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화. 천음뇌핵(天音雷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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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 보이는 녹색 검 그림자는 자세히 보면 작은 녹색 주술문자가 응결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보통의 주술문자와 달리 녹색 기운이 무척 진하고 그 안에 미세하게 금은색 문양이 새겨진 기이한 문자들이었다.
게다가 한립을 중심으로 주변의 천기원기가 깔때기 모양을 이루며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검 그림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하게 실체화되는 중이었다.
“말도 안 돼! 현천의 보물!”
흑포 청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기운으로 보아 확실히 현천의 보물에, 수사가 지닌 흑마비 이상의 위력을 지닌 보물입니다. 영계의 보물 중 3번째로 강력한 현천참령검이 새로 등장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인족(人族)의 손에 있었군요. 제가 인족을 너무 얕본 모양입니다.”
보화는 눈을 반짝이며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족이 현천의 보물을 얻었다 한들 어찌 합체기 수사에게 주었겠습니까. 대승기 이상의 수행을 지니지 않으면 제대로 발동할 수도 없는 것을요.”
원염 성조가 고개를 저었다.
“발동할 수 없다고요? 그럼 저 자는 어찌 제 영화지(怜花指)를 막았단 말입니까.”
“보물의 기운을 빌려 허장성세(虛張聲勢)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화의 물음에 원염 성조도 확신하지 못하고 답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원염 수사께서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하하, 보화 수사께서 찾는 녀석을 제가 건드려 무엇 하겠습니까. 수사께서 알아서 하시지요.”
흑포 청년은 웃음을 흘리고 재빨리 발을 뺐다.
“그 말은 저 인족 수사를 포기한다는 것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요? 제가 손을 쓴 이후에 딴 마음을 품지나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절대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수사께서 언행일치를 하시리라 믿고 제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보화 성조가 이야기를 마치고 두 손을 부딪쳤다. 꽃송이들이 사라지고 분홍 기운이 뭉쳐져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만들어냈다. 반투명한 분홍빛 가지에는 주술문자가 꼼꼼하게 새겨져 있었다.
여인의 손짓에 따라 분홍 나뭇가지가 서서히 움직였고 주변 몇 리의 구름색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꽃잎들을 비처럼 쏟아냈다.
한립 주위로 분홍빛이 반짝이고 수많은 꽃잎들이 칼날로 변해 날아들었다. 한립은 분홍빛 중심에 섰지만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녹색 검 그림자가 웅웅! 울어대며 그의 손바닥 속으로 번개처럼 수축해 돌아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대한 검의 기운이 한립의 몸을 통해 밖으로 분출되었다.
흑녹색 빛이 반짝거리며 커다란 거검이 팔뚝에서 솟아올라 그를 가려주었다.
티티팅!
거검에 부딪친 분홍 검들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분홍 검들은 봄날에 눈 녹듯 푸른빛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의 여인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 없이 나뭇가지를 가볍게 두 번 흔들었다.
티티티팅!
연못 상공의 분홍 검들이 몸을 부풀려 푸른 검으로 쏟아졌다. 푸른 검막(劍幕)이 불가사의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검으로 변한 꽃잎이 수천 개나 쏟아지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현천의 보물이 형성한 검막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보화의 입꼬리가 휘었다. 현천의 보물이 진정한 위력을 내지 못한다면 맹공을 퍼부어 단시간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푸른 검막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은 흑녹색 빛이 어른거리는 팔뚝을 내려다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겠어.’
그는 마음을 굳히고 자신의 뒤통수를 치자 금색의 원영이 날아올랐다. 한립과 똑같이 생긴 원영 주위로 수십 개의 푸른 검들이 맴돌았다.
동시에 수결을 맺은 한립의 몸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개의 금빛 속에서 거대 원숭이, 채봉, 은색 붕새, 공작, 금룡 등 다섯 개의 허상이 떠다녔다.
원영은 주저하지 않고 작은 손을 뻗었고 다섯 개의 진령허상이 원영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릉!
