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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36화 (993/2,000)
  • 1236화. 두 개의 병

    *

    서금충의 위력에 금제가 금방 사라질 거라 기대했지만 딱정벌레의 날카로운 이빨도 보호막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서금충도 갉아먹을 수 없는 보호막이라고?’

    그는 성체 서금충들을 물리고 서금충왕 후보들을 불러들였다. 이번에는 영충의 이빨이 지나는 곳마다 깊은 흔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에 생긴 흔적들이 아주 조금씩 원래대로 회복되고 있었다.

    오색 보호막은 아주 단단할 뿐 아니라 복원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시간이 남아 있었다면 여러 진법을 설치해 천천히 파훼했겠지만 공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원기를 크게 상하는 한이 있어도 현천의 검처럼 강력한 방법을 이용해 단번에 금제를 깨거나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천의 보물이라면 오색 보호막도 일격에 깨질 테고 신비로운 세령지와 천연의 진법을 만들어낸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간 밖에서 마족 시조가 두 명이나 그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런 위험은 무릅쓸 수 없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보물이라도 현천의 검보다는 못할 터. 대승기에 이를 기회를 얻은 이때에 무리하게 보물을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루만 일찍 이곳의 비밀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결정을 내렸다. 그는 소매를 휘저어 수많은 서금충들을 회수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서금충들이 사라지자 세령지의 은색 연못도 서서히 차올랐다. 고공의 오색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울리고 뇌전이 번득거렸다.

    한립은 허공의 한 제단 위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에 새겨진 은색 진법이 그가 이곳으로 들어온 입구였다.

    전송진 위에 선 한립은 천지의 힘이 강하게 그를 억누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보화의 말대로 큰 화를 당할 뻔했다. 그는 탄식하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전송진으로 법결을 날렸다.

    웅!

    전송진에서 빠져나온 우윳빛이 그를 잠식했다. 공간 파동을 느끼며 전송이 되기 직전, 품속에서 보랏빛이 날아올랐다.

    ‘어째서 이런 일이?’

    천천히 눈을 감고 이동하려던 한립은 경악한 얼굴로 번개처럼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아챘다. 그 순간 전송이 시작되었고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같은 시각 세령지 하부. 석판들이 놀라운 빛을 머금고 짙은 노란색 병이 구멍 안에서 빠져나왔다. 암녹색 문양이 가득한 병의 입구에서 우윳빛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노란 병 표면에 콩알 크기의 새까만 눈알이 나타나 주위를 둘러보고 실망스런 눈빛을 했다.

    눈알이 사라진 후에는 노란 병도 다시 구멍 속으로 가라앉았고 눈부신 빛 속에서 석판들도 오색 입자로 변해 흩어졌다. 석판들은 실체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 천지영기가 응결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고공의 오색구름도 한립이 떠나자 서서히 흩어져 원래의 평온한 하늘로 돌아갔다.

    파앗!

    고령도 어딘가에서 나타난 한립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꽉 쥐고 있던 손을 펼쳐 검은 가죽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주머니를 봉인한 부적을 떼어내고는 녹색 작은 병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초목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신비한 액체를 만들어내는 신비한 병이었다.

    병 표면의 암녹색 문양이 놀랍게도 희미하게 비취색을 반짝이다 점점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한립은 작은 병을 재빨리 가죽 주머니에 넣은 다음 주머니를 봉인하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뒷짐을 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끝에서 빛이 번득이고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간 파동이 일며 분홍 기운과 검은 빛덩이가 나타났다.

    분홍 기운 속에 거대 꽃나무 허상이 사라지고 보화와 흑악이 나타났고, 검은 빛덩이 속에는 냉랭한 표정의 원염 성조가 있었다.

    “수사가 너무 늦게 나타나 걱정하던 참이었네. 안색을 보니 세령지에서 적잖은 수확을 얻은 것 같구만.”

    원염이 말없이 그를 훑는 동안 보화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화 선배님께서 걱정하던 것은 제가 아니라 제가 지닌 영약이었겠지요.”

    한립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게 차이가 있는가? 자네가 세령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영약도 얻을 수 없을 텐데 말이네.”

    “참 솔직하신 분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영약이나 내놓거라. 이제와 허튼 생각을 한다면 무슨 짓을 당해도 날 원망 말거라!”

    흑포 청년이 흉흉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제가 어찌 두 분과 한 약조를 어기겠습니까.”

    한립은 곧바로 옥함을 꺼내 주저 없이 마족 시조들에게 던져주었다. 이에 보화와 원염 성조는 깜짝 놀라 옥함을 끌어당겼다. 흑포 청년은 격동한 얼굴로 옥함을 열어보고는 입이 찢어질 듯 웃어댔다.

    “으하하하! 수만 년간 길러내려 했어도 결실을 보지 못하던 연마초가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흠? 여기다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이냐!”

    원염 성조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이때 의식으로 옥함을 훑은 보화의 얼굴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한 수사, 이게 무슨 뜻인가. 이런 짓을 해놓고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두 마족 시조들의 눈빛이 굉장히 차가워졌다.

    “일단 화를 거두시지요. 제가 드린 옥함 속의 영약이 두 분께서 찾으시던 것은 맞겠지요?”

    “흥, 영약은 맞다.”

    “그렇다고 해도 해명이 필요할 것 같네만. 우리를 설득할 수 없다면 수사는 오늘 이 섬을 떠날 수 없을 것이네.”

    원염 성조와 보화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제가 드린 물건이 선배님들께서 찾으시는 영약이 맞다면 일전의 약조를 어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쨌단 것이냐! 그런 말장난으로 나를 갖고 놀려는 것이더냐.”

