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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39화 (996/2,000)
  • 1239화. 체류

    *

    고령도 한쪽에서 아직도 보화와 흑악 그리고 원염이 은근히 서로를 경계하고 서있었다. 돌연 표정이 달라진 보화와 원염 성조가 옥함을 불러냈다.

    “으하하, 약속은 지키는 녀석이었습니다. 과연 의식이 사라졌어요.”

    흑포 청년은 광소를 터트리고 곧바로 머리 셋 달린 검은 교룡을 불러냈다. 교룡의 중간 머리에 탄 원염 성조는 즉시 마풍으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잠시 후 보화 앞 허공에 원염의 냉랭한 전음이 울렸다.

    “영약을 구해다 준 공을 생각해 본 시조가 친히 한 가 녀석을 쫓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멸선령(滅仙令)을 내려 인족 녀석이 성계에 발붙일 곳이 없게 만들 것입니다. 무사히 영계로 돌아가려면 큰 운이 따라야 할 것이에요.”

    말을 마친 원염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보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옥함을 거두고 가만히 황금 게가 있는 뇌해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일이구나. 위선뢰가 분명 손을 썼거늘 어찌 그 녀석이 뇌해를 벗어났단 말인가. 역시 아직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었던 것인가!”

    “대인, 소인이 가서 알아볼까요?”

    옆에서 흑악이 눈알을 굴리다 물었다.

    “되었네. 그가 어찌 되었든 나는 원하던 영약을 얻었으니 바로 마원해를 떠날 것이야. 조용한 곳을 찾아 영약으로 단약을 제련해 복용하면 이전의 신통을 회복할 수 있을 걸세.”

    보화가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예, 대인! 그럼 어서 떠나시죠. 원염과 열반 대인께서 대인을 보았으니 이곳에 오래 남아 있다가는 사달이 날 것입니다. 대인께서 이전의 법력을 회복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요.”

    흑악이 즐겁게 말했다. 그의 주인으로 모시는 자가 하루 빨리 신통을 회복해야 그의 앞길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시킨 일은 잘 처리했겠지?”

    “안심하셔도 됩니다. 삼두(三頭) 교룡의 몸에 혈맥 표식을 심어 두었으니 천 리 내로 접근하면 바로 감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했네. 삼두 교룡 역시 자네처럼 사룡(邪龍)의 피를 타고 났지. 원염이 그 본명 영수를 떼놓고 다니지 않는 한 나를 기습하려 해도 허사일 것이야.”

    보화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어렸다.

    “흐흐, 전부 대인께서 전수해 주신 비술 덕입니다! 원염 대인마저 눈치 채지 못하셨습니다.”

    “같은 혈맥을 지닌 자에게만 쓸 수 있는 비술인데다 원염의 의식도 고령도 내에서 제약을 받아 감지하지 못한 것뿐이네. 우리도 그만 출발하세.”

    보화가 수결을 맺어 등 뒤로 분홍색 꽃나무 허상을 일으켰다. 분홍 기운이 피어나 그들을 덮고 펑! 하고 사라졌다.

    이제 고령도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다시 예전의 평화를 되찾은 듯했다.

    이레 후, 고령도 곤령곡 상공에 두 명의 불청객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사내와 여인이었는데 푸른 갑옷을 입은 사내는 굉장히 용맹해 보였고 백발에 쭈글쭈글한 피부를 지닌 노파는 붉은 장포를 입고 학 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허공에서 한참 무언가를 찾던 노파가 지팡이로 허공을 내리쳤다.

    쿵!

    아래쪽 지면이 내려 앉아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역시 보화 그년이 이곳에 나타났었군요! 아직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에요.”

    노파의 갈라진 목소리가 매우 거슬렸고 말씨 또한 고약했다.

    “사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녀를 증오하는 겐가? 세월이 흘러도 수행에 발전이 왜 없나 했더니 그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야.”

    청갑 거한이 붉은 장포 노파를 향해 탄식했다.

