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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230화 (987/2,000)

1230화. 보화의 등장

*

섬 안의 천지원기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연못 상공에 주먹만 한 오색 빛구슬들이 나타나 위선뢰를 향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꼼짝 못하던 위선뢰의 표면에 암녹색 문양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터져라!”

위선뢰의 암녹색 문양이 반짝반짝 빛나다 거센 기운을 토해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문양을 따라 위선뢰의 단단한 몸이 갈라지고 눈부신 빛을 방출했다.

쿠쿠쿵!

오색 태양이 떠올라 위선뢰가 매몰되었다.

“이런!”

흑포 청년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운 기색이 스치며 잔영을 남기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등 뒤의 거대 두꺼비도 엄청난 속도로 혀를 거둬들였다.

거대 혀는 다시 미친 듯이 움직여 커다란 금색 그물로 청년을 보호했다. 수축할 대로 수축한 오색 태양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자폭!”

“어서 달아나야 해요!”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농 가 노조와 엽 수사가 혼비백산해 소리쳤다. 위선뢰가 자폭하면 그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영족의 대승기 수사는 진작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원염 성조와의 거래는 아주 극비였는데 어찌 세상에 이 일이 알려지게 두겠는가.

한립도 깜짝 놀라 두 극산을 부풀려 앞을 막고는 거원의 몸에 입고 있던 검은 갑옷에서 주술문자를 일으켜 검은빛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이어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신이 나타나 여섯 개의 손에서 금빛을 뿜었다. 커다란 금색 소용돌이가 두 산봉우리 앞에 나타나 쾌속으로 회전했다.

이때 그의 소매 속에서 웽! 하고 수만 마리의 금색 딱정벌레들이 날아올라 구름처럼 그의 앞을 막아섰다. 딱정벌레들은 고풍스러운 양식의 갑옷으로 뭉쳐져 굳건히 거원 앞을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농 가 노조와 엽 수사도 필사의 각오로 최후의 방법을 펼치고 있었다.

농 가 노조는 반요화된 몸으로 놀랍게도 발톱이 다섯 개 달린 금색의 용으로 변신했는데 비늘 하나하나가 순금을 녹인 듯했다. 금룡이 입을 쩍 벌려 금색 구슬을 뱉어냈다. 달걀 크기의 구슬이 빙글빙글 돌며 금색 기운 속에서 거대한 꽃들을 피워냈다.

오조금룡 본체의 비늘들이 수직으로 서서 퍽퍽 튀어나왔다. 비늘들은 손바닥 크기의 방패로 변해 농 가 노조 주위를 물샐틈없이 보호했다. 몸을 둥글게 만 금룡은 비늘 방패 속에서 커다란 금색 구슬처럼 변했다.

엽 수사는 오색 기운을 흩날려 사람보다 몇 배는 더 큰 오색 채봉으로 변신했는데 채봉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주변 허공에 가느다란 공간 균열이 생겨났다.

채봉으로 변신한 소녀가 공간신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일부러 수백 개의 공간균열을 만들어낸 것이다.

채봉의 머리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와 13겹의 오색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체내의 법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은 것이다. 이때 위선뢰가 자폭한 오색 태양에서 치지직 거리는 소리가 났다.

휘휘휘휘휙.

오색실들이 천만 개의 화살처럼 태양에서 쏘아져 나와 산골짜기 허공을 꿰뚫었고, 이에 산골짜기가 눈부신 빛과 파공음으로 가득 찼다.

위선뢰의 폭발은 그치지 않을 듯 계속되다 점점 옅어져 결국 사라졌다.

이에 산골짜기가 크게 변해 버렸다. 정순한 영기로 가득 찼던 연못은 텅 비었고 녹색 돌바닥에는 거대한 진법이 검은빛을 반짝였다.

위선뢰가 재로 흩어지고 커다란 하얀 공간균열이 강력한 파동과 함께 천천히 봉해지고 있었다.

