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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32화 (989/2,000)

1232화. 은색 연꽃

*

얼음 속 영약을 살피던 보화 성조가 또 고개를 저었다.

“나도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특이한 모양을 지닌 것은 천음뇌핵 밖에 없을 걸세. 특수한 공법을 수련한 이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보물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필요로 하는 영약은 아니군.”

그녀의 말에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옥함을 거두고 이번에는 녹색 옥함을 꺼냈다.

그 안에도 오색 얼음조각이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새하얀 색의 기이한 꽃이 얼어붙어 있었다. 멀리서 얼음 속 꽃을 보던 백의 여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견문이 넓은 그녀도 하얀 꽃의 내력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원염 성조도 하얀 꽃을 보고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무엇인지 떠올리지는 못했다. 한립이 여인의 표정을 확인하고 옥함을 거두고 다음 물건을 꺼냈다.

이렇게 여섯 번째 영약이 나올 때까지 보화와 원염은 다른 영약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한립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오색 얼음 속에 봉인된 은색의 풀을 보여주었을 때 보화와 원염이 경악해 동시에 소리를 높였다.

“연마초!”

“이럴 수가!”

보화와 원염 성조 둘 다 소리쳤지만 가만히 있는 보화와 달리 흑포 청년은 당장 뛰쳐나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립 앞에 나타난 원염 성조는 손을 뻗어 은색 영초를 빼앗으려 들었다. 이에 한립은 얼굴을 굳히고 소매를 펄럭여 오색 얼음을 숨기고 비늘로 뒤덮인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꽝!

금빛과 검은빛의 교전에 돌풍이 솟구쳤고 그 파장으로 허공에 가느다란 흰색 흔적들이 나타났다 괴이하게 사라졌다.

그 여파로 한립과 원염 성조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튕겨나가 멈추었다. 한립은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원염 성조를 노려보았다.

“강제로 빼앗을 생각이라면 저도 거절하지 않고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우드득!

그의 어깨에 금빛이 반짝이고 마화된 금색 머리가 자라났다. 어깨 밑으로는 금색 비늘 갑옷을 입은 팔뚝 두 개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양두사비(兩頭四臂)의 마물로 변한 한립은 네 개의 팔로 주먹을 쥐고 이전보다 배는 더 강력한 기운을 드러냈다.

“이열변신(二涅變身)! 과연 열반성체를 고계까지 익혔어.”

그것을 본 보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원염 성조도 한립의 변신에 꺼려하는 기색이 어렸지만 연마초는 그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연마초는 네가 갖고 있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것만 내놓으면 나는 바로 이곳을 떠나 절대 너와 보화 수사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

“연마초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봅니다. 두 분께서 영약에 대해 아시면 간략히 설명을 해주시지요. 다른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은 청년의 말은 신경 쓰지 않고 냉랭히 말했다.

“연마초는 천음뇌핵과 마찬가지로 상계에서나 구할 수 있는 천지영약일세. 우리와 같은 성족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보다는 원염 수사가 간절히 원할만한 영약이지. 원염 수사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 없을지가 그 영초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그래서 다른 여러 영초로 연마초를 길러내려다 지금까지도 성공하지 못했지.”

“보화 수사,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보화가 무슨 생각을 품었는지 연마초와 원염 성조에 대해 술술 풀어놓자 흑포 청년이 난색을 표하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렇군요.”

한립은 생각에 잠겼다.

“연마초는 본 좌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하는 물건이다. 연마초를 위해서라면 주 원신이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너를 영원히 이곳에 가둬둘 수 있다는 소리지!”

흑포 청년이 결심이 섰는지 협박을 해왔다.

“어차피 제게 별 필요 없는 영약이라면 남겨두어 무엇하겠습니까? 허나 그런 말 몇 마디로 제게서 귀한 영약을 가져가실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잘못 생각하고 계시 겁니다.”

한립은 두려운 기색 없이 대답했다.

“연마초만 내주면 너 같은 합체기 수사들이 오매불망하는 보물과 거래할 수도 있다!”