    원염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성큼 앞으로 나섰다.

    “오해십니다! 제가 영약에 남겨 놓은 것은 무슨 복잡한 금제가 아니라 두 줄기 의식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사라질 임시 의식들이지요. 절대 영약에는 손상을 가하지 않을 겁니다.”

    “임시 의식? 수사의 뜻은…….”

    한립의 설명에 보화가 영약을 살펴 진위를 확인하고는 얼굴을 풀었다.

    “다른 뜻은 없고 두 분께 영약을 내드리고 안전하게 이곳을 떠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남겨 놓은 것입니다. 제가 안전하게 뇌해를 떠난다면 영약들도 무사할 것이고 선배님께서 제게 손을 쓰시려 한다면 두 의식이 자폭해 영약도 손상을 입겠지요.”

    “감히 본 좌를 위협하는 것이냐!”

    보화가 답하기도 전에 원염이 끼어들어 버럭 화를 냈다.

    “그럴 리가요. 저도 제 살길을 찾으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뇌해를 안전히 떠나고도 의식이 폭발해 영약이 손상을 입으면 두 분과 큰 원한을 맺게 될 텐데 제가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벌이겠습니까!”

    “겨우 의식이 자폭한다고 옥함 속의 영약이 손상을 입을 거라 어찌 자신하는가? 이것들은 평범한 영약이 아니라 웬만한 도검으로도 해를 끼칠 수 없을 텐데.”

    보화가 눈을 빛내고 물었다.

    “두 분께서도 영약에 정말 손상이 갈지 안 갈지 굳이 시험해 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게다가 설마 제가 평범한 수법으로 의식을 남겨 놓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한립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말에 보화와 원염 성조의 안색이 또 한 번 달라졌다.

    “좋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누군가에게 끌려 다니는 것은 오랜 만이로구나. 당장 꺼지거라! 네가 무사히 뇌해를 빠져나가고도 연마초에 문제가 생기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 제발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겠다!”

    한립의 예상과 달리 흑포 청년이 옥함을 거두고 냉랭히 답했다. 이전의 분노는 모두 거짓 같았다.

    ‘늙은 마두가 연기에도 능하구나!’

    한립은 놀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보화를 바라보았다.

    “보화 선배께서는…….”

    “긴 말 할 것 없으니 가보게. 자네의 말대로 난 영약을 잃을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네. 수사가 뇌해를 벗어나고도 영약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나오든 무정하다 나무라지 말게.”

    침음하던 보화도 무표정한 얼굴로 승낙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한립은 수사들을 향해 포권을 하고 허공을 박차고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그의 둔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섬에는 세 마족만 남았다.

    “대인, 제가 쫓을까요?”

    줄곧 보화 뒤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흑악이 참다못해 물었다.

    “됐네. 저 자의 의식은 나와 원염 수사와 맞먹는데 자네의 은신술로 저 자를 속일 수나 있겠는가.”

    “언제부터 수사의 담이 그리 작아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듣고 있던 흑포 청년이 눈을 흘겼다.

    “원염 수사야 말로 저 자를 쫓아 보시지 그러십니까?”

    “노부의 수하만 곁에 있었어도 저 녀석이 이리 쉽게 섬을 떠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영살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 한들 잘도 영약이 훼손될 위험을 감수하셨겠습니다.”

    “흥, 사실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연마초를 위해서라면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소하는 보화를 향해 흑포 청년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사와 저의 약점을 거머쥔 녀석을 어찌 건드리겠습니까.”

    “저 녀석이 달아나는 것은 상관없지만 영약에는 문제가 없겠지요?”

    “수사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눈을 깜빡인 보화가 반문했다.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녀석이 달아나게 두고 보지 않았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이상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그런 것일 테지요. 기다려 보시지요.”

    “강제로 영약의 의식을 제거하려 한다면 얼마나 자신이 있으십니까?”

    원염은 아직도 내키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아직 법력이 회복되지 않은 몸이라 평범한 의식이라면 자폭하기 전에 제거할 자신이 6할은 됩니다.”

    “8할 이상은 되어야 시도해 볼 텐데 너무 낮습니다.”

    원염이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화가 미소 지으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그들의 귓가에 노쇠한 목소리가 울렸다.

    “두 분이 나서지 않겠다면 노부가 나서 드리지요. 저 녀석이 지닌 다른 영약들도 전부 회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목소리는…….”

    “열반, 그 늙은이가 왔습니다!”

    보화와 원염이 전음을 듣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더 이상 노인의 전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고령도에 일어 터졌는데 안 와볼 작자가 아니지요.”

    원염 성조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열반은 원기를 크게 상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금, 은, 동 3대 화신 중 한 명이 온 것이겠군요. 그 중 어떤 화신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보화가 빠르게 평정을 회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몰랐겠지요. 그런데 인족 녀석이 열반의 화신을 만나 우리가 무슨 짓을 벌인 줄 알고 의식을 폭파시키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직접 쫓지만 않으면 무턱대고 어리석은 결정을 할 자는 아닙니다. 정말 열반 화신의 손에 죽을 위기에 처하면 또 모를 일이지만요.”

    “하아, 그 녀석도 만만치 않으니 열반 화신을 상대로 그렇게 까지 궁지에 몰리지는 않을 겁니다. 상대가 안 되면 달아나면 그만이니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열반은 예전부터 3대 시조 중에서 영계라면 가장 이를 갈던 자입니다. 대도를 이루기 전 반려가 영계 대승기 노괴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저도 알지만, 본체가 잠에 빠져 있는데 3대 화신이 전부 몰려오지 않은 이상 인족 녀석을 어찌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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