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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35화 (992/2,000)
  • 1235화. 환골탈태(換骨奪胎)

    *

    시간이 흘러 반나절이 지났을 때 한립의 옥처럼 매끈하던 피부에 핏자국이 생겨났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상처는 생겼지만 피는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몸속의 변화와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죽느니만 못한 고통이라 여겼을 지도 모르지만 한립은 불가사의한 육체 강도와 굳건한 의지를 지녔기에 잘 버텨냈다.

    잠시 후 그는 홀연히 두 눈을 뜨고 정령련이 든 옥함을 불러내 열었다. 살색 연꽃이 소리 없이 떠오르자 그는 푸른 기운을 뿜어 꽃잎을 뜯어내 삼켰다.

    달콤하고 부들부들한 꽃잎이 가볍게 그의 목을 타고 들어가자 단전에서 폭발적으로 열기가 일어나며 열댓 마리의 뱀처럼 경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얼굴에 기이한 붉은 빛이 떠올랐고 순식간에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용암 속의 열기가 내부에서 터져 나와 머릿속 의식으로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정령련 꽃잎 하나가 이렇게 패도적일 줄이야…….’

    한립은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뜨거운 기운은 여전히 그의 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그의 몸속 온도를 놀라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멀리서 보면 정신을 잃은 한립 위로 붉은 기운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연못물이 희미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정신을 차린 한립은 체내의 열기가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런!’

    그의 키가 이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갈라졌던 피부는 꿈틀대며 은색 피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온몸이 칼날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의식으로 몸을 살폈는데 골격이 배로 늘어나고 골격의 색이 자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연못 밖의 마영과의 의식 연계를 통해 두 시진 가량 기절해 있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주저 없이 두 번째 꽃잎을 입안에 넣었다.

    * * *

    이틀 후 고요하던 은색 연못이 돌연 끓어오르다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연못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는 옅은 은빛과 수많은 자금색 주술문자들을 뿜어냈다!

    동시에 연못 인근의 땅도 진동하고 무수히 많은 오색 빛덩이들이 초목과 흙속에서 떠올라 연못 위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거대한 오색구름이 세령지 상공에 만들어지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소용돌이가 내는 굉음이 점점 커지며 마치 그 안에 무서운 괴물이 도사리고 앉아 구름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콰르릉 콰쾅!

    갑자기 오색구름에서 굵은 오색 벼락이 내리쳐 곧바로 소용돌이 중심으로 떨어졌다. 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연못 전체가 출렁였다.

    자금색 빛기둥이 소용돌이 중앙에서 솟아올라 놀랍게도 오색 벼락을 흩어버리고 그대로 오색구름을 꿰뚫었다. 눈부신 빛을 발하던 거대 구름이 빠르게 줄어들며 색이 어두워졌다.

    찰나의 순간 구름은 쿵! 하고 흩어져 빛으로 사라졌고 자금색 빛기둥도 허공에서 소실되었다.

    이제 연못의 파랑이 점점 가라앉아 은색 소용돌이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원래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했다.

    다시 한식경이 흐르자 연못이 출렁이고 모호한 인영이 떠올라 호숫가에 섰다. 세령지에 몸을 담그고 환골탈태를 마친 한립이었다.

    그는 이전과 모습은 똑같았지만 피부에서 보광(寶光)이 반짝이고 흐릿하게 은색 광택이 흘렀다. 게다가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져 어깨가 딱 벌어져 있었다.

    그는 두 주먹을 힘껏 쥐고 연못가의 청석 바위를 향해 가볍게 손을 뻗었다. 법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육신의 힘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주먹이 날아가며 주변 공기를 빨아들였고 전방 열댓 장이 전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게다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푸른 청석 바위는 그의 괴력에 가루가 되어 흙과 섞여 버렸다. 그것을 본 한립은 미소를 지었다.

    법력으로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완력만으로 이 정도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령지의 은색 수면 방향을 갈랐다.