흑포 청년도 한립과 부딪치기 보다는 온건한 방법으로 영초를 얻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는지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하, 연마초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 나누시지요. 아직 보화 선배님과의 거래가 끝나지 않아서요.”

“좋다. 그럼 수사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원염 성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화 선배님, 이제까지 보여드린 영약을 모두 싫다고 하셨으니 저도 내보일만한 것이 몇 가지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들마저 아니라 하시면 저를 나무라실 일은 아니란 뜻입니다.”

한립의 시선이 다시 백의 여인에게 향했다.

“일단 남은 영약들이나 꺼내보게.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상의해도 늦지 않으니.”

보화가 눈썹을 슬쩍 끌어올리고는 차분히 말했다. 한립은 곧바로 소매 속에서 남색 옥병을 불러내 그 속으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옥병이 부르르 몸을 떨며 펑! 하고 열리자 안에서 우윳빛 샘물이 솟아나왔다. 샘물 속에서 주먹 크기의 은색 연꽃송이와 어린아이 손가락 같이 생긴 연뿌리가 떠있었다.

연꽃 송이는 서서히 샘물 위를 떠다니며 속세의 것이 아닌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한립이 여인의 표정을 살피자 유유자적하던 여인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녀의 답을 알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선배님께서 원하시던 물건 같습니다. 이것의 이름과 내력을 설명해 주시어 오랜 세월 품고 있던 의문을 풀어주시겠습니까?”

“이름도 몰랐으면서 내력은 알아 무엇을 하겠는가. 짐작대로 자네는 내가 필요로 하는 영약을 지니고 있었군. 허나 자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내줄리 없고 원하는 바를 말해보게.”

여인은 겨우 은색 연꽃에서 시선을 거두고 한립을 향해 말했다.

“처음에 보여드린 영약들이라면 몰라도 뒤쪽의 몇 종류는 선계에서 흘러든 영약이라 영계와 마계를 통틀어 하나뿐인 물건들입니다. 선배님이라 해도 아무 대가 없이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으셨을 테지요. 게다가 저는 영약을 보여드린다고만 했지 드린다고 약속한 적은 없습니다.”

“알겠네. 자네가 직접 원하는 조건을 제시해 보게. 내게도 영계의 늙은이들과 거래한 보물과 공법 구결 혹은 진령정혈이 있네. 수련한 공법이 달라도 대승기에 이르면 겪었던 경험과 깨달음을 전수해주는 것도 가능하고 말이야.”

“진령정혈이요?”

“예전에 이런저런 진령정혈을 모아두었다네. 자네의 열반성체는 여러 진령혈맥의 힘을 빌려 강제로 변신하는 것 같던데 더 많은 진혈이 있다면 유용할 테지.”

“확실히 전령정혈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어느 것이나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선배님이 지닌 진령정혈의 종류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난 오봉(烏鳳), 육시골구(六翅骨鳩)…….”

백의 여인은 흔쾌히 여섯 가지 이름을 말했다. 전부 아주 희귀한 진령들이었지만 그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이라면 제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종류의 정혈은 없으십니까?”

“채봉의 정혈이 있네만 자네가 이미 지니고 있고 다른 것들은 진작 써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네. 내게 합체기 수사의 수행을 증진하는데 좋은 단약들도 있는데 보겠는가?”

가볍게 생각하던 보화 성조가 진지하게 제안했다.

“아닙니다. 제가 마계에 들어온 것은 바로 저 두 영물 때문입니다. 선배님께서 제 바람을 들어주신다면 영약을 내드리겠습니다.”

“세령지에 들어가고 정령련을 복용하고 싶다는 말인가?”

보화의 눈빛이 언뜻 서늘해졌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것은 대승기에 이를 기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지요.”

“세령지에 들어가고 정령련 한두 뿌리를 취한다고 정녕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은가? 미리 말해두지만 이전에도 세령지에 들어갔던 이들이 꽤 되었다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영계의 선배님들께서 이곳을 먼저 찾아놓지 않으셨다면 저희가 어찌 알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영계? 두 영물을 너무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닌가? 영계를 포함한 다른 강력한 계면의 강자들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세령지에 몸을 담그기를 요구해 왔었네. 거대 세력을 등에 업고 있어 우리도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고 약간의 보수를 받고 허락해 주었지. 그들 중 세령지와 정령련의 힘을 빌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이는 1할도 채 되지 않았네.”