    “그년이 아니었으면 어찌 제가 육신을 잃고 이 늙은 몸을 훔쳐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설마 그것이 천읍 수사의 화신들을 연달아 멸한 것도 까먹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게 얼마나 오래 전일인데 이제와 떠올려 뭐하겠는가. 괜히 마음만 어지럽힐 뿐인 것을.”

    거한은 사나운 외양과 달리 온화하게 말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 마십시오! 정말 그때 일을 잊었다면 원염이 전한 소식에 여기까지 달려오셨겠습니까.”

    노파의 얼굴이 질투심으로 일그러졌다.

    “사매가 믿든 말든 난 이미 읍혈마공(泣血魔功)이 망정(忘情)의 경지에 이르러 감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네. 자네와 함께 이곳까지 온 것도 보화가 지닌 보물 때문이고. 그게 있어야 다음번 천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보물이라면 그것이 지닌 ‘어뢰첨(御雷籤)’을 이르는 것입니까?”

    “그래, 그것일세. 보화가 수차례 순조롭게 대천겁을 이겨낸 것도 그 보물 덕이었지. 난 보물에 관심이 있을 뿐 그녀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믿어보지요. 원염의 말에 따르면 그년의 수행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찾아내기만 하면 우리 둘이 제압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전’ 시조 대인을 아주 잘 대접해 드려야겠지요!”

    청갑 거한의 말에 노파가 표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지! 나는 보물을 자네는 그녀를 손에 넣게 될 걸세. 가장 가까운 수존전 분전에 연락해 인근의 모든 전송진법을 감시하게 하면 절대 우리의 천라지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야.”

    청갑 거한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그의 담담한 얼굴에 노파는 의심을 지우고 기쁜 얼굴로 동의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네. 그 늙은 게는 뇌해에 머물지 않고 어딜 간 것인가? 시조 급에 상당하는 위선뢰의 실종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인데 설마 보화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위선뢰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성계에 존재했고 그간 한 번도 뇌해를 떠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확실히 불안하긴 하군요. 하지만 보화와 연관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능력이 되었으면 시조일 때 데려가 써먹었지 지금 그 꼴이 되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원염의 멸선령에 언급된 합체기 인족 수사 밖에 남지 않는구만.”

    “그럴 지도요. 허나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보화를 잡아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것을요! 어차피 원염이 내건 보상은 우리 눈에 차지도 않고요.”

    “사매의 말이 일리가 있네. 일단은 보화를 찾는 것이 급선무야.”

    청갑 거한은 조금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 *

    철썩!

    거세게 출렁이는 검은 파도를 뚫고 커다란 푸른 선박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뱃머리에 선 청년은 뒷짐을 쥐고 먼 바다를 쳐다보았다.

    “…….”

    그는 벌써 마원해 가장자리까지 이르러 있었다.

    대량의 단약으로 부상을 거의 회복하기는 했지만 열반성체의 이열변신을 하고 현천참령검까지 사용해 황금 게의 공격을 막느라 원기를 상하고 말았다.

    영단묘약으로 보충하려 해도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려면 반년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한립은 황금 게가 변한 해 도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시조급 노괴들에게 포위당하지 않는 한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해 도인과 동행하면서 한시 바삐 마계를 떠나려던 생각도 고쳐먹었다.

    ‘지금이야 마족에서 통로를 뚫어 쉽게 넘어 올 수 있지만 인마대전이 끝나면 대승기에 이르러도 마계로 침입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며칠 간 고민한 끝에 마계에서 얼마간 더 머물며 몇 가지 일을 해결하고 떠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계 특산의 혈아미와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이마금 속의 수정구슬이었다.

    전자는 그의 육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고 후자는 신속하게 법력을 키워주었으니 수련 시간을 아끼려면 꼭 필요했다.

    게다가 그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두 물건이 마침 한곳에서 나온다지 않는가!

    “남폭호.”