균열에서 멀리 떨어진 허공에 흑포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떠있었고 그 앞을 검은 거검이 수직으로 서서 막아서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상처 부위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원염 성조의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흑마비로 대부분의 폭발 위력을 막았음에도 위선뢰의 폭발 중 8, 9할이 그를 향해 쏟아져 부상을 면할 수가 없었다.

공간 균열을 노려보는 청년의 얼굴에 비정상적인 붉은 기운이 어렸다. 대승기에 진입한 이래 수만 년 만에 맛보는 치욕이었다. 게다가 원흉이 마계에 없어 당장 보복할 수도 없으니 더욱 열불이 났다.

펑-!

흑포 청년은 거검으로 허공을 갈라 남아있던 공간균열을 반으로 갈랐다.

“……?”

그는 겨우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 한립 등이 있던 자리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그곳에 누군가 팔을 들어 올린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커다란 산봉우리 두 개가 빛이 암담해진 채로 그의 좌우에 떠 있었고 만 마리가 넘는 서금충들이 만들어낸 방패는 대부분이 사라졌고 몇천 마리의 서금충만이 남아 겨우 버티고 있었다.

성체 서금충들이 전부 죽어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무서운 위력에 정신을 잃고 나가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 있던 삼두육비 금신은 이미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홀로 고공에 떠있는 인영은 한립이었다. 그는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입고 있는 갑옷이 갈라졌을 뿐 육체는 멀쩡했다.

그러나 그의 곁에 몰려 있던 농 가 노조와 엽 수사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방어수단을 펼쳤음에도 위선뢰의 폭발에 흔적도 없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에 흑포 청년은 한립이 멀쩡한 것에 더욱 놀랐다. 원염 성조는 노기를 억누르고 한립이 위기를 모면한 이유를 파악하려 했다.

그런데 한립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손상을 입은 극산들과 영충 방패는 신경 쓰지 않고 들어 올린 자신의 팔만 어두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펑!

갈라진 검은 갑옷이 조각나 마기로 흩어졌다.

한립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농 가 노조와 엽 수사가 서있던 허공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포 청년을 배회하던 삼두 교룡도 자취를 감추었다. 자폭에 휘말려 죽은 것인지 아니면 그 전에 흑포 청년이 비술을 거둬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합체기 수사가 이런 폭발에서 살아남다니. 허나 다른 이들은 전부 죽었다 너도 곧 그 뒤를 따르게 될 테고 말이야!”

흑포 청년은 자신의 팔을 힐끗 보고는 냉소했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선배님께서도 크게 원기를 상하셨을 겁니다. 게다가 상처를 회복하느라 본래 마기의 3할밖에는 남지 않으셨을 테지요.”

한립은 아주 태연했다.

“그럼 어쩔 테냐! 흑마비를 지닌 나를 너 혼자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게다가 골짜기의 금제만 깨면 외부의 마기를 흡수해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다.”

파공음이 울리고 새까만 검빛이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에 한립이 등 뒤에서 금빛을 반짝이며 삼두육비 금신을 다시 불러내려는데 고공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원영 수사. 저도 섬에 침입했는데 함께 죽이실 생각입니까?”

새까만 검빛 위로 분홍색 꽃이 나타나 꽃잎들이 휘날렸고 짙은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검빛은 꽃잎으로 빨려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커다란 꽃에서 사내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치마를 입은 절색의 여인과 흉악한 생김새의 거한은 바로 보화 성조와 흑악이었다.

“당신은……!”

백의 여인을 한눈에 알아본 원염 성조가 대경실색했다.

“아직 저를 잊지 않았나 봅니다. 세월이 꽤 흘렀는데 아직도 수행에 큰 진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초를 재배하는데 실패한 것 같군요.”

보화 성조가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녀의 등장에 한립이 일단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마계로 들어온 후 뭔가가 자신을 줄곧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의식과 명청령안으로도 밝혀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백의 여인을 보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보화 수사가 여기는 웬일입니까. 감히 성계로 돌아오다니 대단하십니다!”