    콰앙!

    눈부신 푸른빛이 튀어나가 은색 수면을 가르고 거대한 은색 물결을 만들어냈다.

    연못에서 거대한 은색 물결 일어나 하얀 연못 바닥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벼운 손짓이 만들어낸 결과치고는 꽤 놀라웠다.

    철썩!

    두 물결은 중간에서 합쳐져 다시 연못 바닥을 덮었다.

    “법력과 의식도 상당히 늘었지만 원영도 이전보다 3분의 1은 커졌구나. 그밖에 어떤 이득을 얻었을지는 천천히 체득해 나가야겠지.”

    그는 밝은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주변 금제에 파문이 일고 표린수와 지선 영체가 날아들었다.

    “너희도 몸을 담그거라.”

    그의 명에 표린수가 기뻐하며 감사를 표하고 제2마영이 조종하는 영체와 함께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한립은 구곡영삼의 화신인 곡아와 서금충왕 후보들도 연달아 연못에 몸을 담그게 했다.

    웽웽웽웽!

    마지막으로 성체 서금충이 가득 든 영수환을 꺼내 만 마리가 넘는 영충들을 불러내 세령지가 아니라 금제 바깥의 초목들로 향하게 했다.

    열댓 덩어리로 갈라진 영충들은 영초와 거목을 덮쳐 깨끗이 해치웠고 숨겨져 있던 돌이나 광물도 씻은 듯 사라져 녹음이 푸르던 풍경이 별안간 황량해졌다.

    의식으로 샅샅이 훑었지만 진귀한 영약은 없었다. 이전에 이곳에 들어온 이종족들이 깡그리 채취해 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농염한 곳에서 자란 초목들이 외부 세계의 영초들보다 값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눈에는 차지 않는 것들이지만 이렇게 정순한 영기를 품을 초목들을 그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성체 서금충들에게 먹여 위력을 키울 심산이었다.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아 성체 서금충들을 풀어놓아도 의식 소모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동안 한립은 신중히 자금색 병을 꺼내 훅!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붙어 있던 부적들이 떨어져 내리고 그 안에서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금색 불새가 날아올랐다.

    주먹 크기의 불새가 멀리 달아나기 전에 그는 무형의 힘으로 그것을 끌어왔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금색 불새는 동그란 단약의 형태로 돌아갔다. 표면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금색 단약은 ‘허령단’이었다.

    그런데 단약을 쥔 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보화가 내준 옥간 어디에도 환골탈태를 마치고 언제 허령단을 복용해야하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이런 해독약은 일찍 복용할수록 효과가 좋았으니 당장 단약을 연화시킬 수는 없어도 하루빨리 복용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었다.

    그는 서둘러 단약을 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약효가 퍼져나갔다. 따뜻한 기운이 경맥을 타고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령련 꽃잎처럼 사납고 거센 기류가 아니라 따뜻한 기운이 퍼져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허령단이 효과를 보이자 한립은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약효를 조금씩 연화시키기 시작했다.

    웽웽!

    시간이 지나 서금충 무리들이 돌아와 연못 위에 금색 구름을 이루었다. 그 모습에 한립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주변은 완전히 황무지로 변했고 보이는 것은 흙과 모래가 전부였다. 영기가 농염한 곳이니 몇 백 년이 지나지 않아 푸르른 모습을 되찾을 것이고 몇 만 년이 흐르면 평범한 영초들도 막대한 영력을 품게 될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순한 영력을 가득 머금은 초목과 광석들을 갉아먹은 서금충들은 이전보다 금빛이 밝아져 있었다.

    아직 갉아먹은 것들을 전부 연화시키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지는 지켜봐야 했다.

    휘익!

