 수 있을 겁니다.”

    “안 될 것 없지만……. 워낙 귀한 보물이라 그냥 빌려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이렇게 하시지요, 수사께서 제 공격을 한 번만 받아내시면 보물을 만년 동안 빌려드리겠습니다.

    “일격 한 번에 보물을 빌려준다 말입니까?”

    보화의 말에 천읍이 동공을 수축했다. 곁에서 대놓고 보화를 노려보던 노파도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미 법력을 회복하고 고의로 우리를 유인해 낸 것은 아닐 테지?’

    학안과 천읍은 불길한 생각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설마 천읍 수사께서 제 제안에 겁을 먹은 것은 아닐 테지요.”

    그것을 본 보화가 빙긋 웃음 지었다.

    “좋습니다! 그간 어떤 신통을 익혔기에 그리 자신만만한지 구경이나 해봐야겠습니다.”

    “제가 곁에서 기습에 대비하겠으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형.”

    머리를 굴리던 천읍이 태연히 답하자 노파가 걱정스럽게 당부했다. 천읍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을 뗐다. 그리고 번뜩하고 사라진 그의 신형이 보화와 마주했다.

    그는 뒷짐을 쥐고 서서 조용히 보화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훅!

    보화는 슬쩍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입에서 분홍색 빛구슬을 뿜었다. 대충 보면 평범해 보여도 쌀알 크기의 분홍색 주술문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빛구슬을 손바닥에 올린 여인은 다른 손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파앗!

    빛구슬이 터져 주술문자들이 꽃잎처럼 흩날리자 그 모습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때 폭발의 중심에서 비취색 빛이 번득였다. 비취색의 작은 풀은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 팔뚝만한 묘목으로 변했다.

    잠시 후 보화의 손바닥 위로 거목이 자라나 나무그늘이 길게 드리웠다. 비취색 잎이 무성한 나무의 뿌리는 보화의 손바닥과 일체화되어 그녀의 몸에서 법력을 빨아들였다.

    “현천성수(玄天聖樹)를 완전히 융합하다니! 정말 법력을 회복한 것입니까!”

    침착하던 천읍이 비취색 거목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뒤쪽의 노파도 난색을 표했다.

    “그런지 아닌지는 이 공격을 직접 받아보면 알게 될 겁니다. 현천화계(玄天花界)!”

    보화의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나뭇가지에 분홍색 입자들이 몰려들어 꽃봉오리들을 형성했다. 주문소리와 함께 짙은 꽃향기가 공간을 채워갔다.

    불가사의하게도 꽃봉오리가 터지는 순간 비취색 거목도 분홍색으로 물들어갔다.

    허공에 은은하게 불경 소리가 울리고 분홍색 꽃 허상들이 가득해 멀리서 보면 분홍빛이 천지(天地)를 뒤덮었다.

    “이런, 그녀가 정말 현천영역(玄天靈域)을 수련해 냈어. 어서 달아나지!”

    천읍이 크게 소리치며 핏빛으로 변해 튀어나갔고 학안도 지팡이로 허공을 갈라 하얀 공간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보화의 일격을 받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

    “늦었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눈을 가늘게 뜬 보화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마디 했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거대 꽃이 유유히 날아갔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거대 꽃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졌다가 노파가 사라진 공간균열 속으로 쇄도했다.

    쿠르릉!

    공간균열은 활화산처럼 분홍 기운을 토해냈고 그 안에 비틀비틀 거리는 학안 노파가 들어있었다. 머리가 빙빙 도는 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거세게 떨리던 공간균열마저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거대 꽃 한 송이가 허공을 깨트릴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노파가 번개처럼 지팡이를 휘둘러 4개의 지팡이 허상을 만들어 분홍 기운을 밀어내고 나서야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이때 보화를 보는 학안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공포가 어려 있었다.

    ‘현천영역에 둘러싸이면 외부의 천지원기를 끌어오지 못한다. 대승기 존재들이 천지원기를 이용해 사용하는 강력한 신통 7, 8할을 전혀 못쓰게 되는 셈이지! 어쩐지 그래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형이 저 년이 펼치는 신통을 알아보고 당장 달아날 마음을 먹은 것이로구나.’

    사형을 떠올린 노파는 서둘러 그가 날아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분홍 세계의 변두리에서 천읍도 수많은 거대 꽃 허상에 막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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