원영이 발산하는 눈부신 금빛에 한립 본체와 원영이 종적을 감추고 삼두육비의 거인이 나타났다.
금색 비늘로 뒤덮인 피부에 머리에 솟은 푸른 뿔 그리고 미간의 새까만 제3의 눈이 눈길을 끌었다.
냉랭한 눈길로 보화를 올려다보는 거인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주었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두 눈은 찌를 듯한 강렬한 금빛을 머금었다.
흑포 청년이 그 눈을 직시하다 바늘로 찔린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여, 열반성체(涅槃聖體)? 저 자는 열반 성조와 무슨 관계이기에 무상의 마체(魔體)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열반 성조만 대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열반성체는 맞지만 대성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번 변신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보화의 눈에도 이채가 어렸다. 마화된 한립은 두 마족 성조가 놀라든 말든 낮게 울부짖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금빛 찬란한 팔뚝에서 흑녹색 빛이 튀어나와 손바닥 크기의 검으로 변했다. 검은 수축했다 늘어났다를 반복했고 희미하게 은색과 금색 주술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열반성체라면 현천의 보물을 발동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습니다.”
보화가 그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마화된 한립이 흑녹색 검을 보고 묘한 눈길을 보내다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저와 싸워볼 생각이십니까? 섬 밖이었다면 현천의 보물을 지녔어도 선배님의 상대가 될 수 없었겠지만 이곳은 사정이 다르지요. 선배님도 저와 싸움을 벌여 양패구상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닐 겁니다.”
“열반성체와 현천의 보물을 지녔으면 나와 목숨을 걸고 싸울 자격은 갖추었네. 그렇다면 좋아. 자네가 한 가지 물건만 내놓는다면 나도 여기서 멈추겠네.”
보화가 눈을 반짝이며 빙긋 웃었다. 여인의 미소에 주변이 백만 송이 꽃이 한 번에 피어난 것처럼 환해졌다.
“……물건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한립이 움찔하며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여인을 훑었다.
“구체적인 정보는 나도 모르지만 십중팔구 영약일 것이야.”
침음하던 보화가 뜻밖에도 전음으로 말했다. 원염 성조가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흑포 청년은 냉소한 채 뒷짐을 쥐고 서있었다.
“선배님의 신분에 구하지 못할 영약이 없을 텐데 어째서 제게 내놓으라는 것입니까?”
한립이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어째서 자네에게 영약을 찾는지는 묻지 말게. 그저 내가 필요로 하는 영약을 자네가 갖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고 밖에는 답할 수 없으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성계까지 왔겠는가?”
“그렇다면 진작 저를 주시하고 있으셨을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 손을 쓰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건 이전까지는 영약이 자네에게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일세. 지금은 다른 이들이 전부 죽었으니 영약을 지니고 있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네뿐이 아닌가.”
보화는 거리낌 없이 사실대로 설명해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하아, 그럼 어찌 됐든 선배님께서 찾으시는 영약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지닌 영약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용도나 효과는 나도 모르네. 그저 자네가 성계로 진입하기 전에 얻었고 영계에서 거의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것이라는 것만 아네. 아예 영계의 물건이 아닐 수도 있고.”
‘영계의 물건이 아니라고?’
그녀의 말에 한립은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광한계에서 얻은 영약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변화를 감지한 보화가 미소를 지었다.
“한 수사가 구하기 어려운 영약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구만! 그것만 내어준다면 자네가 이곳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해주겠네. 원염 수사도 자네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말이야. 또한 자네가 반길만한 아이도 주겠네. 흑악, 그 아이를 보여주게.”
“예, 대인!”
흑갑 거한이 얼른 허리를 굽히고 허리춤의 노란 가죽 주머니에서 어린 여자 아이를 풀어놓았다. 정신을 잃은 소녀가 허공에 떠올랐다.
소녀를 보자 한립의 동공이 수축했다. 바로 영계로 먼저 돌려보낸 주과아였다.