    혼잣말을 하는 한립의 눈에 열기가 스쳤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금빛 찬란한 영충을 들어올렸다. 성체 서금충 한 마리가 마치 죽은 것처럼 놓여있었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고 표면에 은색 균열이 나있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푸른 나무 전함의 선실 속. 맑은 인상의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황포 소녀가 수련 중이었는데 수시로 청년을 훔쳐보며 남몰래 얼굴을 붉히고는 했다.

    * * *

    한 달 후, 마계는 원염이 발표한 멸선령에 소란스러워졌다. 멸선령에 걸린 거액의 보상에 일부 마족 성조들도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다만 멸선령이 지목한 목표는 겨우 영계 인족의 합체기 수사라 성조들은 본체를 움직이지 않고 화신을 파견하곤 했다.

    원염과 평소 왕래가 있던 성조들은 숨겨진 내막을 듣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몇몇 성조 화신들과 합체기 마존들은 마계 전체를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두 달 후, 드디어 마계의 거대 성 중 하나인 비취성(翡翠城) 교외에서 누군가 한립의 종적을 발견해 성 안의 마족 존자 네 명에게 보고를 했다.

    그로 인해 전송진 인근에서 네 명의 마족 존자가 불시에 한립을 기습했고, 해 도인이 나서 그들을 손쉽게 제거해 주변 마족들을 놀라게 했다.

    한립은 당당히 전송진을 이용해 비취성을 떠났다.

    * * *

    세달 반쯤 지났을 무렵, 마계의 유명한 위험지대인 삭금하곡(爍金河谷)에서 한립은 다시 한 번 종적을 남겼다.

    이에 명성이 있는 천아노조가 화신과 세 명의 마족 수사를 급히 파견해 그의 앞길을 막았지만 천아노조의 화신과 두 명의 마존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둔술에 정통한 마존 한 명 만이 살아남아 삭금하곡을 빠져나갔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의 마족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반년 후, 혈광성조 본체가 두 명의 화신과 약간의 수하들을 데리고 침수진(沈水鎭)이라는 작은 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모습을 바꾼 한립을 바로 알아보고 공격을 개시했지만 한립이 해 도인과 동시에 나서 그에 대항했다.

    반년 후 원기를 거의 회복한 한립은 지난번 열반변신을 이용한 전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세령지와 정령련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해 범성진마공에서 큰 진보가 있었다.

    그는 즉시 열반성체의 이열변신을 하고 믿기 어려운 위력을 떨치며 혈광성조 본체를 밀어붙였다.

    하루 밤낮을 꼬박 새운 결과, 작은 마을은 완전히 부서졌고 주변에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마족들은 부상을 당하거나 죽고 말았다.

    그들의 전투는 결국 혈광성조 본체가 중상을 입고 달아나고, 그의 두 화신과 수하들은 깡그리 몰살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도인의 무서움을 인지한 마족들은 이번 전투를 계기로 한립의 실력에 대해서도 암암리에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 * *

    며칠 후, 고계 마족 무리가 침수진 밖의 어느 산맥에서 처참한 몰골의 혈광성조 시체를 발견해 파문은 더욱 커졌다.

    유골의 머리가 열려 있고 그 안이 텅텅 비어 육신이 죽임을 당하고 원영마저 누군가에게 잡혀간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마족성조 몇몇이 경악해 화신을 보내 혈광성조의 사인을 조사하게 했다. 마계도 각 종족간의 분쟁이 드물지 않아 마존 급이 죽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성조 급이 피살되는 경우는 수만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족성조들은 한립과 해 도인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혈광성조와 원한을 맺은 다른 성조들을 의심했다.

    이렇게 시조에 버금가는 강력한 신통을 지닌 성조들도 한립을 막아 나설 생각을 접었다.

    한립과 해 도인의 실력에 화신을 보내면 그냥 죽여주십사 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본체가 나서자니 혈광처럼 원수들이 틈을 타 해를 가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마족성조들의 분위기가 이러니 평범한 마족 존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멸선령의 보상을 표기했다.

    한립과 해 도인은 마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추격하지 않았고 멸선령이 내려져있어도 경계를 단단히 하라는 하나마나한 지침만 지킬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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