“다른 계면의 강자들도 1할 밖에는……. 그렇다고 해도 저는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멈칫하던 한립이 꿋꿋이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였다.

“세령지에서 경지를 높이는데 실패한 수사들 중 9할이 그 후로 아예 수행을 높일 수 없었다면 어떠한가?”

보화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예 수행을 높일 수 없게 된다고요?”

“세령지에 들어갈 기회를 얻은 이들은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이득을 보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무도 대승기에 이르지 못했다네. 그런 치명적인 약점이 없었다면 고령도 같은 중요한 곳의 경계가 이리 허술할 리가 있겠는가.

진작 여려 시조들이 힘을 모아 섬 자체를 없애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지. 세령지와 정령련은 우리 성족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다른 계면의 강자들만 늘려 줄 뿐이니까. 자, 한 수사. 이래도 세령지에 들어가고 싶은가?”

“그 말이 사실입니까?”

한립은 골똘히 생각하다 원염 성조를 향해 물었다.

“흐흐, 우리가 이런 일로 너를 속여 무엇 하겠느냐. 세령지와 정령련은 대승기에 이를 확률을 높여주는 역천의 능력을 지녔으니 그만큼 심각한 후환을 몰고 올 뿐이다. 이 세상에 어디 완벽한 것이 있겠느냐.”

흑포 청년은 음산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후환을 제거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물론 있네. 허나 내가 볼 때 한 수사가 행하기는 불가능한 것들이니 마음을 접었으면 좋겠군. 아니, 나라고 해도 해낼 수 없는 것들이야.”

한립의 질문에 보화가 조소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단 말입니까?”

한립보다도 원염 성조가 더 놀라 물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원염 수사 보다 제가 시조로 머문 세월이 훨씬 길지 않습니까? 저와 열반 성조처럼 대승기에 오래 머물다보면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되는 법이지요.”

백의 여인이 냉랭히 흑포 청년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흑포 청년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채고 열이 받았지만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그 중 한 가지는 운 좋게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뭐, 어차피 안 될 일이지만 알려줄 수는 있네. 허나 그 전에 수사도 영약을 품고 있는 샘물 일부를 내주어 영약의 진위를 감별하게 해줘야 할 것일세”

“샘물을요? 알겠습니다.”

한립은 보화의 요구에 눈을 깜빡이다 손끝에서 샘물 방울을 튕겨냈다.

쉭!

우윳빛 액체가 보화성조 면전까지 날아들었다. 백의 여인은 환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무형의 기운으로 감싸고 살펴보았다.

잠시 후 보화 성조가 샘물 방울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마치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분명하군. 이제 확신할 수 있겠어. 세령지와 정령련의 후환을 제거하는 방법을 기록한 옥간을 내주겠네.”

보화는 미리 준비해둔 남색 옥간을 던져주었다. 한립은 그것을 받아들고 의식을 불어넣어 안에 새겨진 생생한 도안과 빼곡한 이름 그리고 설명들을 읽기 시작했다.

‘장령롱화(藏玲瓏火)에 들어가 49일을 보낸 후에 화천보현단(化天補玄丹) 3알을 복용…….’

처음 몇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벌써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선계의 유명한 영물들이라 영계가 아니라 진선계라 해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세령지와 정령련보다 더 귀한 것들인데 그런 게 있었다면 왜 여기까지 왔겠는가?

하지만 옥간의 내용이 남아 있었기에 한립은 울적한 마음을 참고 계속 읽어나갔다.

‘건곤(乾坤)과 합화(合花)를 가루로 만든 다음에 칠족진오(七足眞烏)의 요단을 주로 하고 다른 영약들을 섞어 제련한 영액에 백년 넘게 몸을 씻는…….’

어이가 없었다. 칠족진오면 천룡, 채봉 급의 강력한 진령인데 어디 가서 그 요단을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건곤과 합화는 들어본 적도 없는 물건이라 찾을 가능성이 더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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