“영약만 내주면 이 아이를 돌려줄 것이니 걱정 말게.”
“저와 인연이 있는 아이는 맞습니다. 선배님께서 그 아이를 데리고 계시면 임 수사는 이미 목숨을 잃었겠군요.”
“아이와 같이 있던 합체기 수사라면 몸에 지닌 진령혈맥 약간을 제외하면 쓸모가 없어 남겨 두지 않았네.”
보화는 담백하게 인정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두 분도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겨우 영약 때문에 목숨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몇 가지 영약을 꺼내 보여드릴 테니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한립이 탄식하며 냉랭해진 말투로 제안을 수락했다.
“현명한 판단일세! 흑악, 아이를 보내주게.”
그 말에 보화가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흑갑 거한을 향해 명을 내렸고, 흑악은 한 손을 털어 주과아를 한립에게 날려 보냈다.
그는 굳은 얼굴로 푸른 기운을 보내 주과아를 끌어왔다. 소녀의 몸에 간단한 금제가 걸려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푸른빛으로 감싸 특수한 보물 속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는 머릿속으로 지니고 있는 영약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광한계에서 얻은 영약들은 돌아와 수없이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대부분은 아직까지 용도와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저물대에 처박아 두고 이후 용도를 알게 될 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마족 시조의 눈에 광한계의 평범한 영약들이 눈에 찰 리 없었고 마지막에 얻은 귀한 선계 영약이 그녀가 찾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수결을 맺어 흑녹색 검을 거두고 금제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하얀 옥함을 불러내 던져주었다.
쉭!
백의 여인은 고운 손을 뻗어 옥함을 불러 들였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부적들이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고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옥함 속 비취색 영약은 맑은 향과 하얀빛을 내뿜고 있었다.
보화는 잠시 살펴보다 고개를 젓고 분홍빛을 번득였다. 그러자 함이 저절로 닫히고 금제 부적들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달라붙어 한립에게 돌아왔다.
한립도 의외라 여기지 않고 미리 꺼내 놓은 은색 옥병을 튕겨 보냈다. 옥병을 받은 보화가 의식으로 내용물을 훑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다시 돌려주었다.
그들의 모습에 원염 성조도 그들이 나눈 대화를 짐작했지만 입을 비죽였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겨우 합체기 수사가 시조 급이 욕심낼만한 영약을 지니고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한립이 8번째 영약을 보여주었을 때 백의 여인이 얼굴을 굳히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뿐이라면 더 보여줄 것 없네. 귀한 영약들이기는 하지만 내게 이런 물건들이 쓸모가 있으리라 보는가?”
‘역시…….’
그 말에 한립이 주저하다 우윳빛 옥함을 꺼냈다. 이전 옥함들과 달리 희미하게 한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립은 옥함을 바로 여인에게 던지지 않고 스스로 부적을 뜯어 옥함을 열어 보였다.
서늘한 기운이 자욱하게 어리고 오색의 얼음 조각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 금색과 은색의 과실 두 개가 맺힌 주황색 나뭇가지가 얼어 있었다.
“천음뇌핵(天音雷核).”
보화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혔다. 곁에서 비웃고 있던 원음 성조도 마찬가지였다.
“천음뇌핵이요?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상계에나 있을 물건이 어찌 한낱 인족 수사가 지니고 있단 말입니까! 너는 그걸 갖고 와서 본 좌에게 보이거라!”
“송구스럽지만 원염 선배님의 분부에는 따를 수 없겠습니다. 보화 선배님, 찾으시던 물건이 이것이 맞습니까?”
한립은 단박에 흑갑 청년의 요구를 거절하고 보화 성조를 향해 물었다.
상고경전을 통해 천음뇌핵이란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가 지닌 영약이 천음뇌핵일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마족 시조들에게 선계 영약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는 것이 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약의 내력과 효과를 알아야 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흑갑 청년은 한립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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