    한립은 문득 그동안 머문 시간들을 세어보고는 바로 서금충들을 회수하지 않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금색 서금충 떼가 분분히 연못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한립은 더는 허령단을 연화시키지 않고 세령지의 은색 수면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그는 노란 호리병박을 꺼내 은색 연못으로 투척하고 법력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호리병박이 거대해지더니 흑백의 기운이 흘러나와 은색 연못물을 휘감았다. 연못은 은색 물기둥을 이루더니 거대한 호리병박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곳의 물을 가져가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거대 호리병박이 연못물을 빨아들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일다경이 지나 그가 다시 푸른 법결을 던져 넣자 호리병박은 원래의 크기로 돌아와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고는 굳은 얼굴로 호리병박을 뒤집었다.

    졸졸 흘러나오는 맑은 액체는 영기라고는 전혀 없는 그냥 맑은 물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천천히 연못 주변을 돌며 더욱 꼼꼼히 살펴보았다. 연못 수면 위로 드러난 벽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문양이 존재했는데 주술문자 같기도 하고 상고 문자 같기도 했다.

    한립은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을 계산하며 3일을 꽉 채우고 공간을 떠날 생각이었다. 보화가 한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못 속의 표린수 등의 기운이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며 변화가 생겨났다. 시간이 부족해 한립처럼 완전한 환골탈태를 할 수 없다 해도 만 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기연이었다.

    반나절 후 한립이 아쉬움 가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구나. 한 달만 시간이 주어졌어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야.”

    그가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포효했고 고요하던 연못물이 일렁였다. 그러자 몇 개의 인영과 서금충들이 빼곡하게 솟아올랐다. 표린수, 곡아, 영체 등이 빠르게 신형을 수축해 그의 소매 속으로 돌아갔다.

    은색 연못 위로 떠오른 영충들을 바라본 한립은 의식을 움직였다.

    웽!

    금색 영충 구름이 연못 속으로 떨어져 다시 종적을 감추었고 그 중에는 서금충왕 후보들도 속해 있었다. 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연못을 살펴보는 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연못의 은색 물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영충들이 세령지에 몸을 담그기 위해 내려간 것이 아니라 아예 연못물을 마셔대고 있었다.

    그는 연못의 물이 세령지를 떠나자마자 효과를 잃는 것을 보고 서금충들에게 마셔버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서금충의 습성과 몸이 불가사의하게 단단한 덕분이었다. 표린수나 영체 혹은 한립 자신은 위험해서 시도해 볼 수조차 없었고, 무턱대고 연못물을 마셨다가는 몸이 터져 죽을 지도 모른다.

    연못가에 서서 수면이 낮아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데 잠시 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서금충들이 허겁지겁 연못물을 삼키는데도 더 이상 수면이 낮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의식으로 살펴보았는데 서금충들은 아직도 쉼 없이 연못물을 삼키고 있었다.

    첨벙!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푸른 둔광을 일으켜 직접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못물이 절반으로 줄어 이전보다 압력이 약했기에 쉽게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한립은 새하얀 모래로 덮여 있던 연못 중심에서 정체 모를 석판 몇 개를 발견했다. 연못에서 본 문양과 비슷하고 아주 불규칙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같았다.

    그런데 석판의 배열이나 문양이 공교롭게도 훼손된 소형진법을 떠올리게 했고 그 진법 중앙에 뚫린 주먹 크기의 구멍에서 은색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나와 세령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그제야 세령지의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립은 고민하지 않고 푸른 검기를 날렸다. 푸른 물뱀처럼 변해 날아간 검기가 은색 물이 새어나오는 구멍을 베려했다.

    쾅!

    그런데 뜻밖에도 진법에서 오색 보호막이 나타나 푸른 검기를 튕겨냈다. 이번에는 은색 불구슬을 뿜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웽웽!

    곰곰이 생각하던 한립은 수결을 맺어 이번에는 서금충 수백 마리를 불러들였다. 오색 보호막에 빼곡하게 들러붙은 금색 딱정벌레들이 날카로운 이빨로 빛의 장막을 갈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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