“어째서 성계로 돌아오지 못하죠? 설마 수사와 육극 때문에 말입니까? 사실 수사가 오기 전부터 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화는 고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영계의 수사들과 작당이라도 한 것입니까!”

흑포 청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작당이랄 것은 없지만 따라온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위선뢰와 영왕의 혼백까지 섞인 무리일 줄은 몰랐고요. 거기다 수사는 방심하다 그들에게 중상을 입지 않았습니까.”

“흥, 고령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어 이렇게 된 것뿐입니다. 그보다 보화 수사도 그리 큰 소리칠 입장은 아닐 텐데요. 제가 친히 새겨 놓은 몽염혈주 때문에 원래의 법력을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요. 기껏해야 본 실력의 2, 3할밖에 발휘할 수 없으면서 어디서 위세를 떠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당초 육극의 악랄한 수법과 수사의 몽염혈주(夢魘血呪)로 인해 대부분의 법력을 부상을 억누르는데 쓰고 있습니다. 허나 제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음산한 흑포 청년의 말에 백의 여인이 담담히 답했다.

“어떤 대단한 준비를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몽염대법을 수련한 나는 7대 적혈원신(滴血元神)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주 원신이 이곳에서 소멸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적혈원신이 주 원신으로 변할 거예요.”

원염 성조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리고 소리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보화를 상당히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다.

“적혈원신들을 깡그리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일단 주 원신을 잃고 다시 법력을 회복해야 한다면 수사께서 다음 천마(天魔)의 겁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보화 성조는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다음번 천마의 겁을 이겨낼 수 없다면 내 기필코 당신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진신으로 영계에 강림해 끝까지 추살하면 그만입니다.”

“진신 강림이 그리 쉬웠다면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영계의 노괴들이 연합해 진신을 도륙할까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보화 수사가 할 수 없었다고 지금 3대 시조도 불가능할 거라 자신하지 마십시오.”

“그런가요? 오랜 세월 두문불출하는 사이 세 분이서 뭔가를 알아내셨나 보군요. 허나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성계로 온 것은 수사 때문이 아니고 그 때의 일도 따져보면 결국 육극이 문제였으니까요. 당시 서로의 입장이 바뀌어서 제가 수사였다고 해도 기습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육극을 멸살하기 전에는 수사를 건드릴 마음이 없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예전에는 제 수행이 수사를 훨씬 넘어섰다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싸워봤자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클 테니까요. 법력을 회복하기 전에는 수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천마를 걸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엔 왜 나타난 것입니까? 본 좌가 낭패를 당하는 꼴을 구경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성계로 잠입했다고 말할 작정은 아니겠지요.”

원염 성조가 움찔해 의심스런 기색을 보였다.

“수사가 흑마비만 지니지 않았어도 다른 마음을 품었을 테지만 지금은 저자를 따라 온 것입니다.”

백의 여인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한립을 지목했다. 얌전히 두 마족 시조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립의 안색이 급변했다.

‘엇!’

등 뒤의 삼두육비 허상이 앞으로 나섰고 동시에 한립이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쿵!

범성금신의 가슴이 움푹 불어갔다. 하얀 빛이 주먹만 한 구멍을 뚫고 한립에게 날아들었다. 금신의 모습에 한립은 곧바로 팔뚝에서 흑녹색 기운을 방출했다.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기운이 빠져나가 녹색 돌풍을 만들어냈다.

그 모습에 백의 여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법력의 8할을 담은 공격이라 대승기 수사와 비슷한 위력을 냈는데 한립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위선뢰의 폭발로 한립이 강력한 신통들을 써버려 쉽게 제압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마족 3대 시조 중 한 명인 그녀의 신통이 이거 하나일 리 없다.

보화의 손에서 분홍색 기운이 빠져나와 반투명한 꽃봉오리를 이루었다. 막 그것을 날려 보내려던 그녀가 순간 행동을 멈추었다.

녹색 돌풍이 가시고 한립의 쫙 펼쳐진 손바닥에서 검의 형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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